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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20. 13:31 Daily Bread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신 것은 우리가 계속 과녁을 빗맞히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분은 줄곧 과녁에 적중시켰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요한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거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영광을 그 분에게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성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머리 뒤에 밝게 빛나는 후광이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공생에 전 어린 시절에도, 그리고 장성하여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며 요셉의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셨다. 또한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수행하시면서, 누구나 다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는 당시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말을 거시며, 몇 년 동안 아무도 피부로 접촉해 본 적이 없는 문둥병자를 직접 만지셨고, 몇 년 동안 아무도 피부로 접촉해 본 적이 없는 문둥병자를 직접 만지셨고, 병자들에게 손을 언지시며, 당시의 내노라 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은 피하려고 했던 부도덕한 사람들, 세리, 기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셨는데, 이럴 때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말과 태도와 행동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라고 기록할 수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님의 삶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다.(히브리서 1:2~3)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들이 나타내셨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아들이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절정이 십자가 상의 죽음과 부활이긴 하지만, 그분은 그에 앞선 33년 동안 자신의 인격과 말씀과 행동과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 생애를 통해, 우리는 이르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근본에 있어서 우리와 완전히 다르신 분이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삶에 관한 한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살기로 하셨고, 모든 인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빌립보서 2:6~7).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히브리서 4:15)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니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다는 것이다(히브리서 4:15). 예수님은 단지 그릇된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일관되게 옳은 일을 행하셨다. 예수님의 삶과 행동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계시하셨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30 Daily Bread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것과, 또한 경건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계속 가지고 있으나, 경건해질 수 있는 능력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이 경건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안에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으며, 경건해질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올바른 삶을 계속 살지 못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울은 경건한 삶을 살기 원하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갈등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로마서 7:15). 바울은 무엇이 선한 것이며,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기도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나쁜 줄 알고 행치 아니하기로 결심한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행하였다. 그가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상충되고 있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마음에서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선을 행할 능력이 내게 없음으로 인해 나의 원함은 충족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나는 거듭거듭 좌절감을 맛본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또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내 안에 깊숙한 곳에 있기는 하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선을 행하며 선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게 만드는 그 가능성이 지금은 오히려 나의 죄와 무력함을 깨닫게 함으로써 나를 정죄하고 있다.

오랜 동안 나는 젊은 학창시절 자위행위를 즐긴 적이 있다. 그것은 나의 가정의 불안정함과 부모로부터의 사랑 결핍으로 인한 도피처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탈출구였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그리고 노력도 해보았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내 안에 내 자신에 대한 좌절감과 어쩔 수 없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만 사는 인간으로... 부정적인 자신에 대한 이미지도 갖게 되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지금 나의 삶에서도 문제가 동일하지 않을 뿐 이런 문제들이 동일하고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전원과 단절되어 있는 전구는 빛을 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계속 지니고 있지만 실제 빛을 발할 수는 없다. 전원과 단절되어 있으면 나무 토막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도 동일한 상태에 있다. 바울의 고백처럼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로마서 7:18).

이것이 죄의 본성이다. "죄"라는 말은 "과녁을 빗맞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때는 이 단어가 양궁에서 사용되었다. 궁수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빗맞으면 그것을 "죄"라 일컬었다. 1cm가 빗나갔느냐, 1m가 빗나갔느냐, 1km가 빗나갔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벗어난 정도에 관계없이 과녁에서 빗나가기만 하면 모두 죄였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서 얼마나 벗어났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쨌든 벗어났다는 사실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둔 범한 자가 된다"(야고보서 2:10)고 한 것이다. 죄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나쁜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선하지 못한가를 따지는 것이다. 우리는 과녁을 빗맞혔다.

죄가 과녁을 빗맞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맞히기로 되어 있는 과녁을 알아야 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과녁이 없다면 맞힐 곳도 없고, 따라서 빗맞힌다는 것도 없다. 또 무엇을 맞혀야 하는지를 모르면 우리가 언제 빗맞혔는지도 모른다. 과녁을 모르면 죄란 모호한 개념이 될 뿐이며, 각 사람마다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견해가 틀릴게 될 것이다. 성경은 그 과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가 맞혀야 할 과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표준은 각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죄가 죄인 것은 오직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맞히지 못하고 거기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녁인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르 알 때라야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29 Daily Bread

그 잃어버린 요소는 다름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는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살면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 가운데 살아야 했다. 그럴 때라야 인간은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현재 상태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에베소서 4:18). 그는 에베소 성동들에게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에베소서 2:1~2)라고 말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삶을 살 수 있으려면 바로 영적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한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6~17). 이것은 물론 육체적인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불순종의 결과로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서 거두어지고,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동안에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죄의 삯으로 받게 된 죽음이 바로 이것이다(로마서 6:23).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을,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선택했을 때 이 죽음이라는 삯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린도전서 15:22).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었으며, 그 후로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채로 태어나게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의 죄로 인하여 앞으로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죽임이 아담 안에서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죽어있으며, 그로 인한 결과들을 맛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간단하다. 곧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인해서이다. 그것은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라는, 죄를 의로 바꾸라는...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28 Daily Bread

40세 때 모세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히브리 노예의 아들인 그는, 히브리 남자의 대량 학살을 피하기 위해 바구니에 숨겨져 나일강에 떠내려오다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왕궁으로 옮겨져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날 이래 왕족으로서의 온갖 특권을 다 누리며 애굽의 왕궁에서 자랐다. 40세 때 그는 자신의 신원과 히브리 노예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사용하고 계신다"(사도행전 7:25)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자신을 드렸다. 그는 선한 동기에서 충성된 마음으로 행했건만, 그의 행동은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것을 행하기를 원했고,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에 착수했고, 고된 노동을 하는 히브리 노예를 때리고 학대하는 애굽인 하나를 보고는 행동에 들어갔다. 애굽인을 쳐 죽여 파묻었다.

이윽고 소문이 바로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바로는 모세를 죽이고자 했다. 모세는 도망하여 미디안 광야에 이르러 40년을 머물렀다. 히브리 민족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브라함처럼 모세도 하나님을 위한 일에 몰두했지만,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모세가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일생의 한 부분을 취하셔서 그로 더불어 큰 일을 시작하실 수 있었다. 애굽에서 도망한 지 40년 후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셨을 때 모세는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용감히 시도했다가 무참히 실패했던 터라 그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게 되어,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애굽기 3:11) 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세가 이런 반응을 40년 전에만 보였더라도... 모세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라!"였다. 그 이유는 모세 그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고 약속하셨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인 것이다. 모세가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은, 모세가 누구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13절) 하고 묻게 된다.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르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14절)고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시작과 끝이 없으신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으로 알리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만 역사하셨고, 지금은 단지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감사하며 그 일을 되돌아보며 살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늘나라에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기다리고만 계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4)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모세는 이 원리를 배웠다. 여러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다. 400여 년 간에 걸친 종살이 끝에 이 민족은 잃어버렸던 존엄성을 되찾고 빼앗견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후 행렬은 홍해 바닷가에 이르렀다. 모세가 여기까지 그들을 인도해 왔으나, 이제 그들은 홍해를 건널 수가 없었다. 걸어서 건너기엔 너무 깊고, 다리를 놓기엔 너무 넓고, 둘러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배가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령 배가 몇 척 있은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때 그들의 뒤에 애굽 군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마지못해 그들을 내보냈던 바로의 마음이 변하여 그들을 다시 붙잡아 노예로 삼고자 하여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건널 수 없는 홍해 바다가 앞에 놓여있고, 대항할 수도 없는 애굽 군대가 뒤를 쫓아오자, 백성들은 겁에 질렸다. 이스라엘 자손은 당황했으며, 공포와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 모세의 반응이 출애굽기 14:13~14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는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잘되어야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고, 잘못되면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 아닌가?

이때의 모세와 40세 때의 모세의 차이는 무엇일까? 40세 때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기 노력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자신의 능력과 계획에 대해서는 죽고, 그 일을 행하도록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만 믿고 의뢰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닷물이 갈라져 나타난 땅 위를 걸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그 홍해 바다를 사용하여 그들이 두려워했던 두 번째 문제 즉 애굽 군대의 추격을 해결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에서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사실이었다. 나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믿음의 주 곧 믿음의 창시자이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 즉 나의 믿음의 완성자이신 것은 몰랐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것을 완성시켜 나가 마치는 것은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또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는 말씀도 몰랐다. 물론 내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이루는 일은 내가 하려고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로의 돌입이다. 이러한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삶을 살기 시작하며,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사람이 되어 가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이 무엇인지, 즉 무엇이 참인지는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소망에 관한 이유 즉 왜 그것이 참인지는 설명하지 못할 수가 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신날지 모르나,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 그리고 이것이 왜, 어떻게 가능한지를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깊이 있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로 말미암은 유익들을 온전히 깨닫고 누리기 위해서는 그 이유와 방법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