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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20. 13:28 Daily Bread

40세 때 모세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히브리 노예의 아들인 그는, 히브리 남자의 대량 학살을 피하기 위해 바구니에 숨겨져 나일강에 떠내려오다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왕궁으로 옮겨져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날 이래 왕족으로서의 온갖 특권을 다 누리며 애굽의 왕궁에서 자랐다. 40세 때 그는 자신의 신원과 히브리 노예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사용하고 계신다"(사도행전 7:25)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자신을 드렸다. 그는 선한 동기에서 충성된 마음으로 행했건만, 그의 행동은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것을 행하기를 원했고,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에 착수했고, 고된 노동을 하는 히브리 노예를 때리고 학대하는 애굽인 하나를 보고는 행동에 들어갔다. 애굽인을 쳐 죽여 파묻었다.

이윽고 소문이 바로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바로는 모세를 죽이고자 했다. 모세는 도망하여 미디안 광야에 이르러 40년을 머물렀다. 히브리 민족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브라함처럼 모세도 하나님을 위한 일에 몰두했지만,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모세가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일생의 한 부분을 취하셔서 그로 더불어 큰 일을 시작하실 수 있었다. 애굽에서 도망한 지 40년 후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셨을 때 모세는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용감히 시도했다가 무참히 실패했던 터라 그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게 되어,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애굽기 3:11) 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세가 이런 반응을 40년 전에만 보였더라도... 모세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라!"였다. 그 이유는 모세 그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고 약속하셨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인 것이다. 모세가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은, 모세가 누구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13절) 하고 묻게 된다.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르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14절)고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시작과 끝이 없으신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으로 알리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만 역사하셨고, 지금은 단지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감사하며 그 일을 되돌아보며 살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늘나라에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기다리고만 계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4)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모세는 이 원리를 배웠다. 여러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다. 400여 년 간에 걸친 종살이 끝에 이 민족은 잃어버렸던 존엄성을 되찾고 빼앗견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후 행렬은 홍해 바닷가에 이르렀다. 모세가 여기까지 그들을 인도해 왔으나, 이제 그들은 홍해를 건널 수가 없었다. 걸어서 건너기엔 너무 깊고, 다리를 놓기엔 너무 넓고, 둘러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배가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령 배가 몇 척 있은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때 그들의 뒤에 애굽 군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마지못해 그들을 내보냈던 바로의 마음이 변하여 그들을 다시 붙잡아 노예로 삼고자 하여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건널 수 없는 홍해 바다가 앞에 놓여있고, 대항할 수도 없는 애굽 군대가 뒤를 쫓아오자, 백성들은 겁에 질렸다. 이스라엘 자손은 당황했으며, 공포와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 모세의 반응이 출애굽기 14:13~14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는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잘되어야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고, 잘못되면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 아닌가?

이때의 모세와 40세 때의 모세의 차이는 무엇일까? 40세 때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기 노력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자신의 능력과 계획에 대해서는 죽고, 그 일을 행하도록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만 믿고 의뢰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닷물이 갈라져 나타난 땅 위를 걸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그 홍해 바다를 사용하여 그들이 두려워했던 두 번째 문제 즉 애굽 군대의 추격을 해결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에서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사실이었다. 나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믿음의 주 곧 믿음의 창시자이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 즉 나의 믿음의 완성자이신 것은 몰랐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것을 완성시켜 나가 마치는 것은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또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는 말씀도 몰랐다. 물론 내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이루는 일은 내가 하려고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로의 돌입이다. 이러한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삶을 살기 시작하며,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사람이 되어 가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이 무엇인지, 즉 무엇이 참인지는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소망에 관한 이유 즉 왜 그것이 참인지는 설명하지 못할 수가 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신날지 모르나,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 그리고 이것이 왜, 어떻게 가능한지를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깊이 있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로 말미암은 유익들을 온전히 깨닫고 누리기 위해서는 그 이유와 방법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