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New life !
johnworld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0. 3. 20. 23:24 Daily Bread

출처 : http://www.fgnews.co.kr/html/2006/0818/06081819580013110000.htm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장)

직장에 다니는 자매 한 분의 간증을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다. 모태 신앙으로 자라온 자매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는 삶이 변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여느 간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변화가 여느 간증과 달라서 인상적이었다. 은혜를 체험하고부터 그 자매에게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 24시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의 일이 주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님의 일이 아닌 세상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면서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신학교를 가든지 선교사로 나가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러지는 않더라도 주의 일과 전혀 상관없게 느껴지는 회사 일은 그만두고 노방전도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그 자매는 “직업과 소명”에 관한 강의를 듣는 중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의 의미가 “순서를 정해서 교회, 가정, 직장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의 통치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말씀이 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도들은 청지기가 되어서 일터에서 그 명령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모든 만물이 주님의 것이면 내 직장도 주님의 것이고 모든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다니는 회사의 주인은 지금의 주주나 사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나는 회사에서 채용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용한 사람이며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이 주인인 회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의 변화와 함께 그 동안 생계유지나 자아실현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회사를 바라보던 눈이 새로워지게 됐다.

일단 직장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되자 직장의 업무에 대해서 다른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이 직장에 보내주신 이유, 또 이 부서에 보내 주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직장에서의 의무로만 생각했던 사람을 만나는 일들이 주님을 전하는 기회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서 주님을 전하려하게 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에 근무하면서 개인 전도를 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면서 다른 길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생각지도 못한 지혜를 주셨다. 회사 안의 전자우편 시스템에 있는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글을 올리자마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감사전화를 받고 격려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후로 이 글을 통해 위로 받는 사람들도 생기고 도전을 받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직장을 통한 사역의 열매가 맺게 됐다. 일반 목회자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역을 직장에 다니는 평범한 성도가 해낸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그 자매를 통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신 것이다. 이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한 평범한 성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얼마든지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성도들이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직장을 떠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주님은 그곳에서 주의 일을 하라고 우리 모두를 부르신다.


기사입력 : 2006.08.18. pm 19:58(입력)
복순희기자 (lamond@fgtv.com)

posted by johnworld
2009. 9. 10. 09:30 Daily Bread
posted by johnworld
2007. 11. 14. 16:40 Daily Bread

인도 카슈미르에 사는 8살 소녀 가디아

그 소녀에게는 아직 8살밖에 안됐지만 직업이 있다.

바로 기름 수집..

온 몸에 기름을 뭍힌 다음에 자동차 작업장에서 남은

오일을 한데 모아서 집으로 옮긴다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출처 http://bbs6.worldn.media.daum.net/griffin/do/photo/read?bbsId=314&searchValue=&articleId=152607&pageIndex=1&searchKey=

posted by johnworld
2007. 11. 2. 15:23 Daily Bread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한 케리그마 설교 출 처|문상기(침례신학대학교)


서 론



성서는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만 성서는 설교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르신 당신의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회 역사 가운데 설교라는 용어는 훈계나 권면 또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통화(진리나 사상의 전달)에서부터 고대의 형식화된 수사적 연설에 이르는 그 어떤 것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어지기도 했다. 훈계 (Homily) 는 헬라어 “대화하다” 또는 “교제하다” 의 뜻을 가진 “Homilew”에서 유래 하였다. Homilew 는 눅 24:14, 행 20:11에서 “말하다” (Talking) 로 번역되었으며 눅 24:15 에서는 “이야기하다” 로 번역되었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 “Homilew” 는 헬라의 철인들이 문화생 들에게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 되었다. 오늘날 “훈계” (Homily) 는 일반적으로 “권면” 혹은 “훈계”의 뜻으로 사용된다. Donald C. Frisk, "The Theology of Preaching: A Covenant Perspective," Covenant Quarterly 39 (August 1981-February 1982): 93; James I. H. McDonald, Kerygma and Didache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39.
설교가 보다 성서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은 구약성서에서도 그 유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언적 선포와 율법의 낭독을 나타내는 히브리 말은 헬라어 번역 구약성서(일명 Septuagint)에서 “설교(Preaching)”로 번역 되었다. “기쁨” (Joy) 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Baser” 는 삼하 4:10; 시 40:9; 사 40:9, 61:1 에 의하면 “기쁜 소식을 가져오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Qera" 는 “큰 소리로 읽다”의 뜻으로 느 8:8-9에서 느헤미아가 공중 앞에서 율법책을 읽을 때 사용된 낱말이다. David Noel Freedman, ed., The Anchor Bible Dictionary (New York: Dobleday, 1992), s.v. "Preaching," by Fred B. Craddock.

성서는 이처럼 설교에 대한 분명한 정의는 내리고 있지 않지만 신약성서는 설교의 본질을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단어들 가운데 “설교”를 지칭하는 말로서 가장 중요한 세 개의 단어는 didache(이하 이다케), euangellion(이하 유앙겔리온), 그리고 kerugma(이하 케리그마)이다. 신약성경에는 때때로 “설교”의 의미로 쓰여진 세 가지의 다른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첫째, "propheteuw" 로서 “예언하다” 의 뜻을 가지며 고전 11:4 과 13:9 에서 사용되었다. 둘째, "parakalew" 로서 “간청하다” 혹은 “위로하다” 뜻을 가지며 딤후 4:2; 히 13:22; 살전 4:1 등에서 사용되었다. 셋째, "marturew" 는 행 4:33과 10:39 에서 “증거하다” 혹은 “입증하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설교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 가운데 가장 빈번히 사용된 단어는 “kerussw”이다. 일반적으로 “kerussw" 는 “설교하다,” “선포하다,” 또는 “선언하다” 등으로 번역되었다. 명사형 "kerugma" 는 선포의 행위를 지적함과 동시에 선포되는 메세지의 내용을 의미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신약성경적 설교의 본질을 성서신학적으로 찾아보는데 있다. 이를위해 필자는 신약성경에서 설교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들(위에 지적한)을 비교연구 함으로 신약성경의 설교는 케리그마(kerugma)적 설교임을 입증 하고자한다. 케리그마적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핵심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케리그마적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회개함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성취하게 하는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0:13에서 복음의 선포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21에서는 십자가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대 설교의 부분적인 모습은 신약교회의 케리그마적 설교와 상반된 메세지를 전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Bryan Chapell은 현대설교의 인본주의적이며 형식주의적 경향을 혹평하면서 “복음주의적 설교가들은 . . . 그들의 메세지 증거에있어 도덕적 교훈이나 사회개혁에 일차적 관점을 기울이는 착오를 범하고 있다”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Grand Rapids: Baker Books, 1944), 12.
고 진언하였다. John F. MacArthur 또한 현대설교는 경험중심적, 실용주의적, 그리고 주제중심적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강단은 공허해지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ndate of Biblical Inerrancy: Expository Preaching," The Master's Seminary Journal 1 (Spring 1990): 4.
필자는 현대 성경적 설교에 있어 kerugma와 kerugma적 설교의 성서신학적 이해가 이 시대의 모든 설교자에게 요청되어 진다고 믿는다.


Didache, Euangelion, Kerugma 의 비교를 통한
Kerugma 의 세속적 의미와 용법

Didache 의 세속적 의미

헬라 세계에서 동사형 didaskw 는 호머 (Homer) 의 때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didaskw 의 어근 “da” 는 “가르치다” 또는 “배우다” 라는 기본적인 뜻을 가진다. 따라서 명사형 didache는 “가르침” 또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교육”의 뜻을 가진다. 이 용어는 실제적 혹은 이론적 지식의 가르침의 의미로 사용 되었지만 종교적 가르침과 연관되어 사용된 분명한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Gerhard Kittle, 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65), s.v. "didache," by Karl H. Rengstorf.

동사형 didaskw는 음악 연주를 지휘한다거나 어떤 기능적인 일을 지도함을 포함하여 가르침이나 교육을 시킨다는 관점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Karl Rengstorf 는 언급하기를 “이와같은 범주 안에서 didaskw 는 ‘연주하다’ 혹은 ‘실행하다’ 의 의미로 사용하기에 이
르렀다” 고 했다. Rengstorf, "didaskw."
Rengstorf 에 의하면, didaskw 는 가르침이라는 기본적 의미외에도 논증, 증명, 혹은 발표의 뜻을 가지고 사용되기도 했다.


Euangelion의 세속적 의미

신약성서 안에서 euangelion 의 성서적 용법은 헬레니즘적 헬라(Hellenistic Greek) 언어 세계의 전통적 용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전쟁터로부터의 승리의 소식을 가져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적군으로부터의 승리했다는 소식은 자국인들에게 일종의 구원의 소식이었기 때문에 euangelion 은 종종 구원 (swteria) 이란 단어와 더불어 사용되었다. 따라서 신약성서 저자들이 swteria 를 복음의 목적어로 취하여 자연스럽게 “구원의 기쁜소식(Good news of salvation)” 이라 표현하게 되었다.
필로 (Philo) 나 요세푸스 (Josephus) 와 같은 희랍의 작가들의 문헌에 보면 동사형 euangelizw 를 “좋은 소식을 전하다” 의 뜻으로 사용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필로는 또한 euangelion을 황제숭배를 위한 신성한 용어로 사용했으며 요세프스의 경우는 정치적 관점에서의 승리의 소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희랍의 작가들은 euangelion 의 의미를 좋은 소식 그 자체로만 제한하지 않았음을 호머 (Homer) 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Kerugma 의 세속적 의미

호머와 같은 희랍의 작가에 의하면 동사형 kerussw 는 “크게 외치다,” “호소하다,” 또는 “요청하다” 의 뜻을 가진다. Gerhard Kittel, 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65), s.v. "kerussw," by Gerhard Friedrich.
Kerussw 는 운동경기에서 승리자의 영예를 전할 때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의미하거나 대회나 축제등을 알릴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와같은 중대한 소식을 전하는 자는 포고자의 뜻을 가진 kerux 이다. Kerux는 고대 문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단어로서 고대 희랍 시대에 왕이나 여왕은 전용 kerux를 가지고 있었는데 kerux 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종교적 메세지를 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Kerux 의 가장 중대한 임무는 자신을 포고자로 보낸 권위자의 입장에서 받은바 메세지를 명령 받은곳에 가서 정확하게 선포하는 일이었다. 왕궁에서 kerux 는 왕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침을 크고 명확한 목소리로 선포했다. 때때로 kerux 는 특정한 모임을 알리거나 전쟁에 나갈 무사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그와같은 공식 선언을 선포하는 내용은 전적으로 왕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었다. Kerux 는 어떤 공식 선언에 있어서도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책무는 부여받은 메세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의 권위는 다만 그의 주인의 권위를 대리하는 것이었으며 절대로 자신의 소신이나 자신의 견해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 리

세속적으로 didache 는 어떤 지식전달에 있어 가르침이나 교육을 뜻했다. Euangelion 과 kerugma 는 부름받은 전령자에 의한 메세지를 전함의 의미를 가진다. 동사형 euangelizw 가 전쟁이나 정치적 행사에 있어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을 뜻한다면 kerussw 는 그것이 좋은 소식이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포고자가 부여받은 메세지를 공적으로 선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euangelion 이 기쁜소식을 전함이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에 대한 상급을 의미하는 반면 kerugma는 메세지의 공중적 선포라고 할 수 있다.


Didache, Euangelion, Kerugma 의 비교를 통한
Kerugma 의 신약성경적 의미와 용법

Didache 의 신약성경적 용법

헬라 사회에서 didache는 세속적으로 가르침과 연관된 다양한 뜻을 가지고 사용되었지만 신약성경의 저자들, 특히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또는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가르침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사용하였다. 동사형 didaskw 는 역시 가르침의 행동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didaskw 는 특히 예수의 제자들, 사도들, 그리고 바울의 가르침 활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Horst Balz and Gerhard Schneider, eds.,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8-80), s.v. "didaskw," by H. F. Weiss.


Didache

명사형 didache 는 신약성경 안에서 30회 발견된다. Horst Balz and Gerhard Schneider, eds.,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8-80), s.v. "didache," by H. F. Weiss.
공관복음서에서 didache는 예수의 가르침을 포함해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의 가르침 등을 묘사할때 쓰여졌다. 신약성경 안에서 특히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들은 didache 를 전문적으로 예수와 그의 말씀 즉 구원의 복음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didache 가 단순히 예수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형태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13:12은 didache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형태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3:7에 보면 바보에서 바울은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말했다. 바울이 자기의 복음 증거를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에게 기적을 행하여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을때 12절에 의하면 서기오 바울이 주님의 가르침(didache)을 믿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didache 는 단순한 가르침이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복음 증거 (didache) 로 인해서 서기오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서 6:17 에서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didache 의 형태로 전달된 메시지에 순종함으로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 받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가르침의 형태”란 그들이 그 가르침으로부터 구원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였다. Didache 의 형태로 주어진 그 메시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기 전에 바울은 그들이 죄로 말미암은 죽음 가운데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목회 서신서에 보면 didache 는 교훈의 의미를 가지고 “미쁜 말씀의 가르침” (trustworthy message) 또는 “가르침” (instruction) 이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딛 1:9; 딤후 4:2).


Didaskw

동사형 didaskw 는 신약성경에서 97회 등장한다. Weiss, "didaskw." Rengstorf에 의하면 didaskw는 대부분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반부에 등장하고 있다. 바울 서신서에서 didaskw는 가르침의 의미를 가지고 단 10회 만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didaskw는 대체적으로 예수를 최초로 추종했던 사람들과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에 의해 빈번히 사용되었으며 이방 지역의 교회들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Didaskw 의 일차적 의미는 “가르치다” 이지만 신약 성경은 didaskw 가 “설교하다” 의 의미로 쓰여진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복음 20:1 에서 didaskw 는 말씀 선포의 행위에 연관하여 “복음을 전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euangelizw"의 동의어로 쓰여졌음을 보여 준다. 또한 행 15:35을 보라. 눅20: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didache) 복음을 전하실(euangelizw)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 . ."
사도행전 5:42에서 didaskw(가르치다)와 euangelizw(설교하다)는 공히 예수를 증거함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갈릴리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설교하실때 didaskw 는 kerussw (선포하다) 와 함께 사용 되었음을 보여준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didache) 천국 복음을 전파(kerussw)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또한 마 9:35; 11:1; 행 28:31; 롬 2:21 을 보라.
그러나 병행구인 마가복음 1:39 에 보면 마가는 예수의 사역을 설교 (kerussw) 로 특징 지우고 있음을 본다. 가르침과 설교는 그 본질상 동일시 될수는 없지만 이와같은 상황은 설교는 보다 폭넓은 의미에서 가르침 (didache) 을 포함 한다고 할 수 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4 장에서 예수의 사역을 didache 를 사용하여 가르침으로 특징지우고 있다. 눅 4:44 를 보라.
누가는 또한 43-44 절에서 didaskw 와 뚜렷한 구별없이 kerussw 를 사용하고 있다. 요한 역시 그의 복음서 6:59; 7:14, 28, 35; 8:20; 9:34 등에서 예수의 복음증거 활동을 묘사할 때 didache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28:31 은 didaskw 가 설교와 연관되어 사용된 또다른 예를 보여준다. Didaskw가 euangelizw나 kerussw와 더불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것은 didaskw 의 의미가 설교적 의미를 포함한 가르침의 뜻으로 사용 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Euangelion 의 신약성경적 용법

Euangelion 의 고전 헬라적 뜻은 “기쁜 소식을 가져옴” 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 대한 상급”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euangelion 을 좋은 소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신약성경 안에서 명사형 euangelion 은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또는 기쁨의 소식 등으로 적용 되었다. 바울에게 있어 euangelion 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복음을 의미했다.
Euangelion과 kerugma는 공히 사도적 복음 선포를 의미하는데 사용 되었지만 euangelion 은 kerugma 에 비해 보다 포괄적 용법으로 쓰여졌다. 먼저, kerugma 가 공중 앞에서의 복음의 선포를 의미하는 반면 euangelion 은 설교 사건이 공적인 선포의 상황은 물론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8 장에서 euangelion 은 5 회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 네번의 경우는 대중 앞에서의 설교를 묘사하고 있으나 행 8:4, 12, 25, 35, 그리고 40을 보라.
35 절은 euangelion 이 사용된 복음설교 사건이 개인적 증거의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빌립이 가사로 내려가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한 사건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euangelizw).”

둘째, kerugma 가 사람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선포하는 반면 euangelion 은 그 용법을 그리스도적 삶을 위한 가르침까지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으로서 복음은 회심 이후 이어지는 훈련과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


Euangelion

Euangelion 은 신약성경에 76 회 등장하는데 대부분 바울 서신문에서 발견된다. 76회 가운데 52회가 바울 서신문에 나타난다. 복음서에는 단 12회가 쓰여졌는데 마태복음에 4회 마가복음에 8회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요한의 책들 가운데는 계시록에 1회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그리고 유다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세속적 용법과는 달리 신약성경 안에서 euangelion은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쁜 소식을 가리키고 있다. 신약성경 저자들에게 euangelion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신적 선포를 의미했다. O. A. Piper 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신약성경 저자들이 이해하였던 복음은 전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계
획의 마지막 단계의 실현을 위한 신적인 선포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또한 사람들이 소망하며 기다려 온 것이 현실적으로 도래 하였다. 이것은 신적
인 계획적 사건으로서 구약 성경의 계시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George A. Buttrick, ed.,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Nashville: Abingdon, 1962), s.v. "Gospel," by O. A. Piper.


신약성경적 euangelion 용법은 헬라어 구약성경과 헬레니스틱 헬라 용법에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70 인역 에서 euangelion 은 “좋은소식” 또는 “좋은소식에 대한 성급” 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Euangelion은 70인역에서 단 6회만 사용되었다.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사용 되었는데, 첫째는 좋은소식 (삼하 18:20, 25, 27; 왕하 7:9); 둘째는 좋은소식에 대한 상급 (삼하 4:10; 18:22).
70인역 에서와 같이 헬라 세계 에서도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사용 되었다. 헬라 세계에서 euangleion 은 전쟁으로부터의 “승리의 좋은 소식” 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반면 신약성경 저자들은 이를 보다 전문적으로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소식” 을 가리켰다.

구원의 기쁜소식

마가복음 1:1-4에 의하면 복음은 구약 예언의 성취와 침례요한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누가복음 3:18에 의하면 침례 요한의 설교는 좋은 소식 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사람들 앞에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기 때문 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전파 되었는데 눅 2:10-11을 보라.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의 인류를 위한 구원을 가져오실 자이기 때문이었다. 구약에 이미 약속 되었던 복음은 예수의 오심과 함께 사람들 앞에 도래하였던 것이다. 롬 1:1-5과 행 13:32-33을 보라.

신약성경은 교회 (기독교인) 의 선포 내용이 복음인것을 입증하고 있다. 마 4:23; 9:35; 24:14; 26:13; 막 1:14; 13:10; 14:9; 16:15; 행 8:4; 살전 2:9을 보라.
마가복음 16:15에 보면 주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euangleion) 전파하라 (kerussw).” 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절은 복음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됨을 밝히고 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에게 있어 예수의 구원 사건의 핵심--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그들의 설교에 있어 가장 핵심을 이루는 주제였다. Walter A.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96), s.v. "Gospel," by J. Knox Chamblin.



바울의 용법

신약성경 안에서 euangelion은 대부분 바울 서신서에 나타난다. 본 연구의 세가지 주요 단어 중 바울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 euangelion이다. 바울 서신서에서 euangelion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을 지칭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의 선포 행위를 또한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14에서 그와같은 양면의 의미로 euangelion을 사용하고 있다. euangelion은 바울이 그가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 말했듯이 선포의 내용을 말할 뿐 아니라 선포의 행위를 또한 동시에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은 고후 8:18에서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euangelion은 복음 선포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빌 4:15에서 그가 복음증거 사역을 시작했던 시기에 대하여 말할 때 euangelion 을 복음의 내용을 가리키기 보다는 복음전파 행위를 가리키며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같은 장 3절에서 그의 설교사역을 도왔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같은 용법으로 말하고 있다.



구원의 메세지. 메세지의 실체요 내용을 가리키는 euangelion은 바울 서신서 안에서 일반적으로 euangelizw 혹은 kerussw와 같은 동사들과 더불어 사용되고 있다. 고전 15:1-2; 고후 11:7; 갈 1:11; 살전 2:9 를 보라.
동사 kerussw가 euangelion을 목적어로 취하듯이 euangelizw 또한 명사형 euangelion을 목적어로 빈번히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전 15:1은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euangelizw) 그 내용을 가리키는 목적어가 복음(euangelion)인것을 보여주고 있다. 갈 1:11에서 바울은 그에 의해서 복음이(euangelion) 전파되었음(euangelizw)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고후 11:7에서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euangelion)을 전파하였다(euangelizw)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euangleion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세지로서 설교의 행위의 목적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설교에서 복음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핵심적으로 가리킨다. 한 예로 디모데후서 2:8-10은 예수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음을 지적하는데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그의 복음이라고 했다. 계속하여 그는 말하기를 그가 복음을 전함은 그로 말미암아 각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딤후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고린도전서 15:1-4은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하심으로 요약됨을 확증시켜 주고 있다. 나아가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구원 받았던 바로 그 메세지였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또한 롬 1:1-4에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성경안에 그의 아들에 관하여 약속하신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지상 사역에 관하여는 대체로 침묵한다. 바울에게 있어 그의 메세지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십자가를 그 중심으로하고 예수의 고난,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고전 1:17-2:5; 롬 3:21-26; 고후 5:14-21을 보라.
바울에게 있어 euangelion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가 선포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세지였다. 고전 9:14-23; 15:1-4; 엡 1:13; 3:6; 골 1:23; 딤후 1:10; 벧전 4:6을 보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가르침. Euangelion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세지를 전파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바울 서신문에 의하면 euangelion은 성도들을 양육하거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한다.
빌립보서 1:27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은 euangelion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을 지적하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본절에서 “행하라”로 번역된 politeuesthe(명령형)를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함을 명령하고 있다. politeuesthe(2인칭, 복수, 현재명령 중간태)의 본동사는 politeuw 인데 “시민이 되다,” “시민답게 행하다,” 또는 “자신을 이롭게 하다 혹은 법을 준수하다” 의 뜻을 가진다. Joseph H. Thayer, ed.,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rev. and enl. (Grand Rapids: Baker, 1977), 528.
본절의 상황에서 주 동사인 politeuw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행하여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원리에 입각하여 살아야 함을 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으로서 복음의 가르침을 마땅히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안에서 하나의 공도체로서 성도들은 세워져 나가야함을 논증하고 있다. 고전 15:1에서 고전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고 하면서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세워졌다고 밝힌다. 동사 “estekate” estekate는 histemi의 2인칭, 복수, 능동태 완료형으로서 “서다” 또는 “세우다”의 뜻을 가진다.
는 관계절들과 함께하는 parelabete와 swzesthe 등 두개의 다른 동사와 연결되어 있다. 첫째동사 parelabete는 paralambanw의 2인칭, 복수, 2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으로서 paralambanw는 “취하다 (to take to)” 또는 “전승된 것을 계승하다” 의 뜻을 가진다. 둘째동사 swzesthe 는 swzw의 2인칭, 복수, 직설법 현재로서 swzw 는 “구원하다” 또는 “구출하다” 의 뜻이다.
바울은 본절의 문맥속에서 그들에게 자신이 전파한 복음은 그들이 받은 것(parelabete)이며 그들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세움 받은 것(estekate)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사 estekate는 완료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안에서 세워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R. C. H. Lenski에 의하면 완료형 estekate는 “서다”라는 뜻으로 현재의 의미를 내포하는데, “서다” 라는것은 세워진다는 것이며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가 튼튼하게 서는 것처럼 믿음 안에서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Paul's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 Corinthians (Columbus, Ohio: Wartburg Press, 1937), 626.
이와같은 euangelion의 용법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실제적 가르침으로서 복음의 실천을 가리킨다. 고후 9:13; 빌 1:5; 살전 2:7-12를 보라.



Euangelizw

Euangelizw는 euangelion의 동사형으로 신약성경에서 빈번히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선포하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행 5:42; 8:12; 11:20; 14:15; 17:18; 고전 1:17; 갈 1:16을 보라.
Euangelizw나 부정사 euangelizesthai의 일차적 의미는 “기쁨의 소식을 전하다,” “복음을 전파하다,” 또는 “복음을 설교하다”이다. Friedrich, "euangelizw."
Euangelizw는 신약성경에서 54회 발견되며 Euangelizw는 마태복음에 1회 (11:5), 누가복음에 10회, 사도행전에 15회, 바울서신서에 21회, 히브리서에 2회, 베드로전서에 3회, 그리고 계시록에 2회 등장한다.
일차적으로 “기쁨의 소식을 전하다” 또는 “복음을 설교하다” 로 번역 되었다. 전문적으로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와 죽음 그리고 사탄으로부터의 승리에 관한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euangelizw의 주어는 매우 다양하다. 예수님 자신을 포함하여 누가복음의 천사, 침례요한, 예수의 제자들 모두 기쁨의 소식을 전했다. 목적어 또한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큰 기쁨의 소식, 왕국, 믿음, 평화, 그리고 약속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두드러진 현상은 euangelizw의 전문적이며 구원론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소식을 선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본 단어의 목적어가 된다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론적-구원론적 관점에서 euangelizw의 목적어는 “예수”(행8:35), “그리스도 예수”(행 5:42; 엡 3:8), 그리고 “주 예수”(행 11:20) 등이다.



Euangelizw의 kerussw와의 동의어적 용법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선포적 행위로서 euangelizw는 특히 공관복음서 안에서 kerussw와 빈번히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euangelizw는 그리스도적 설교의 행위를 의미할때 많은 경우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kerussw와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공관복음서. 누가나 마가와 같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을 포함하여 침례요한과 예수의 제자들의 설교 사역을 나타낼 때 kerussw만 사용하지 않고 euangelizw 역시 사용하고 있다. 누가복음 4:43에서 누가는 주님께서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euangelizw) 하리니” 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euangleizw를 사용하였는데 병행구인 마가복음 1:38 에서 마가는 주께서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kerussw)” 라고 하신 말씀을 기록하면서 kerussw를 사용하고 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9:1-6 에서 역시 두 단어를 상호교환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여기에서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전하도록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2절에 의하면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복음을 전하러 세상에 보내는 상황에서 kerussw를 사용한 반면 6절 에서는 euangelizw를 사용하여 제자들의 복음증거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 사도행전 8장에서 누가는 빌립의 설교 사역에 관해 기록할때 kerussw와 euangelizw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였다. 35절에서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한 것을 누가는 euangelizw를 사용하여 묘사한 반면 5절 빌립의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말씀 선포는 kerussw를 사용하였다. 누가는 12절 과 40절 빌립의 설교를 역시 euangelion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설교를 보면(행 17),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바울과 쟁론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울이 예수와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설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며 물론 예수에 관하여 믿지도 않았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와 그의 구속사역을 중점적으로 선포하였는데 이때 누가는 이와같은 바울의 설교를 묘사하며 kerussw보다는 euangelizw를 사용 하였다. 행 11:20; 13:32; 14:7, 15, 21; 그리고 16:10을 보라.



서신서. 로마서 10:14-15에서 바울은 설교 행위를 지칭하면서 두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
(kerussw) 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 (euangelizw) 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설교(kerussw)의 행위는 기쁨의 좋은소식(euangelizw)을 전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복음을 설교함

명사형 euangelion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메시지 양면을 내포하고 있듯이 동사형 euangelizw 역시도 설교에 대한 행위를 보다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설교의 행위로서 euangelizw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에 관한 것 뿐만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안에서의 믿음의 삶에 관한 설교를 포함하기도 한다.


복음적 메세지의 설교.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등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에 관한 설교는 많은 경우 euangelizw로 묘사되었다. 행 5:42; 8:12; 8:35; 11:20; 17:18; 롬 15:20; 고전 1:17; 갈 1:16; 그리고 엡 3:8을 보라.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서 많은 성도들이 흩어져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을때 누가는 이들의 복음적 설교를 euangelizw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왕국과 예수에 관하여 사마리아인들에게 설교하였을때 (euangelizw)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았다. 행 8:12를 보라.
사도행전 11:20에 의하면 흩어진 성도의 무리들이 안디옥에 가서 주 예수를 전하였는데 그 다음절은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께로 왔다고 밝히고 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의해 복음의 선교사로 이방 세계에 파송되었다. 그들은 가는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세지를 전파하였다. 이때 그들의 선포 행위를 euangelizw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행 14:7, 15, 21; 15:35; 16:10; 17:18 등을 보라.



비공식적 상황에서의 설교.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의 설교는 그리스도인 설교의 두 가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부름받은 포고자의 공적 선포(kerussw)이며 둘째는 비공식적 개인 증거(euangelizw)이다. 5절은 공식적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고자로서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선포(kerussw)하였음을 밝힌다. 빌립은 선교사로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한 복음 전도사(euangelistes)였다. 행 21:8을 보라. Euangelistes는 엡 4:11 (전도사의 위치는 사도, 예언자, 목사, 그리고 교사 등과 함께 나열되었다) 과 디모데후서 4:5 (바울은 디모데를 전도사로 불렀다)에 언급되었다. 바울에 의하면 euangelistes의 사역은 설교와 말씀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딤후 4:2).
빌립의 설교 사역이 여기에서 kerussw로 묘사된 것은 그의 설교가 공적인 선포였기 때문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26-40에서 보여주는 빌립의 이디오피아 내시에 대한 설교는 kerussw 대신 euangelizw로 표현되고 있음을 본다. 빌립은 예수와 그의 구원 복음을 전하였으며(35), 내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았다 (36-39). 빌립은 개인적 증거 상황에서 구원의 메세지를 설교하였고 그의 설교는 euangelizw로 기록되었다.


그리스도 신앙을 나눔.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으로인해 흩어지게 되었을때 성도들은 그들의 행로 중에 복음을 전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8:4은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euangelizw)”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평범한 성도들로서 5절에서 볼 수 있는 설교자로 부름받은 빌립의 경우와는 차이점을 가진다. 그들은 비록 공적으로 부름받은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가는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주님의 말씀을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 Lenski는 이에 관해 언급 하면서 “이 사람들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을 설교자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만나는 사람들에게 왜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복음과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the Acts of the Apostles (Minneapolis: Augsburg, 1961), 314.
고 말했다.
본 논고가 지금까지 밝혀왔듯이 예수의 구원 복음에 관한 선포로서 euangelion은 kerugma와 더불어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kerugma (kerussw)와 euangelion (euangelizw)의 신약성경적 용법을 살펴볼 때 모든 경우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euangelion은 kerugma와 달리 복음을 전함에 있어 보다 포괄적 범위를 가지고 사용됨으로 차이점을 보인다. kerugma의 메세지가 예수의 복음적 메세지에 중심되어 있는 반면에 euangelion은 구원 복음을 포함할 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메세지를 선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kerugma가 포고자에 의한 공중 선포라고 한다면 euangelion은 그뿐만 아니라 비공적 상황에서 평범한 성도들에 의한 복음 증거에 사용 되기도한다.


Kerugma의 신약성경적 용법

신약성경안에 kerugma는 바울 서신서에 6회 복음서에 2회 등 모두 8회 등장하고 있다. 바울 서신서에 6회--롬 16:25; 고전 1:21; 2:4; 15:14; 딤후 4:17; 딛 1:3. 복음서에 2회--마 12:41과 눅 11:32.
Kerugma는 성경적 설교로 간주되지만 그 용어의 개념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 Kerugma는 70인 역 구약성경 안에 역대하 30:5, 에스드라 전서, 그리고 잠언 3:2 등 3회에 걸쳐 발견된다.
구약 선지자들의 메세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실한 하나님 신앙을 가지도록 권면하는 것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어진 율법을 보다 엄격하게 지켜 나가도록 강권하는 것이었으며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지자들의 선포 가운데 전형적 선지자적 선포와는 다르며 보다 그리스도적 선포에 가까운 두 경우를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요나의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회개의 선포이다 (욘 3:2). 요나는 신약적 관점에서 볼때 매우 복음 전도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였다. 둘째, 이사야 61:1-2에서 이사야는 종말론적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눅 4:18-21).
그러나 신약성경의 kerugma적 메세지는 구약의 선지자적 메세지와 뚜렷한 본질적 차이를 보인다. 신약성경의 kerugma는 회개의 촉구와 예수께서 이루신 일,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하신 구원에 대한 선포이다.


Kerugma의 정의

헬라 세계에서의 kerugma용법은 kerux와 kerussw 두개의 단어와 더불어 이해되어져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Balz와 Schneider는 밝히기를 “본 단어들은 헬라-헬레니즘적 사상안에서 같은 개념적 어근을 가지고 있다” Horst Balz and Gerhard Schneider, eds.,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1), s.v. "kerussw, kerugma, and kerux," by O. Merk.
라고 했다. Kerussw는 동사형으로서 “공중 앞에서 선포하다”의 뜻을 가진다. 명사형 kerugma는 선포의 내용을 표현한다. Kerugma는 설교자가 설교한 것, 즉 그의 메세지를 가리킨다. 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3rd e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63), 9.
Kerux는 포고자로서 자신을 파송한 권위자의 메세지를 가지고 간다.
신약성경에서 kerugma는 하나의 전문적(기술적)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크리스챤 메세지를 나타낸다. Augustine Stock은 말하기를 “선포를 의미하는 헬라어 kerugma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전문적 용어가 되었다.” Augustine Stock, Kingdom of Heaven: The Good Tidings of the Gospel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4), 17.
고 말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kerugma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의 선포라고 정의할 수 있다. Robert H. Mounce, The Essential Nature of New Testament Preaching
(Grand Rapids: Eerdmans, 1960), 84.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때부터 행하여 온 것이였다. 그들은 선지자적 메세지를 선포하거나 혹은 단순히 율법(토라)을 낭독하였다. 침례 요한은 메시야의 도래하실 것을 선포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 하셨다. 선포의 형태는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적 선포는 과거의 선포 형태와는 전적으로 다른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오랫동안 예언되어 온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관한 약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완성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거룩한 신적 개입이 역사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kerugma는 두가지 면을 포함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의 육체적 현현(顯現)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인생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인간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임을 입증하는 신학적 해석이다. 이와같이 역사 가운데 새롭게 도래한 현상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kerugma이다.


Kerugma 의 본질

Kerugma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핵심으로 하는 선포로서 설교의 그리스도 중심적 본질을 나타낸다. Kerugma는 신약성경적 설교의 형태와 내용을 특징짓는 가장 적절한 용어이다. 이것은 하나의 전문적(기술적) 용어로서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세지임을 지적한다.
믿는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것은 설교 그 자체가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이며 선포되는 메세지가 kerugma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 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은 구원하는 것은 kerugma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kerugma를 “선포된 메세지”로 묘사하고 있다. 선포된 메세지로서 kerugma는 고린도전서 15:3-4에 명백하게 제시되었는데 본절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포된 메세지로서 kerugma는 세 가지의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첫째, kerugma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마지막 단계로서 인간을 위해 주어지는 신적 선포라고 하는 것이다. 구약의 메시야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으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에게 선포된다. 신약교회의 설교 핵심은 더이상 사람들이 기다 온 약속이나 또한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왕국 그 자체가 아니었다. 신약교회가 선포한 것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으며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였다.
둘째, kerugma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세지를 불신의 세계에 선포함을 명시한다. 대부분의 경우 신약성경의 kerugma는 불신의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메세지임을 나타내고 있다. Gordon Clinard는 밝히기를: “불신자를 대상으로한 복음적 선포에 있어 신약성경의 50퍼센트 이상의 경우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행하여진 것이 아님은 명백한 사실이다”고 말했다. Gordon Clinard, "Proclamation: The Biblical Context,"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 (April 1962): 18.

셋째, kerugma는 부름받은 사람 곧 그리스도인 포고자에 의해 전달되었다. 말씀의 포고자 kerux, 즉 전령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다. Gerhard Friedrich가 언급하였듯이, kerugma란 용어는 왕의 선택받은 전령자가 왕으로부터 받은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을 묘사해 주고 있다. Friedrich, "Kerux."
이와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인 전령자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전달하는 것이다.


Kerugma의 용법

Kerugma는 신약성경안에 여덟차례 등장하고 있으며 그 중 두번은 복음서에 나타난다. 이 두번의 경우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서 요나의 니느웨 백성을 향한 회개와 하나님 신앙을 촉구하는 공중적 선포를 묘사해 주고 있다. 욘 3:4를 보라.
요나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메세지는 구원을 위한 말씀선포였다. 요나의 메세지를 들었을때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하였으며 하나님을 믿었다. 욘 3:5-8을 보라.

요나의 선포에는 물론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요나의 선포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니느웨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회개의 촉구에 있었다. 그러나 마태복음 12:40에 근거하면 거기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연관성이 암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요나의 시련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고 있다.
마태복음 12:41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날에 니느웨 백성들은 이미 선포되고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 앞에 회개하지 않는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했다.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의 표적이 되었듯이 요나보다 큰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악한 세대에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표적이다 마 12:39과 눅 11:30을 보라.
그러므로 예수의 kerugma 사용은 두가지의 중대한 사안을 내포하고 있는데, 첫째, 예수께서는 요나의 설교를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 요나의 선포는 회개를 촉구 하였고 회개의 선물로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용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의 kerugma는 부활 이후의 kerugma와 상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예표로서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

바울 서신서안에 kerugma는 6회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kerugma는 kerussw의 명사형으로 단순히 “선포” 또는 “선포의 내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용어를 단순한 선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 서신서 안에 kerugma는 부활 이후 (Post-Resurrection)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여섯 차례의 kerugma 사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설교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에 중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kerugma 사용에 있어 하나의 예는 로마서 16:25에 나타나는데, 기록하기를 “나의 복음(euangelion)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proclamation)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나신바 되었다” 고 하였다. 바울은 여기에서 한 문장안에 kerugma와 euangelion을 동시에 연결시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영적으로 강화 시키며 확신시키는 믿음과 실천을 지적하기 위해 euangelion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kerugma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에 관한 선포를 나타내고 있다. 본절안에 바울은 두 용어를 함께 사용하면서 kerugma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euangelion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믿음으로 세우며 영적으로 강화시키는 점에 역점을 두어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kerugma 사용의 또다른 예는 고린도전서 1:21에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kerugma)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바울은 여기에서 선포된 것을 kerugma로 표현하며 또한 하나님은 kerugma를 통해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심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선포된 메세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메세지임이 틀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에서 역시 kerugma를 사용하면서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kerugma)를 전할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라고 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는 어떤 사람의 말이나 지혜로움 또는 철학과 같지아니하며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Lenski,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 Corinthians, 92.
바울은 그의 설교에 어떤 사람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음을 명백히 하였는데, 그것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 롬 1:16.
이라고 말했다. 바울에게 있어 사람의 지혜는 그의 설교에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의 말 “내가 너희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에 잘 나타나 있다.


Kerussw의 용법

Kerugma의 본질은 동사형 kerussw의 용법을 살펴봄으로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명사형 kerugma는 본 동사인 kerussw에 속한다. Kerussw의 어근적인 의미는 포고자 또는전령자가 “공포하다” 또는 “선포하다” 이다. 헬라의 문헌에 의하면 kerussw는 kerux 만큼 빈번하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신약성경 안에서 설교의 행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 Kerussw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 메세지에 관한 전령자적 선포를 의미한다.
Kerussw는 신약성경에서 바울 서신문에서 발견되는 포고자 19회를 포함하여 61회 등장한다. Kerussw는 공관 복음서에 32회 (마태복음 (9), 마가복음 (14), 누가복음 (9)), 사도행전에 8회, 베드로전서에 1회, 요한계시록에 1회, 그리고 바울 서신서에 19회 등장한다.
동사 euangelizw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나누는데 사용된 반면 kerussw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선포로서 포고자가 어떤 이루어진 일에 대한 것을 공적으로 “선포하다” 또는 “설교하다”의 뜻을 가진다.


공관복음서

공관복음서에서 kerussw는 일반적으로 “설교하다,” “선포하다” 또는 “선언하다” 등으로 번역되었다. Craddock, "Preaching."
Kerussw는 공관복음서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병행구로 나타난다) 공중적 선포의 행위를 나타내고 있으며 침례요한, 예수, 예수의 제자들의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선포에 연관되어 있다. 마 4:23; 9:35; 24:14; 막 1:14; 눅 4:43; 8:1; 16:16.

침례요한은 하나님의 전령자로서 막 1:2과 요 1:6을 보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외치는자의 소리였다. 그의 설교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회개의 촉구였다. 따라서 요한의 회개 메세지는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Mounce, Essential Nature, 22.
요한의 메세지는 그 자체로 끝난것이 아니라 하나의 준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의 뒤를 이어 예수의 하나님의 왕국 메세지가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설교할 것을 명하여 내어 보내셨다. 제자들은 예수나 침례요한의 메세지와 동일한 메세지를 선포하였는데 그것은 곧 회개와 하나님의 왕국이었다.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는 열두 제자를 안수하시고 설교(kerussw)하러 내어 보내셨다. 그들은 나가서 (막 6:12) 회개의 설교를 하였다 (kerussw). 제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왕국을 설교(kerussw)하도록 명을 받았다 (마 10:7).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온 갈릴리 지방에 다니며 가르치시고 설교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 하였다 (4:23). 그러나 마태의 기록과 같은 병행구에서 마가는 “가르침”을 생략하고 있으며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설교로 특징짓고 있다. 막 1:39과 눅 4:44을 보라.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kerussw를 사용하여 예수의 대중적 선포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선포를 kerussw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마 3:1; 4:17, 23; 9:35; 10:27; 24:14; 막 1:14, 38, 39, 45; 13:10; 14:9; 16:15, 20; 눅 4:9; 8:1; 9:2; 12:3; 24:47).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첫 사역 설교를 기록할 때(마 4:17; 눅 4:18) 마태가 kerussw를 사용한 반면 누가는 euangelizw를 사용하였다. kerussw는 일반적으로 “설교하다” 로 번역이 되는 반면 euangelizw는 대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다”로 번역 되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예수의 대중적 선포 메세지는 복음 이었으며 복음은 하나님께 나오는 길임을 밝혀준다.
예수는 공중적 선포 행위를 가르칠때 kerussw를 사용하였다. 마태복음 10:7에서 그의 제자들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가라고 명령하면서 예수께서는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라”고 말씀하였다. 예수의 kerussw 용법은 제자들의 설교가 고전적 포고자의 메세지 선포 개념과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고 나가 부여받은 메세지를 공중앞에서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막 1:39과 눅 4:44을 보라.

부활 이후 마가와 누가는 온 세상에 나가 구원의 메세지를 선포하라고 하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6:15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선포가 kerussw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kerussw)”고 하셨다. 다음절로 이어지는 내용에 의하면 주님께서 명한 선포는 믿는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선교사적 설교였다.
부활 이후 또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만나셨다 (눅 24:44-48). 주님께서는 먼저 당신이 이루신 일들을 제자들에게 설명하면서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셨다. 나아가 주님은 회개와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설교(kerussw)하라 명하셨다. 부활 전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유대 지방에 가서 설교하라 (kerussw)고 명하셨다. 마 10:7; 막 3:14; 6:12을 보라.
그러나 부활 이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한 회개에 대하여 선포할 것을 명하셨다.


사도행전

사도행전에서 kerussw는 일반적으로 “설교하다,” “선포하다,” 또는 “선언하다” 등으로 번역 되었다. Craddock, "Preaching."
누가복음 24:44-47에 나타나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라는 명령은 사도행전 10:42에 베드로에 의해 다시 입증되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kerussw)”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없다면 사도들에 의한 선포의 사건은 일어날 수 없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부활 이전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유대지방으로 보내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나라로 나아갈 것을 명하셨다.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이와같은 임무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게 핌박이 닥쳐옴으로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도들이 온 지역으로 흩어져 나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에 의해 선포되었다 (kerussw). 행 8:5; 20:25; 28:31 을 보라.
이와같은 말씀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구원 계획은 계속하여전개될 수 있었다. Friedrich, "Kerussw."
그러므로 신약성경 설교는 kerussw라고 하는 용어에 의해 특징 되어지며 kerussw에 의해 설명되는 설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계속적인 증거에 핵심을 두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 보여주는 침례 요한, 예수님,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집중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관찰되는 초대교회와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주제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바울 서신서

바울 서신서에 kerussw는 19회 등장한다. 롬 2:21; 10:8, 14, 15; 고전 1:23; 9:27; 15:11, 12; 고후 1:19; 4:5; 11:4 (2); 갈 2:2; 5:11; 빌 1:15; 골 1:23; 살전 2:9; 딤전 3:16; 딤후 4:2 등을 보라.
바울에게 있어 설교(kerussw)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울은 설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중심사상을 확고하게 보여준다. 고린도후서 4:5에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kerussw)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 .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했다. 바울은 그 자신이나 그의 윤리적 자질 또는 그의 경험들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한다고 선언한다. 바울의 그리스도적 설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설교”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설교” 라는 말로 구체화 될 수 있다. 고전 1:23; 15:1-11; 롬 10:8-9를 보라.

바울에게 있어 복음을 선포함이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갈라디아서 2:2 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설교하였다 (kerussw)고 했으며 고린도후서 1:19 에서는 그리스도를 설교했다(kerussw)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살전 2:9; 고전 1:23; 고후 4:5; 11:4; 빌 1:15 등을 보라
바울은 로마서 10:8-10 에서 그의 이방인에 대한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에 관한 구원의 메세지였음을 반복하여 밝히고 있다. 바울의 설교 사역에 있어 kerussw의 용법은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적 사역을 가리켰다. 그러나 한가지 예외가 로마서 2:21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혹은 구원의 메세지에 관한 선포가 아닌 유대인들의 윤리적 자질에 관한 내용의 선포를 의미하고 있다.


세 용어의 관계

Kerugma와 Euangelion의 차이점

Kerugma는 신약성경 안에서 기독교 설교의 형태와 내용을 가장 명확하게 지적하는 용어이다. Euangelion은 구원의 복음전파를 의미한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관찰된다. 신약성경에서 “포고하다 (herald)” (kerussw)와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 (euangelizw)는 기독교 설교를 지칭하는데 가장 빈번히 사용된 용어들이다.
두 단어의 동사형은 상호 동의어이다. 두 단어는 복음서와 바울 서신서에서 상호 교환적으로 나타난다. 신약교회와 사도들의 설교는 kerugma(heralding, 선포)였으며 또한 kerugma의 실질적 동의어인 euangelion(evangelizing, 복음전파하다)였다. 롬 2:16; 살전 1:5; 고전 15:1을 보라.
그러나 kerugma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중점(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영광받음)을 두는 반면 euangelion은 그 용법을 보다 포괄적으로 확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침으로 그들로 그리스도의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도록 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고전 15:1; 갈 2:14; 빌 1:15; 1:27; 골 1:5-6, 22-23; 살전 2:7-12; 3:2, 6; 살후 2:14-17; 딤전 1:3-11 등을 보라.

Kerugma가 메세지를 선포하는 형태를 강조한다면 euangelion은 메세지의 본질에 강조점을 둔다. Jesse Burton Weatherspoon, Sent Forth to Preach (New York: Harper & Brothers, 1954), 64 를 보라.
실제로 kerugma는 신약성경 안에서 euangelion을 종종 목적어로 취한다. 마 4:23을 보라.
Kerugma적 관점에서 볼때 포고자(herald)로서 전령자는 부여받은 메세지를 공중 앞에 선포하는 것이며 이때 선포되는 메세지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설교에서 euangelion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과 그리스도적 삶을 위한 지침 으로서의 메세지의 본질을 강조한다.


Kerugma와 Didache의 차이점

신약성경은 kerugma와 didache 두 용어를 의도적인 명확한 구분을 제시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didache는 신약성경 안에서 kerussw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다. Dietrich Ritschl은 말하기를 “설교와 가르침은 친근하게 뒤섞여 있다” Dietrich Ritschl, A Theology of Proclamation (Virginia: John Knox
Press, 1960), 97.
고 했다. 그런가하면 Klaas Runia는 두 용어를 동일시하며 kerugma와 didache를 각각 선교사적 설교와 회중적 설교로 분류하였다. Klaas Runia, The Sermon under Attack (Clemington, Australia: Paternos-
ter Press, 1983), 24.

예수의 복음은 didache의 형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 롬 6:17과 마 28:18-20을 보라.
요한복음 6:59 예수께서 불신의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복음서 기자는 didaskw를 사용하였다. 유사한 경우로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요한복음 8:20에 보면 didaskw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의 메세지는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기 보다는 보다 구속적 관점을 가지고 말씀 하셨다. Craig Skinner, The Teaching Ministry of the Pulpit (Grand Rapids: Baker, 1973), 84 를 보라.

이미 앞서 밝혔듯이 kerugma는 didache를 포함하여 다른 형태의 공중 연설과는 엄격히 구분되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didache가 성도들의 그리스도적 삶을 위해 주어지는 윤리적 지침과 폭넓게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kerugma는 불신의 세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에 대한 공중적 선포이다.
둘째, 설교와 가르침은 각기 다른 은사이다. 바울은 가르침의 은사를 설교의 은사 혹은 예언의 은사와 구분해서 나열하고 있다. 롬 12:6-7과 엡 4:11을 보라.
예수의 사역은 세 가지 관점으로 분류되는데, 곧 가르침, 설교, 그리고 치유이다.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께서는 공중앞에서 하셨지만 제자들을 가르칠때는 보다 사적인 상황에서 하고 있다. 마 8:31-32을 보라.

셋째, 만일 선포가 개개인이 하나님과 개별적 대면을 하게하는 목적으로 주어진다면 가르침은 선포 이후 이루어지는 신앙의 양육단계라고 할 수 있다. 설교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복음의 선포라고 한다면 가르침은 이미 믿음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신앙적 교육 또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다.
넷째, 설교와 가르침이 공히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알린다는 같은 목적을 가지지만 주어지는 메세지를 적용하는 점에서 크게 달라진다. 설교는 청중들이 주어진 메세지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배척하든지의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점에서 긴급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이미 믿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와같은 긴급성은 가지지 않는다.
두 용어는 각각의 적절한 용법을 가지고 있으며 각기 다른 강조점을 가진다.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 사역의 일차적인 역활은 교리적인 것과 그리스도적 삶을 위해 성도들을 교훈하는 것임은 명확한 사실이다. 또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형태에 있어 가르침은 설교와 뚜렷이 구분된다. 가르침의 전달 형태는 kerugma의 특성에 나타나 있는데로 복음을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그러나 가르침은 세상에 선포되는 복음의 기초위에 세워진다. 기독교회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라고 하는 선포에 근거하여 행하여 진다. Ronald E. Sleeth, "Role of Preaching: The Centrality of the Word of
God," Encounter 19 (Spring 1958): 126-27.
그래서 Mounce는 kerugma가 기초요 didache는 상부구조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완전한 건물을 완성 하는데 모두 필요한 요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Mounce, Essential Nature, 47-54.
선포된 메세지는 가르침의 형태로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설교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결 론

신약성경의 메세지는 선포된 메세지이다. Runia, Sermon under Attack, 19.
이 메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영광 받으심을 핵심으로 세 개의 중심원을 형성한다. 이 중심원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첫번째 원은 kerugma로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부르기 위해 그리스도의 세가지 구원 사건(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영광 받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중심원의 두번째 원은 euangelion으로서 이는 kerugma를 신학적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euangelion이 사람의 구원을 위한 복음의 좋은 소식으로서 kerugma의 본질적 내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제일 외곽을 차지하는 마지막 원은 didache 로서 앞선 두 단어의 내용에 대한 실천적 확대이다. didache는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관계에 대한 것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그리고 그리스도적 삶의 방식에 관점을 둔다.
Kerugma가 실질적 관점에서 euangelion과 didache 두 용어와 더불어 그 의미에서 공통점을 가지기는 하지만 신약성경 안에서 기독교 설교를 특징짓는 가장 핵심적인 용어는 kerugma이다. 신약성경 메세지는 kerugma 이다. kerugma는 불신의 세계를 향한 복음의 기쁜 소식의 공중적 선포이다. 그 선포는 포고자 (herald)에 의해 행하여 진다. 기독교 포고자는 예수의 복음 메세지를 전달하는 설교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전령자이며 그의 임무는 부여받은 메세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기독교 설교의 핵심 주제는 kerugma의 뜻 안에서 관찰된다. 예수의 설교로부터 바울과 신약교회에 이르기까지 그 발달 과정을 살펴보았듯이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더 이상 복음의 선포자가 아니다. 예수는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어져야 할 분이시다. 그분의 생애, 가르침, 죽음, 부활, 모두가 kerugma를 형성한다. 신약 교회의 설교 특징은 kerugma의 의미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이다.
설교의 목적은 새로운 가르침으로 사람의 지식을 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kerugma는 didache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교회의 메세지는 케리그마적 메세지이다. 모든 다른 형태의 가르침은 didache로 설명된다.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장으로 부름으로서 그들로 구원을 받게하기 위함이다. 바울이 말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kerugma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 고전 1:21.

오늘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kerugma의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구속적 역사는 모든 시대에 말씀 선포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인간 구속의 계획을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가 열리면서 침례요한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뒤이어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육체적 모습을 쓰시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구원에 관한 약속을 완성하셨다.
이와같은 십자가의 위대한 구속적 사건은 신약교회와 사도들의 kerugma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었다. 이것은 부활 후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명령이었다. 신약 교회와 사도들의 구속적 복음증거 사명은 역사속에 이어져 왔으며 또한 오늘 이 시대에 부름받은 설교자들을 통하여 계속 되어지고 있다. 오늘 이 위대한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 현대 설교는 구속적 사명을 다시금 새롭게 인식하며 나아가 kerugma 메세지를 선포하여야 할 것이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