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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6. 01:48 Bible Guide
posted by johnworld
2005. 9. 24. 23:47 Bible Guide

먼저 역사비평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비평은 19세기 말 루터교 목사의 아들 벨하우젠과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비평은, 본문의 표면에, 다시 말해 글자로 표출되어 있는 본문의 세계 속에서, 무엇이, 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면서 성서해석의 장을 열고 있습니다.

역사비평은 본문을 자의적으로(알레고리컬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막는 강력한 제어장치예요. 본문의 글자를 단순히 나열된 채로 읽거나(문자적 해석), 본문의 글자를 기호로 보고 그것이 상징하는 어떤 은유를 읽는 것(풍유적 해석)이 아닌, 왜, 누가, 어떻게, 언제 그런 글을 서술하게 되었는지를 심각하게 분석함으로써, 성서의 뜻을 적어도 '객관적으로'(역사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수단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초대교회 이래 종교개혁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앙 공동체가 답습해온 본문에 대한 왜곡된(인위적인) 해석을 바로잡아 보고자 노력했어요. 본문을 태어나게 만든 상황(역사, 문화, 사회, 종교) 속에 본문을 가져다놓고 읽음으로써 말씀에 대한 인위적 해석을 막아보고자 나섰던 것입니다.

혹자는 성서의 역사적 주석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인 평가라고 비판할런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이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비평할 수 있느냐'라고 따질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서의 역사적 비평 속에 인간의 이성이 차지하는 몫이 알게 모르게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렇지만 여기에는, 성서보다는 교회의 권위를 더 내세우던 숨막히던 시절에, 그래서 성서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정통 성서해석으로 강조하던 중세기의 암흑시대에(지금도 가톨릭은 그렇습니다), '성서해석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나서게 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역사적 비평의 모태에는 '교회의 권위보다는 성서가 더 우월하다'라고, 그래서 '교회가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교회를 해석해야 된다'라고 주창하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전통이 서려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서의 역사비평적 해석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역사적 비평은 본문의 과거와 현재를 서로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과거를 현재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본문이 원래 무엇을 의미했었는지를 바로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겁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과거'(본문의 역사적 맥락)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과거'(본문의 의도)를 바로 살려낼 수 있었다는 거죠. 비록 이런 노력이 '본문이 지닌 과거형의 의미'만을 끄집어내는 일에 매달린 결과를 낳고야 말았지만, 그렇지만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의 역사적 해석은 본문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바로 제시해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성서의 역사적 비평은 본문의 기원과 그 형성과정을 밝히고 난 뒤에야, 또는 그런 근거 위에서만 본문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본문이 지녔던 본래의 의미(과거의 의미)를 추적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그래서 본문의 과거의 역사를 세심하게 묘사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본문이 지난 오늘의 의미(현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에는 그만 소홀하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본문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현대적인 적용이 무엇인지를 캐내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지나치고야 말았습니다. 본문을 해석하다가 본문 이전 단계를 추측하는 일에 몰두하고 만 것입니다. 생성되기까지 거쳐왔을 언어학적, 문헌적, 전승사적 단계를 파악하는 일에만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종형태의 본문에 대한 관심 자체를 잃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본문을 구성하는 문학양식, 전승 등을 역사적으로 캐내기만 했지, 정작 그런 양식, 전승 등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본문을 문삭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에는 소홀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성서의 역사비평적 해석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어요. 근본주의와 경건주의가 내뱉는 역사비평적 방법에 대한 불신의 도전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영적, 성서주의적, 무비판적 성서해석으로 되돌아가라'는 거친 도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역사비평적 해석을 대신학 학문적 대안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대안도 없이 무작정 성서주의나 '비평 이전의 단순 독서'로 회귀할 것을 주창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해석이 없는 성서풀이는 자칫 성서를 왜곡 인용할 우려가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변화는 1968년 미국 성서학회 회장 뮬렌버그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에 대한 '문학적' 질문을 소중히 여기는 특징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사학과 일반 문학이론을 성서해석에 접목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문학비평'이라고 총칭합니다.

문학비평은, 텍스트를 더 이상 컨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바로 해석의 '대상'입니다. 역사비평은 성서를 통해 역사와 상황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보았다면, 문학비평은 성서를 통해 독자를 비추는 거울로 보는 것입니다.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독자의 실존적인 만남을 이루는 거죠. 성서가 성서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독자의 가치관,세계관과 성서의 가치관, 세계관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문학비평은 역사비평처럼 성서를 통일성 없는 쪼가리 문서들로 보지 않습니다. 일단 본문을 언어로 이루어진 하나의 통일성 있는 구조물로 봅니다. 그렇다고 근본주의적 성서관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성서를 역사적으로 파고들지 않고,(텍스트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캐지 않고) '완성된 본문'(텍스트의 마지막 형태)을 놓고 본문 형태와 스타일, 근원적인 사상을 보는 거죠.

역사비평에는 자료비평, 전승사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이 있고, 문학비평에는 사회과학적 비평, 정경비평, 수사학적 비평, 구조주의 비평, 이야기비평, 독자-반응 비평, 후기구조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 등이 있습니다.

역사비평과 문학비평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비평과 문학비평은 병행되어야 하며, 서로 보완되어야 합니다.

역사 비평적 해석과 문학 비평적 해석의 예를 들어 볼까요?
창세기 4장 14-15, 17절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1. 역사비평적 방법 : 창세기 4장 이야기는 에덴 동산의 이야기와는 다른 상황에서 유래한 이야기로, 이 둘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4장이 2-3장과 처음부터 연속된 이야기라면 당시는 아담, 하와, 가인, 아벨밖에는 있을 수 없으나 창세기 4장은 2-3장과 다른 기원을 가지는 이야기라는 전제 하에서는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4장은 원래 많은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였는데,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 인류 최초의 살인에 관한 주제를 선택하여 에덴 동산 이야기에 연결, 편집시킨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여럿 존재한다는 배경이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남은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이 만날 사람도 존재하고 가인이 아내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 문학비평적 방법 : 가인이 두려워한 사람은 가인이 쫓겨날 당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또 낳을 아들들(즉 가인의 동생들), 또 그 아들들의 후손들이 아벨에 대한 복수로 가인을 죽일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 가인의 아내가 된 여인은 아담이 후에 낳은 딸들 중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이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인간들의 수명은 거의 구백살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5장 3-4절을 보면 아담이 백삼십세에 셋을 낳고 팔백년을 더 살며 아들, 딸을 낳았기 때문에 가인이 아담의 딸들 중 하나를 취해 아내를 삼았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는 하겠지만, 이도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그런 것이지 구백년 가까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수십년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구백년씩 살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의문은 접어두고 창세기 4-5장의 배경에서만 본다면 이 해석도 나름대로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참고로, 요단출판사에서 나온 '요한복음 해부'라는 책을 읽었는데, 요한복음을 문학비평 방법 중 하나인 이야기비평(설화비평)으로 쓴 책입니다. 한마디로 어렵습니다. 문학비평도 상당한 이해력과 통찰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서 비평방법(역사비평, 문학비평 모두)에 대한 자료는 다음 책을 참고하세요.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 스티븐 헤이네스, 스티븐 메켄지 지음, 대한기독교서회(1999)

posted by johnworld
2005. 5. 21. 15:12 Bible Guide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방법론들이 난무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다 적절한, 그리고 효과적인 길을 찾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석 방법론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적지 않은 변천을 보여왔다.

종교 개혁 이전의 해석
초대 교회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는 해석 방법론이 사용되었다. 하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와 유대주의적인 영향을 받은 알레고리(allegory, 풍유) 방식의 해석 방법론 이었고 또 하나는 소아시아 안디옥의 크리소스톰(Chrysostom)을 중심으로 하는 문법적-역사적(grammatical-historical) 해석 방법론이었다.

누가복음 15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관련해서, 강도 만난 자가 그 같은 고난을 겪게 된 이유를 말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집(예루살렘)을 떠나 세상(여리고)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대표적인 알레고리 방식의 해석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이유에 대해 초점을 두지 않으셨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알레고리 해석은 본문을 내놓은 저자(화자)의 의도와 대체로 무관하다.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의 말씀을 알레고리로 해석한 부분 외에는 본문을 멋대로 알레고리로 해석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알레고리 방식은 해석자의 비상한 해석 능력이 돗보일 수 있고 또 듣는 자로 재미있게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본문 자체의 목적과 의도는 무시되고 해석자의 상상적 이해가 본문의 메시지를 대체해 버리게 된다. 위험하다.

알레고리 방법의 득세는 본문 중심의 문법적 해석의 문을 좁게 했고, 본문의 저작 의도를 이탈한 다양한 해석의 분출을 터놓았다. 그 결과 이단적 이해들이 많이 나타났고 교회는 교회의 보존을 위해 교리적 해석을 강화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오리겐(Origen)과 어거스틴(Agustine)의 시대를 거쳐 풍유적 방법이 점차 득세함에 따라, 그로 인해 발생한 해석학적 문제들로 인하여 이 후 터툴리안(Tertullian)의 믿음의 법칙(regula fidei)으로 강화된 교회 당국의 해석의 우선성이 부가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교리적인 해석이 본문 중심적인 해석과 반대되지 않고 실제로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임에도, 성경 해석권이 카톨릭 교회에 국한되고 개인적인 해석 노력이 극히 제한된 것으로 인해, 중세에 안디옥학파의 해석 전통인 문법적-역사적 방법론이 전반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중세 이전에는 알레고리 방식이, 중세 시대에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적 해석이 본문 중심 해석의 길을 막은 셈이다.

종교 개혁과 해석
종교 개혁은 다시 안디옥학파의 해석학적 방법론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이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릇된 교회로부터 바른 해석권을 되찾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 개혁자들의 해석학은 성경의 절대 권위와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을 전제로 하여 문자적-문법적-역사적 측면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과거의 풍유적 성경 해석과 교회 당국만의 성경 해석 권한을 거절하고 단연히 일어섰던 분들이다.

루터는 로마서를 읽다가 교회 해석의 오류에 반기를 들고 개혁을 일으킨 것이다. 그가 자국어인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려 한 것은 바로 대중들로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칼빈도 그 자신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다가 종교 개혁의 주창자가 된 것이 확실하다. 그가 쓴 많은 주석은 그것을 증거한다. 칼빈의 성경 이해와 해석의 지속된 노력의 결과로 나온 것인 "기독교 강요"였다. 카톨릭 교회의 그릇된 교리적 해석에 반대하여 일어난 종교 개혁은 본문 중심 해석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역사 비평의 발흥
종교 개혁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독점적 해석 권한을 부인했던 종교 개혁의 주장과 자유적인 인문주의의 부흥(르네상스 운동)이 후 종교 개혁(post-Reformation) 시대에 바람직하지 않게 결합되어 일어난 것이 '역사 비평'(historical criticism)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에 뿌리를 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과 진화론적 다윈설과 변증법적 사고가 결합하여 19세기 서구신학자들에게 성경 해석에 있어 역사 비평을 위한 강력한 장을 제공했다.

역사 비평은 예수의 시대와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모든 초자연적인(또는 기적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단지 자연적인 현상과 개연성(probability)을 기준으로 이들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기본적으로 역사 비평은 성경 본문을 해체해서 초대 교회의 역사적 정황을 다시 구성해 보려는 비평적 노력이다. 여기서 '해체'라고 한 것은 성경 본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주장하게 된 가상적인 다른 이유들을 더 찾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자료 비평(source criticism)은 본문이 한 사람의 작품으로 일관성 있게 쓰여진 것이기 보다는 여러 가지 자료들의 섞인, 일종의 편집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 연구에서 자료의 차이에 특히 주목한다.

양식 비평(form criticism)은 보다 작은 단위의 형식(sub-genre)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본문에서 추려내어 그 기원을 추적하고 그 진정성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다양한 양식들을 추출하고 이들에 대한 평가를 주로 한다.

편집 비평(redaction criticism)은 저자가 본문을 편집할 때 저자의 상황과 특유의 신학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본문(특히 복음서)에서 저자적 특성과 신학이 어떻게 본래의 사건에 영향을 끼쳤을지 연구한다.

이 같은 역사 비평적 연구는 결국 종교사학파(history fo religion)의 시각에서 귀결이 되는데, 그것은 예수 운동과 초대 교회의 사역이 당시의 종교, 사회적 기존 그룹(유대교, 헬라 종교)들의 영향을 받아 생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비평적 연구 결과로 성경의 권위는 해체되었고, 다시 한번 본문 중심의 해석 연구에 대한 열심이 식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는 교회의 쇠퇴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이들 역사 비평 연구는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성을 제거하려 했던 해석 시도였다. 뒤틀린 전제를 가진 연구의 결과가 뒤틀리게 나타난 것은 일견 당연하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1. 15:10 Bible Guide

1. 단 11:10 "그 아들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의 넘침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
여기서 '그 아들들'은 셀류쿠스 2세의 두 아들 셀류쿠스 3세 소테르와 안티오쿠스3세 마그누스를 가리킨다. 이들 중 먼저 셀류쿠스 3세가 BC 227년 왕위에 즉위했으나 소아시아 전쟁에서 동료들에게 살해되었으며(BC 223) 그의 동생인 안티오쿠스 3세가 그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본문은 그가 왕으로 즉위한 뒤 페니키아와 팔레스틴(BC 219-218) 원정에 나선 사실을 가리킨다.

11절은 그 원정 이후의 결과를 말해 준다. "남방 왕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 왕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리라"
곧 안티오쿠스 3세의 팔레스틴 원정은 남방 왕 톨레미 4세 필로파토르(Philopator)의 반격에 막혀 결국 라피아(Raphia) 전투의 패배로실패하였다.
톨레미 4세는 그 승리의 교만으로 (12절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 대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BC 203)

2. 단 11:13 라피아 전투에서 톨레미 4세에게 패한 안티오쿠스 3세는 이후 페르시아 지방과 아시아 지방에 원정하여 카스피 해, 동으로는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영토를 확보함으로써(BC 212-204) 다시 국력을 배가시키고 애굽의 내정 불안(14절)을 기회로 다시 톨레미 왕조를 공격하게 된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