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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4. 8. 23:30 8세기 예언서

우리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정체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와 구분하여 스스로 예언자적 개혁 정신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의 개신교는 구약시대 예언자의 후예요, 그 정신의 계승자로 자처할 수 있을까? 본 연구는 예언자의 정체와 그들의 시대정신, 그리고 그들이 남긴 메시지를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시작되었다.

문서예언자와 초기 예언자

최초로 예언자로 불린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모세는 그 다음 순서로 예언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출애굽기나 레위기, 민수기 그 어디에서도 그를 예언자라고 직접 호칭하지 않는다. 신명기에 이르러서야 모세는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불렀고 또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그렇게 불린다. 사사시대의 드보라는 최초의 여자 예언자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후 여러 익명 또는 이름 있는 예언자들이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에 빈번히 출현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든지 관계없이 그들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독립된 예언문집은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다. 신명기 역사 속에 활동한 예언자들 중에 자기 이름으로 수집된 예언서는 오직 요나와 이사야에 불과하다.

8세기에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로서 그의 예언이 최초로 문서로 수집된 아모스의 경우는 아주 분명하게 스스로를 가리켜 예언자도 아니며 예언자 집단 출신도 아님을 밝힌다. 호세아 역시 예언자로 불리지는 않는다. 남 유다의 모레셋 장로 출신으로 이해되는 미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서예언자 중, 오직 하박국과 스가랴만 그 책의 표지에서 그들을 “예언자”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들에 대한 예언서(문집) 내부의 증거와 신명기 역사 속에서 모세와 버금가는 예언자로 이해되는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문서적 증거는 아주 대조적이다. 우선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들에 관한 내러티브에서 줄곧 자타가 공인하는 “예언자” 혹은 예언자와 동등한 의미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린다. 왜 예언자로 불리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신탁은 문서로 남아 있지 않고, 예언자로 분류하기가 쉽지 않은 8세기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의 신탁은 문서로 남아 있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이스라엘의 예언과 예언 현상 그리고 예언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 의미 있고 중요한 고찰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한, 크게 세 가지 해법을 고려할 수 있다. 첫째로는 벨하우젠의 연구 결과에 따라 율법이 예언보다 후대의 사건이라는 입장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 견해는 8세기 문서 예언자들을 윤리적 유일신 사상의 창시자로 본다. 그러나 문서 예언의 원인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는 제이미슨-드레이크의 견해로서 8세기라는 시대의 역사적 특징을 그 이유로 제시한다. 8세기는 문화의 발전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문서 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절이다. 특히 남 유다의 히스기야 시절이 그렇다. 그런 문화적 영향으로 구전 예언이 문서로 보존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견해는 외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가능성이 있지만 내면적 동기 제시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셋째는 블렌킨솝의 견해이다. “8세기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했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예언자들이 실제로 무슨 말을 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것은 다시 아모스로부터 시작하여 에언자들이 대체로 한 개인보다는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메시지를 선포하였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블렌킨솝은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지만 그도 역시 기초적 관찰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두 견해보다 실제에 매우 근사한 분석으로 간주되므로 그의 견해를 다시 한 번 깊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견해의 문제점을 다음 몇 가지로 지적해 볼 수 있다. 우선 엘리야의 경우도 그가 전한 말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8세기 예언자의 메시지가 9세기의 예언자들처럼 개인에게 주어지기보다는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선포하였다는 관찰도 문제가 있다. 이유는 일단 이스라엘의 예언이 국민 전체에게 선포되었다는 정황에 대해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현재로서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언이 선포된 실제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예언자의 선포를 들을 수 있는 국민이란 도시에 거주하는 자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고 아니면 단지 문학적 과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에언자들의 말은 시초에는 시간을 두고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메시지의 내용 전달이 정확했었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직접 전달한 예언의 말들은 소수 국민, 즉 대부분 도시 거주민에게 전해졌을 것이며, 이들은 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왕실과 중앙관료들이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결국 왕실의 청중-왕, 측근, 파벌 지도자들-을 겨냥하여 선포되었을 것이다.

셋째로, 예언자들의 말과 행위가 두 왕국 몰락 이후 재차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는 설명은 일면 설득력 있는 방향 설정이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한가지 분명하게 동의할 수 있는 점은 역사적 위기의 정황이 예언자들의 말을 문서화하는 원동력을 제공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이유의 설명이 본 연구의 과제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 연구는 구전 예언이 문서 예언으로 보존되는 과정에서 기능했을 정치-경제-사회적 요인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블렌킨솝이 제시한 단순한 해법을 보다 새롭고 충분한 설명으로 교정될 것이다.

9세기 예언과 8세기 문서 예언의 연속성

9세기의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 활동이 8세기의 문서 예언자와 차이가 있었는가? 만약 우리가 9세기와 8세기의 예언 활동에 별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공통점이 많다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문서예언의 출현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앞서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두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 어간에 활동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안정과 군사적 강점 행위 아래 당시의 다수 국민이 겪은 전형적이 사회현상은 가뭄, 기근, 전쟁, 강제부역, 중과세, 토지강탈, 채무구조의 악순환과 노예화 등이었다. 이 시대의 정치-경제적 역학을 사회과학자들은 대지주화 과정(latifundialization)이라고 부른다. 대지주화 과정은 왕이 주도하는 국가가 영토 확장 및 정복 전쟁을 수행한 후 공을 세운 장군과 측근들에게 왕이 국토의 일부 지역을 보상으로 하사하는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역학은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구조의 양극화를 촉진시킨 원인 중의 하나로 이해된다. 이렇게 삶의 기본 조건들을 박탈당한 채 고난 당하는 다수 농민의 고충을 해소해 주고 왕조의 미래를 갱신하는데 뛰어든 사람들이 엘리야와 엘리사였다. 두 예언자는 위에서 열거한 악조건들을 기적적 행동들을 통해 하나씩 풀어 주었다.

이와 같은 대지주화 과정 속에서 예언 활동을 하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입으로부터 과연 아모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가?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상 17장에서부터 열왕기하 13장까지를 살펴보면, 그들은 사회비판에 관한 말보다는 행위를 더 많이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주제-불법적인 종교 숭배와 백성의 재산 강탈(왕상 18:18, 왕상 21:17-20)-는 8세기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의 선언과 활동은 문서예언자, 특히 8세기 예언자들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 신탁의 양식은 인과응보적 저주로서 계약사상에 근거한 저주로 알려져 있는 무익저주(futility curse)이며, 문화적 정의를 예증한다.(암 2:6-7, 암 5:11, 암 6:7, 암 8:9-10) 엘리야와 아모스의 신탁은 사회비판적 내용면에서, 그리고 그것을 담고 있는 양식으로서 문학적 정의(poetic justice)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양자는 결코 상이하지 않으며, 따라서 연속성을 지닌다고 단언할 수 있다. 어떻게 문서 예언과 연속성을 지닐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문서 예언의 정치적 차원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아모스와 호세아의 예언들은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의 멸망 사건을 통하여 그 신적 기원이 입증되었을 것이다. 홀로 팔레스틴에 존속한 유다 왕조가 안팎의 정치적 위기를 당할 때, 이들의 예언과 성취를 객관적 교훈으로 삼았을 것이란 생각은 거의 확정적이다. 그리고 그 교훈으로부터 생기는 예언자의 말씀의 권위에 힘입어 한 걸음 더 나아가 당대에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풀려고 했을 것이다. 즉 후대의 사가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이런 예언자들의 권위를 이용하여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문학적 작업을 수행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양자는 사상, 문학양식, 그리고 체제에 대한 이중적인 성격을 보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서로 동일하다. 서로를 구분하여 ‘초기 예언자’ 혹은 ‘문서 예언자’로 나눌 만한 아무런 문헌적 사상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누어져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과연 그렇게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문서예언을 창출한 결정적 요인

1)8세기의 정치-경제적 농경사회의 역학 : 극심한 집약농업 정책

8세기 예언자들은 모두 특정한 시간대에 활동하였다. 무엇이 그들의 예언 활동을 자극했을까? 기원전 8세기는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다윗과 솔로몬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는 번영의 극치에 이른 시기라고 평가한다. 그 중에서도 “집약농업의 역학”은 이스라엘 사회를 변화시킨 주요 역학적 원인이라고 주목된다. 프릭은 초기 이스라엘이 본래는 반-왕정적 이념으로 출발한 초기 이스라엘이 왕정을 다시 구성하게 된 주요 원인이 바로 이 집약농업의 역학 때문이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기원전 8세기를 이스라엘 역사상 “집약농업 역학이 가장 극심하게 작용했던 시대”라고 판한다. 그렇다면, 이 직업농업역학이 8세기의 이스라엘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였으며 그 증거는 무엇인가? 또 그 역학을 8세기 예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2)집약농업역학의 성서적 증거

이 역학은 장기간의 사회적 변화를 일컫는 것이므로 그것은 마을 중심의 초기 이스라엘 사회가 왕조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회적 변화에 대한 설명을 먼저 요구한다. 초기 이스라엘은 중앙 산지에 정착하면서 자급자족하는 농촌경제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인구증가와 토지 부족, 블레셋의 침투가 원인이 되어 초기 지파 사회는 왕조 사회로 바뀌었다. 왕조 사회는 궁전과 중앙 성소의 건설 및 기념비적 건축물의 건설과 함께 관료들이 상주하는 중앙의 도시를 형성시켰다. 이에 따라 전체 인구의 일부와 용역과 농산물의 중앙 집중화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도시와 농촌의 구분은 물론 상류층과 하류층의 계층 사회도 역시 형성되게 되었다. 더구나 잦은 정벌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전쟁에 차출되자, 농촌 사회는 심한 일손 부족 현상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유휴노동력인 관료 계층의 형성은 이전에 없던 조세제도의 시작을 뜻하였다. 이는 도시 경제의 유지를 위해 마을 경제가 자급자족하던 생산량을 잉여생산량까지 확보해야만 하는 제도적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왕은 또 충성하는 신하들에게 토지를 보상으로 하사하는 제도(prebendal system)를 실시함으로써 관료들은 도시에 거주하면서 원거리의 시골에 있는 자신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이익을 챙기는 부재지주 역할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족한 노동력과 잉여생산의 압력은 농촌의 농민으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집약농업을 실시하게 만들었다.

특히 8세기의 경우, 동서남북으로 넓은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한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와 남왕국의 웃시야는 자매 국가로서 국제무역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이 시대의 두 왕실은 많은 농산품 중에서 현금가치가 가장 높은 포도주와 감람유의 생산에 열을 올렸고 곡식도 보리보다는 단위 생산가가 높은 밀 생산에 주력하였다. 웃시야는 이를 위해 제도적으로 전 국토를 삼분하여 밀,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축산물 생산지역으로 배분하는 전략품목 특수생산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정책을 “땅을 사랑함”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이 평가는 순전히 왕실 서기관의 입장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농민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특정지역을 특정 농산품만을 재배하게 만드는 왕실 주도의 의무 경제에 따라 시행된 이 정책은 토지 사용에 위기 집중을 가중시키므로 토질 저하와 생산 저하, 그리고 마을의 자율적 교환경제를 도시 중심의 시장경제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농민에게는 삼중 부담과 함께 경제적 악순환의 일차적 원인이 되었다. 부는 상류계층에만 집중하게 되고 하층민은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는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 정치-경제적 정황 전체를 가리켜 집약농업의 역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정황 속에서 과연 무엇이 그리고 누가 외롭고 의로운 자이고, 불의한 일이며 죄인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또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는 사회 속에서 야웨 신앙의 자리는 어디이겠는가?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채무불이행을 단죄하여 농민의 재산을 압류하고 권리의 박탈을 선고하는 인간의 법정들(왕실, 성소, 지방 법정) 앞에 맞서서 이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바로 8세기 예언자들이었다.

3)예언자의 개입

이 모든 역학의 배경에는 야웨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우리 모두는 경악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실이었다. 위정자들은 야웨의 이름을 내걸고 의무 경제를 강요하였음에 분명하다. 실례로 이사야 3:12을 읽어보자. ‘아이’란 단어는 중의어로서 ‘학대하는 자’ 외에 ‘수확자, 불의한 자’란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 단어이며, 여인은 아킬라와 심마쿠스 역본처럼 채권자로도 읽을 수 있다. 이 독법에 따르면 유다 왕조의 위정자들이 바로 백성들의 채권자라고 단언한다. 하반절의 ‘네 인도자들’로 번역한 메앗쉐레카는 동사 아샤르의 피엘형 분사로서 “곧장 가다, 전진하다, 행복하게 선언하다, 축복을 외치다”등의 뜻을 갖고 있어서, 이 단어는 문맥상 ‘너희 번영을 선전하는 자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래서 후반절은 “내 백성들아 너희 번영을 선전하는 자들이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로 읽을 수 있다. 이 하반절은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번영을 선전하면서 경제 정책을 실시하는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이 단 한마디의 구절에서 8세기 예언자 이사야는 위정자가 다수 농민들에게 번영과 행복을 구실 삼아 생산성 향상을 독촉하면서도, 그들의 기본 생존권의 희생을(아마도 야에 신앙의 기치를 앞장세워서) 무마하려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posted by johnworld
2006. 3. 26. 12:08 8세기 예언서

1. 군주 사회의 특징

철기 Ⅰ시대 산간시대 개척 사회는 지파 중심의 촌락사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회는 생존의 조건 때문에 정착지를 확장할 필요가 생겼고, 철기 Ⅱ시대(기원전 1000-586년)는 드디어 영토가 확장되면서 군주 사회로 전환하였다. 전환하게 된 두 가지 요건이 작용. 내부적으로는, 주로 제한된 생존 환경, 즉 인구 증가, 농경지 부족, 기술 혁신을 통한 잉여 생산, 권력 집단의 발생, 집약 농업을 위한 관리 시스템의 필요성과 주변 지역과의 통상무역을 들 수 있고, 외부적으로는 주로 블레셋과의 군사 접촉(전쟁)을 들 수 있다. 군주사회로 이행한 것은 단순히 지도자 시스템의 변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를 초래했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고 정치와 행정의 중앙 통제가 이루어졌고, 동시에 재화와 용역이 도시로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군주 사회의 근본적인 특징은 도시화와 중앙화, 사회 계층의 심화, 군사 전문가 및 행정 관료의 등장, 경제적으로는 토지제도의 명령 경제라고 할 수 있다.

2. 중앙화와 관료 체제

철기 Ⅰ시대 말에 이스라엘은 정착지를 점차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특히 에브라임 산지의 서부는 곡식과 축산에는 불리하고 원예농업에는 적합했다. 지역의 확장은 식량 수입의 증가와 지역의 교역을 통제할 목적도 동반했다.

군주 사회는 무엇보다 지파 사회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신분층을 공고하게 해 주었으며 도시 주민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군주 사회의 정치 중앙화는 촌락 중심 사회가 농사를 순조롭게 짓도록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긍정적 기능과 동시에 일차 생산단위인 촌락의 의사결정 기능을 희석시키는 부정적 결과도 야기했다.

그러나 군주제는 농사에 안정성과 물류 중심지를 제공해 주는 편리함보다 농업생산의 흐름을 방해하는 대규모 건축 사업을 많이 일으켰다. 하솔, 므깃도, 게셀에서 발견된 성채는 6개의 방이 곁달린 유명한 장갑 성문을 갖고 있으며, 행정중심지인 하솔, 므깃도, 게셀, 예루살렘, 브엘세바에서는 아주 눈에 띄게 규모가 큰 수로 체계를 갖추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 부흥과 번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어깨에 지워진 부담이 엄청나게 컸음을 증거 한다. 왜냐하면 엘리트 지배계층은 도심지와 거리를 건설하는데 모든 필요를 강제노동과 중과세를 거두어 실시하기 때문이다. 좋은 사례가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궁전 건축이다.(왕상 10:26, 대하 9:25) 그러므로 도시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하는 구절(사 1:21, 25:2, 미 3:12, 6:9)을 종종 만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도시 생활은 또한 노동력의 분화를 초래했다. 직업의 분화 외에도 군주 사회는 전문가를 필요로 했다. 이를테면 글을 쓰는 서기관, 각종 행정가, 군사 전문가, 솜씨 좋은 궁전 관리인, 상인, 기능인, 건축가, 각종 예술가 등이다. 이런 기술자들은 토착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는 찾기 힘들다. 이런 기능인들의 수요는 교역과 무역의 발전을 초래하였다. 아울러 군주 사회 초창기에는 빈번한 전쟁으로 강한 영웅 심리의 대두로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는 인구 이동이 잦았다.

3. 토지 제도의 변화

군주 시대는 두 개의 상충하는 토지 보유 제도를 운영했다. 하나는 전통적인 공동수유에 정기적인 재분배를 통해 같은 혈족 내에서 부자간에 세습되는 토지제도요, 또 하나는 왕실에서 신하들에게 급여와 포상으로 수여하는 수녹 토지제도였다. 그런데 이 엘리트 지배층은 이 수녹 토지를 대대로 세습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수녹 토지는 곧 세습지로 전락하였다. 특별히 수녹 토지는 군주시대 초반부터 중앙 산간지를 제외한 가나안 저지대의 곡창지대를 주로 수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8세기에 이르러 이런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 지배층은 국제 수출입 무역에 참여하면서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생산에 유리한 중앙 산간지대를 차지하고, 기존에 구획별로 나뉜 소규모 자영농가의 토지를 합법적인 방식으로 갈취한 후 그것을 거대한 토지로 전환시키고 그곳에서 일하는 소작농들에게 단일 영농법을 주문하여 포도주와 기름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집약농업을 정책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런 정황이 가장 극심하게 드러난 시대가 8세기 중반이었고, 문서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이 등장하게 되는 시대도 이때부터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4. 행정 및 사법 체계

보통 장로제도라는 것으로 촌락 사회의 사법 질서를 유지했다. 이들은 주로 가족이나 혈족 중의 연장자이며 자기 재산을 갖고 있는 자로서 혈족이나 마을을 대표하여 공동체 내에서 무엇인가 사법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구성원들이 들로 나가 일하기 전 시간인 새벽에 부락이나 마을이나 성문 광장에서 모임을 갖고 필요한 의사를 결정하곤 하였다.(창 23:10-18, 룻 4:1-11) 군주제도가 시작하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지파 중심의 판결 시스템은 왕실이 임명한 지방 사법관(행정관을 포함하여)으로 인해 그 권위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대하 19:5-11)

이런 체계는 주로 조세제도에 이용되었다. 조세는 농업 중심 사회의 경제에 경제의 재분배를 위한 가장 중요한 형태였다. 조세는 현물이나 현금으로 징수하였다. 현물 조세일 경우, 군주 사회는 거두기 편리하고, 저장, 운반, 물물교환이 편리한 물품들을 선호하였다. 그 조건에 주로 포도주와 기름 종류가 가정 적합했다.

군주 사회에서 이스라엘 농민들이 진 조세부담은 일반적으로 총 농업 생산물의 절반 이상이라고 상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경의 율법에 채무 관계를 다루는 조항들(채무노예에 관한 출 21잘, 면제년에 관한 신 15장)이 상대적으로 우선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지역의 재판 시스템까지 깊이 파고든 군주 사회의 중앙 행정력은 엘리트 지배층이 원하면 언제든지 사방의 사법제도를 자기들의 뜻대로 장악할 수도 있었다.(왕상 21장의 나봇의 포도원) 그래서 고대 사회의 채무구조는 소수 엘리트 지배계층을 제외한 대다수 자영농민의 자급 자족적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란 사실을 예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제 구조 속에서 임대자본주의 방식의 경제도 서서히 가동되기 시작했던 것을 추정된다. 임대자본주의란 소수 엘리트 지배층은 생산지인 농토에서 멀리 떨어져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에게 생산지에 거주하는 소작농들이 농사에 필요한 각종 요인들(토지, 물, 가축, 씨앗, 식량 등등)의 임대를 청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지주들이 소작농들에게 생산 항목을 세분화하여 항목별로 임대를 주는 방식을 일컫는다. 그럴 경우, 모든 항목마다 개별 임대료를 내야 하는 농민들의 부담은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5. 무역과 상업

150년간 교역이 중단된 후 1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팔레스틴 지역에는 페니키아, 에돔, 암몬, 시리아의 아람 같은 주변의 정치 경제 중심지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서남부에서는 이집트가 다시 제국의 권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교역을 재개시켰다. 혹자는 이스라엘 군주 사회가 이루어진 것은 이 지역과 지중해 동부의 통상 교역이 재개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특별히, 이스라엘과 두로의 교역은 각별했다. 이스라엘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두로는 해양수산업과 무역에 의존하는 나라인지라 두 나라가 서로의 부족한 생필품을 잘 보완하면서 공존하였다.

그러나 군주시대의 통치가 지속되면서 곡식, 포도주, 기름의 수출과 엘리트 지배계층의 사치와 군사장비 확충을 위해 황금, 말, 목재, 상아, 각종 향품과 장신구의 수입은 이스라엘 사회에 부의 재분배를 심각한 불균형으로 이끌었다. 다시 말해서 지주 계층의 엘리트는 수혜를 입었고 시골의 농민들은 심하게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다.

posted by johnworld
2006. 3. 20. 21:10 8세기 예언서

이 연구는 왕조 이전 시대라고 부르는 철기 Ⅰ시대 팔레스틴 지역에 존재했던 이스라엘 초기 사회 모습을 성서 연구와 고고학적 연구를 이용하여 사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팔레스틴의 후기 청동기 시대 사회는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졌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나안의 비옥한 평야지대와 계곡에 위치하였다. 기원전 약 1200년경, 이집트 제국은 가나안 합병 정책을 가동하여 이 지역에 깊이 관여하기 위해 행정부서와 군사 기지를 설치하였다. 이집트의 이러한 행정적 개입은 경제적 착취를 동반하여, 상당량의 곡식이 이집트인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150년경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이집트는 하티 제국과 미케네 제국들과 함께 동시에 쇠퇴하게 되었다. 한 가지 주요 원인은 해양민족(일부가 블레셋 족속)의 침범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정치적, 사회-경제적 변동 기류와 때를 맞춰, 팔레스틴의 중앙 고지대에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는 드문드문 형성되었던 곳인데도 불구하고 수백 곳에 달하는 새로운, 그러나 소규모의 주거군락이 대거 등장하였다. 고지대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철기 Ⅰ시대 후반에 이스라엘 군주 사회가 형성된 심장부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내포하는 의미는 깊다.

또 다른 물리적 증거는 메르넵타 비문이다. 기원전 1207년 이집트의 바로 메르넵타는 통치 5년에 리비아인과 싸워 전승한 기념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문에 ‘이스라엘’이란 말이 언급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비문의 ‘이스라엘’이란 말은 인종 집단을 지시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이 말은 아마 이집트 서기관들이 고지대 팔레스틴의 어떤 집단을 정치적 언어로 표현해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철기 Ⅰ시대 고지대 정착자들의 등장에 대한 역사적 해명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세 가지 대표적인 모델들로 ‘정복모델’, ‘침투모델’, 그리고 ‘사회혁명모델’을 손꼽을 수 있다. 이 연구는 사회혁명모델을 기본 전제로서 지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델이 이 시기에 일어났던 사회-문화적 변화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철기 Ⅰ시대의 고지대 농업 상황을 올바로 평가하고 기술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후기 청동기 시대 가나안의 도시국가의 것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1)주거지 변화와 인구 분포

기원전 1200년경, 많은 수의 토착 주민이 삶의 근거지를 도시 혹은 도시와 연계된 비옥한 해변평야지대와 계곡을 떠나 고지대와 산록의 도심에서 외떨어진 변두리의 촌락지대로 옮겼다. 새 정착지들의 크기에 관해서 실로는 4에이커, 텔 마소스는 12에이커, 단은 50에이커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2 에이커도 채 안 된다. 이 새 정착지 변화에는 갈릴리, 중앙 산지 그리고 남부 네게브 지역 별로 차이가 있지만 아주 특징적인 하나의 유형을 보여 준다. 정착 유형은 이곳의 주민들이 어떤 모습으로 영농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첫째, 새로운 소규모 정착지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산간지대에서 증가한다. 둘째, 이들은 대게 천연적인 장애물이 많은 외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셋째, 이들은 대개 담이 없으며 분산되어 있다. 넷째, 이들은 바위산이나 언덕 꼭대기에 정착용 건물을 세움으로서 인근의 경작지를 방치하고 있다. 다섯째, 정착지 대부분은 물 근원에서 멀다. 여섯째, 대개 후기 청동기 시대 도심지에나 알려져 있는 저장창고, 성전 혹은 궁전 같이 특별한 목적을 지닌 ‘공공’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일곱 째, 가정용 건물은 ‘네 칸 방’ 혹은 ‘세 칸 방’ 혹은 기둥 있는 가옥 같은 공통된 유형을 갖고 있다. 여덟째, 전체 정착과정은 너무 복잡해서 구분해 낼 수 없다. 종합하면, 이 자료들은 철기 ⅠA 시대의 고지대로 정착지가 변천한 것을 “예전의 도시국가 시절에 미개척지인 변두리 지역이 새로운 정착지로 각광을 받은 것으로 보게끔” 만들며, 아울러 새로 정착한 주민들의 긴급한 과제는 국가의 통제와 지배가 없는 안정된 사회와 기초생활 경제를 구축하는 일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제껏 묘사한 정착지 변천과 함께, 인구문제는 이 시대의 농업 조건을 평가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인구밀도는 집약농업과 가장 밀접한 상관계수로 이해된다. 인구밀도가 집약농업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인구 과잉이 초래하는 결과는 알아야 한다. 인구 규모를 산출하는데 가정용 건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고지대 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사실은 우선, 소규모 인구 이동(도시에서 고지대의 촌락)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가나안 전역의 도심지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새로운 정착자들은 땅의 부족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고지대에 성채가 없다는 사실은 또 다시 이 지대의 인구 부족을 확증해 준다.

2)환경과 기술

(1)환경

고지대 환경은 “다채로움”, “파편성”, “수직성” 등의 특징을 지닌다. 홉킨스는 17개의 특성지역을 열거한다. 네게브 고지, 유다 고지, 사마리아 고지, 갈릴리 고지. 이러한 다채로은 고지대 풍경은 어느 두 곳도 농경 정착을 하는데 동일한 여건을 제공해 주지 않음을 뜻한다.

(2)기술

테라스 조성 기술, 소석회로 만든 수조, 그리고 철제 도구의 사용이라는 세 가지 혁신적 기술이 철기 시대의 정착지 이동과 기술 혁신에 결정적인 요인들이었다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이 주장은 최근에 고고학적 결과에 기초한 연구들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1. 테라스(계단형 농지)는 용수 보존과 토양의 부식 방지를 위해 건조된다. 테라스가 겨우 몇몇 장소에서만 조성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이 기술이 이 시대의 지배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테라스는 다양한 지역적 조건들과 정착 역사 때문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2 소석회 반죽을 바른 수조 역시 전체 확장의 환경을 위한 열쇠가 못된다. 실로, 길로, 이즈벳 사르타와 같은 장소와 북부 네게브 지역들은 이런 수조가 없다.

3 철기 사용의 일반화는 탄화처리와 담금질(강철 처리 과정)이 알려진 기원전 10세기 이후에 비로소 가능했다고 한다. 갓월드가 제안한 대로, 새롭게 정착한 12세기와 11세기 주민들의 농사에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블레셋이 고지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철제 기술을 독점했다는 보도 역시 잔치와 예전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위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블레셋의 통제 하에 블레셋의 이익을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제 농기구를 가지기를 분명히 바랐을 것이다.”라는 관찰은 설득력이 있다.

4 위에서 언급한 기술은 협소한 정의에 입각한 논의이다. 메릴은 넓은 의미에서 기술을 “다양한 정황 속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얻고 실패를 피하기 위한 기능, 지식, 방법들의 유동적인 정보의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메릴의 정의에 기초하여 홉킨스는 철기 Ⅰ시대 고지대 사회가 생존을 위해 직면한 세 가지 중요한 도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다양한 환경을 이용하는 것, 2)다변하는 환경과 그것이 농업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처하는 것, 3)마을과 개별적으로 경작하는 농가의 전체 노동력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 이런 지침에 따라 홉킨스는 기초 생존 전략을 진정한 의미의 기술혁신으로 제시한다.

3)기초 생계 유지 전략

철기 Ⅰ시대 고지대 사회의 경제는 작지만 자율적인 촌락 농부들의 혼합적인 자급자족 농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농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목초지를 옮기는 축산업에 종사하였다. 후자는 집약농업 체제 내의 대안적인 전문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형태는 두 가지 장점을 가진다. 정치적으로 “이동 가능한 가축과 소 떼는 부동산보다 세금을 매기기가 용이하지 않고, 기술-환경적으로 곡식 생산과 축산업을 혼합하는 방식은 곡식만을 재배하였다가 장기간의 가뭄을 만났을 경우 식구들의 생계를 더 잘 지탱해 줄 수 있다. 철기 Ⅰ고지대 사회의 생계 유지 전략들은 크게 말해서 1)건식 농업과 축산업, 그리고 여러 번 수확하는 곡식들과 채소들을 혼합하여 생산하는 위기 분산 방식, 2)용수 보존과 토양의 침식 방지를 위한 테라스 조성, 3)사일로와 항아리 같은 저장 체계의 개발, 4)공동으로 노동하는 집단 형성, 유아 출산장려와 집약적인 노동을 통한 노동력의 극대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4)사회구조

철기 Ⅰ고지대 정착자들의 사회구조에 관한 통상적인 이해는 삼분법, 즉 벳 아브, 미쉬파하, 쉐벳, 혹은 맛테이다. 벳 아브 혹은 벳 아봇은 농사를 짓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사회적 단위는 정착하는 동안에 진행되었을 높은 치사율 때문에 가족 규모의 불안정성과 집중적인 추수기 혹은 테라스를 조성할 때 혹은 작물을 재배하는 밭과 주변에서 가축을 치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결핍이 야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세 번째 사회 단위가 자급자족을 위협하는 위기(예를 들어, 기근)에 직면하여 자체적으로 타개할 수 없을 때 보다 큰 사회 단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때 두 번째 분류 단위인 미쉬파하가 기능을 시작하고 이자 없는 상부상조를 감당한다. 일차 사회단위인 쉐벳트 혹은 맛테는 사회적 지역적 조직 단위를 가리키며 군사적인 자기 방위와 정치적으로 자치하는 자율성과 능력을 가진다. 갓월드에 따르면 성경 본문에서 이 분류 단위를 서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렘케는 이 용어가 군주제 이전 사회의 사회-정치적 현실에 아무런 사회-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사회구조의 기초는 벳 아브/벳 아봇이었으며 보다 큰 사회집단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다.

철기 Ⅰ시대 사회는 분절형 사회조직이란 특징을 지녔고, 지파 체제는 평등주의였다는 것이다. 이 공산주의적 생산 방식은 두 세기 동안 외부든 내부든 잉여농산물을 장악하려는 시도들에 이념적으로 저항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초부터 고지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잠재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계층화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몇 가지 고고학적 발굴품들은 이러한 초기 이스라엘 사회의 계층화를 시사해 준다.

고지대 농경사회의 전체적 모습들 돌이켜 볼 때 이 사회는 시초에 식량이 남아돌기보다 부족할 위기에 처했고 그래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집약적 농업 전략을 수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철기 Ⅰ시대 후반부에 도달한 사회-정치적 안정세는 이중적인 효과(개척 사회 내의 계층화와 제한적인 자원을 확충하기 위한 외부세계와의 접촉 시도)를 초래하였다.

5)수장제(chiefdom) 사회로 변천

초기 이스라엘 정착 사회가 지파 중심의 분절형 사회에서 수장제로 변천한 시점은 철기 Ⅰ시대의 후반부(기원전 1100-1000년)에 발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수장제란 지도자의 유형이 분절형 사회와 다르다. “수장제는 느슨한 정치체제를 지니며 지역 주민을 수천 명씩 중앙화하여 조직하는 사회체제이다. 사회적 지위는 어느 정도 세습이 가능하고 경제적 위계 질서가 연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사회에서 수장은 “집약자-재분배자-전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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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3. 12. 10:16 8세기 예언서

문학적 해석은 역사비평 무용론을 주장하는 반면, 역사 비평가들은 문학적 해석을 무역사적(ahistorical)이라고 몰아세운다. 논쟁을 촉발시킨 요인들과 쟁점이 무엇인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통시적 해석인 역사비평은 본문을 분석적으로 해부하면서 과거를 쳐다볼 수 있는 창문(window)으로 인식하는데 반해서, 공시적 해석은 본문을 독자, 혹은 해석자의 현재를 비춰 주는 거울(mirror)이라고 보고 통전적 혹은 전체적으로 읽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며, 본문에 깊은 심층적 의미(depth dimension)가 담겨 있으며, 저자의 의도에서 독립하여 자율성(autonomy)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런 문학 이론은 원저자의 의도를 발견해 내는 데 집중하는 전통적인 역사비평 작업을 무의미한 작업으로 만든다.

둘째, 브레바드 차일즈(B. S. Childs)는 파국에 처한 성서 해석을 구원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경적 접근(canonical approach)을 제안. 성서란 신앙공동체가 받아들인 정경이므로 본문의 배후 역사를 찾는데 낭비하지 말고, 최종본문의 정경적 형태와 맥락(canonical shape and context)안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를 찾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철학 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역사비평 성서 해석의 틀을 탈피하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제임스 바(James Barr)의 설명에 따르면, 다원주의와 같은 맥락 속에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지식은 인간 사회의 구상(social construct)에 불과하다. 본문의 의미는 저자의 마음속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독자가 결정한다. 의미를 결정하는 주체가 독자이므로, 독자의 수효만큼 의미의 가지 수효도 다수라고 생각한다.

넷째, 유대인 신학자들은 1960년대 이후 구약성서 연구에 활발히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역사비평 방법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다섯째, 문자주의에 입각한 기독교 근본주의 신학의 해석학과 보수주의적인 교회의 역사비평 방법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끊임없는 배격이다. 보수적인 신학은 계몽주의의 산물인 역사비평을 인간의 이성으로 계시를 판단하는 불경건한 태도라고 단죄하고 교회와 신학교에서 배척해 왔다.

논쟁의 요점과 실체의 해부

1)통시성과 공시성(diachrony and synchrony) : 이 용어는 언어학자 소쉬르가 그의 책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처음 사용. 공시적 주석과 통시적 주석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 양자의 차이는 반역사성과 역사성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계(system)와 요소(element) 사이에 있다. 만일 이런 차이를 상이한 기존 자료가 혼합된 성서 본문의 주석에 적용한다면, 공시적 접근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나 저작 상황, 그리고 저작 목적을 무시하고 본문 자체를 주석의 핵심으로 삼을 것이다 만일 본문이 이해하기 난해하고 일관성이 없어서 기존의 자료들이 혼합되었다고 생각되는 경우라면, 작자의 기술과 문학적 기량이 아주 뛰어나서 비평학자라도 감히 판별해 내기 어려운 특성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럴 경우, ‘공시적’이란 용어는 역사적 패러다임에서 문학적 패러다임으로 변화하는 추세를 반영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은유(metaphor)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비 자체가 실체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적 구분을 성서 연구에 전용하여 쓰는 일종의 은유이고 또 본래적 의미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2)역사적 해석과 문학적 해석 : 통시적 역사 비평이 공시적 문학적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난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 역사비평은 처음부터 문학적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비평의 대명사격인 자료비평의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은 오경을 읽은 중세 시대의 해석자들이 내용 가운데 불일치, 중복된 기사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다듬어진 방법론이었다. 따라서 역사 비평은 처음부터 본문 배후의 발전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문을 읽다가 접하게 되는 내용상의 비일관성이나 모순, 그리고 불필요한 중복기사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문학적 관찰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3)객관적 해석과 주관적 해석 : 역사비평을 오해하는 주장들은 역사비평에 대한 다음의 통념적 정의로부터 발생. 역사비평은 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을 통해 원래의 저자가 의도했던 단 하나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이 진술을 두고, 공시적 연구자인 건과 피웰은 세 가지 이상의 공격을 가한다.

첫째, 공시적 해석은 역사비평이 객관적 혹은 가치중립적 해석을 추구하는 점을 비난한다. 이 점을 공격하는 논리는 ‘객관적 진리(혹은 메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던적 사고방식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주관적’인 해석에 지극히 부정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포스트모던주의와 근본주의가 합세하여 문학적 해석을 옹호하고 역사비평을 비난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이론에 의하면, 해석의 결과란 원저자의 의도와 가장 근사한 것일 뿐이지 완벽한 이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것이 해석의 한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비평은 객관적이면서도 해석자의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해석방법이다. 주관-객관 이분법은 모던적 발상이므로 역사비평은 적어도 이러한 사고구조를 극복하려는 해석학적 개발이 필요하다.

둘째, 역사비평은 원래 본문의 맥락에서 원저자의 의도를 결정하려고 하므로 최종본문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최종본문을 중요시하는 주석이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역사비평적 주석이므로 그것은 역사비평의 완성이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셋째, 역사비평은 본문에 단 하나의 참된 의미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것을 찾는다고 비난한다. 이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역사비평적 주석은 작업 결과를 유일한 해답(the answer)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견해(an answer)일 뿐이다. 가장 개연성이 높다(the highest probability)고 제안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만이 참되고 유일한 해석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4)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 : 한스 프라이는 역사비평의 이런 이분법적 작업의 결과로서, 성서 본문의 의미란 본문 밖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학자들이 재구성한 역사와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표현(reference) 자체에 담긴 의미는 별도로 존재하게 만든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성서 이야기는 말하는 것으로서의 표현(reference)과 그것이 관심하는 바로서의 의미(meaning)가 구별되는 이분법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는 이런 태도를 비평 이전 시대의 관점, 즉 문자적 의미가 역사적 의미와 동일하게 받아들여졌던 시절(종교개혁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닌지 반문하고, 그의 정경적 관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종의 편견으로 평가한다. 과거의 의미(what it meant)와 현재의 의미(what it means) 사이의 괴리를 좁히는데 필요한 것이 해석학이다. 전통적인 역사비평에 사용되는 해석학을 ‘재구성의 해석학’이라고 부른다면, 두 의미의 현장 사이의 괴리를 제거하고 하나로 통합하는 해석학을 ‘통합의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스 가다머는 이것을 “지평 융합”이라고 부른다.

5)신학적 기여도 : 일반적으로 역사비평이 공격을 받는 이유들은 주로 이 방법이 세속주의, 회의주의, 이신론(deism)의 가치로 무장한 인본주의요, 성서 본문의 통전성을 파괴하는 분해주의요, 이성을 계시보다 영감보다 우위에 두고 성서의 거룩성을 인정치 않는 자유주의요, 신앙공동체(교회)에게 백해무익한 혼란만을 가중시키며, 오직 신학교와 학자들의 지적 유희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몰이해를 시정하기 위해 우선 역사비평이 종교개혁의 산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계몽주의의 산물인 역사비평을 부정하는 근본주의 성서학계는 비평 이전 시대의 중세적 해석으로 복귀하기를 염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고려할 것은 종교개혁의 취지가 성서의 권위를 교회와 전통의 권위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역사 속에 존재하는 개신교가 역사비평을 비난하고 나서는 현상은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보다 발전된 역사비평을 위하여

역사비평 자체의 해석학이 갖는 문제를 점검하고 개선된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

1)역사비평은 결코 완전한 방법론이 아니다.

2)역사비평은 과거에 형성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 본문을 쓴 저자(들)가 의도했던 바를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을 위한 가장 적절하고 개연성이 높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과거에 본문이 피력하는 바를 알아야 현재적 의미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역사비평 원리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 준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에 따르면, “이해의 기술”이라고 정의되는 해석(이해)의 두 가지 원리는 문법적 해석과 기술적 해석으로 구성된다. 문법적 해석은 단어와 문장 그리고 맥락 사이의 상관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기술적 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예감하는/가늠하는”(divinatory) 방법과 “비교하는”(comparative) 방법을 오가는 순환적 교정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석 작업은 순환적이다. 끊임없는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ycle)을 통해 해석자는 저자의 의도에 도달하게 된다.

4)역사비평은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역사가 무엇인가에 관한 이해는 중대한 이슈이다. 역사 기록이란 당시의 기록자의 사관에 따라 의도적 편향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고대 역사기록물이 데카르트적인 객관성을 지닌 기록이란 생각은 용인하기 어렵다. 사건은 존재했으나 그 사건에 관한 기록은 하나의 관점에서 씌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 관점의 역사적 정확성을 신뢰하기란 고대의 것일수록 더욱 어렵다. 구약성서 기록을 단 하나뿐이고 진정한 객관적 이스라엘의 역사(the history of Ancient Israel)로 사용하기는 불가능하며, 그 대신 어떤 관점에서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a history of Ancient Israel)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다.

5)구약성서가 글들의 모음이란 맥락에서 볼 때, 이제는 문학이 무엇인지 그 정의를 내리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일종의 예술로서 의사전달(communication)의 방편으로 볼 수 있다. 문학 작품을 통한 의사전달 과정에는 네 가지 요소가 개입된다. 본문, 저자, 독자, 그리고 세상. 한편 연구자는 문학이 “사회적 통제의 도구”(instrument of social control)라는 제임스 바의 견해에 동의한다. 구약성서는 역사의 지평 속에 존재했던 특정한 사회적 정황 속에서 야웨를 믿는 저자들의 신앙적 세계관을 기술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 문학이 사회적 현실의 산물이란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내에서 역사를 기술한 관습 속에는 사건을 있었던 그대로의 기술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내용, 그리고 그런 보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특정한 세계 이해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함의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저자들은 신앙공동체의 구성원인 독자가 “믿게 하려는 ? 필요 충분한 ? 만큼”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발전을 위해서 문학이 가지는 이런 사회적 기능과 그 편향성을 의식하면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서, 전통적인 역사 비평은 사회과학적 접근과 이데올로기 비평적 방법론의 도움을 통해 한편으로는 고대 세계에 관한 더 많은 정보와 이해를 도모하고, 동시에 그런 시대적 정황에서 생성된 성서 본문들의 신학적 편향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대해 나갈 때, 성서 본문에 대해 과거에 가졌던 의미의 지평을 더욱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성서해석 방법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나가는 말에 이미 저자가 피력한 바, 학문간 교류를 통해 서로의 약점을 보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제안에 공감하면서, 상이한 두 연구방법들은 서로 다른 철학적인 모형들에 기초하고 있어서 각자 다양한 유형의 연구결과를 산출해낼 것이다. 문학비평이 본문의 의미를 기술함에 있어서 저자와 독자 사이에 의사소통케 하는 측면에서, 역사비평은 본문의 의미를 본문의 기원과 발전과정 측면에서 기술하려고 한다고 할 때, 이 연구결과들은 결코 상충되지 않으며, 이 두 모형들은 개별적으로 또 상호보완적인 방식으로 적절히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서 성경을 읽고 읽는 독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작업들이 학자들간의 교류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견해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체적인 결과들을 보이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에 소개된 본문비평과 번역비평 등 역사비평 방법으로 연구한 ‘신명기’(감신대 출판)와 같은 성경을 보는 일견을 줄만한 노력들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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