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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7. 23:02 Daily Bread

출처 : http://cafe.daum.net/pastors/83o/5440

#이 소논문은 연구논문집에 개제된 학술적인 글입니다만 여러분의 설교에 조금이나 도움을 주기위해서 올렸습니다.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편애인가?

인물구조로 본 창세기37:2-4절


1. 서론

요셉을 예수님의 모형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교회의 지지를 받다가, 요즘 역사적-문학적 방법론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학자들로 인해서 이견해가 바뀌고 있다. 이는 성경본문에 나타난 요셉의 삶이 예수님의 모형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요셉의 천방지축 같은 삶으로 인해 형들이 그를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가정의 불화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견해가 옳은 것인가?

창세기 37-50장 전체를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요즘 공시적 방법(synchronic approach)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1) 이는 전체구조가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고, 내용과 주제의 통일성과 흐름이 자연스럽게 구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2) 이들 중 몇몇 학자들은 창세기에 기록된 단어 ‘톨레돗’(תודלת-자손, 역사, 혹은 계보)이 새로운 사건 혹은 구조의 시작 표시로 보고 창세기 37-50장을 구조적 관점에서 주석한다.3)


2. 문제제기

창세기 37장2-4절을 주해함에 있어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는 본문의 범위에 대한 질문이다. 현제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는 37장 1절이 본장의 시작으로 되어있는데, 2절을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4)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2-4절은 창세기37-50장 전체구조의 서론으로 삼을 수 있을까? 둘째는 본문의 주제에 대한 질문이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일러바친 것이 고자질인가? 아니면 잘못하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고한 것인가? 만일 사실대로 말했다면,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편애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자는 '내러티브 설교'의 특징들인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 이러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 그리고 인물의 환경 등을 구조의 요소로 삼아서 구성된 인물구조를 구조분석방법의 목적에 따라 먼저 분석한 후. 구조와 의미를 논하면서 위 문제들을 풀어 갈 것이다.5)


3. 본문의 범위

우선 창세기 37장 1절의 위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몇몇 학자들은 창세기 37:1절을 ‘에서 톨레돗’(36:1-37:1)의 결론으로 보고 2절에 나타난 ‘야곱 톨레돗’의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6) 창세기 전체본문에서 사건이나 족보의 시작을 알리는 '톨레돗'(תודלת) 문구가 10번 나타나는데,7) 이러한 문구는 전통적으로 창세기를 저술한 저자의 저술 방식으로 보았다.8) 그러나 이들은 확실한 증거를 보이지 못하다가 요즘에 공시적 방법의 학자들에 의해서 ‘톨레돗’ 문구가 단락은 물론이요 하나의 구조를 형성하는 시작표시 혹은 표제기능으로 보게 되었다.9) 필자는 ‘야곱 톨레돗’ 문구를 새로운 본문 혹은 구조의 시작 표시로 보려한다.

그렇다면 37:2-4절은 본문의 전체구조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10) 구조적으로 본문을 주석하는 학자들 중에서 4절까지를 서론으로 보는 학자는 코츠(Coats)와 험프리스(Humphreys)인데, 이들은 각각 그들의 구조인 “편집된 구성체”(redactional unity)와 “포물선”(trajectory)구조 안에서 이야기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11) 또한 화이트(White)는 그의 설화론(Narratology) 관점에서 이러한 부분에는 직접대화(direct speech)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전체내용의 서론으로 본다.12) 또한 몇몇 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인, 아버지 야곱/이스라엘, 요셉, 그리고 형제들의 반복이 창세기 50장에도 나타나는데 이러한 인물들의 등장을 요소로 해서 본문의 서론과 결론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13) 이런 점에서 창세기 2-4절을 전체구조의 서론과 첫 번째 병행구조의 시작으로 보고 본문을 주해함에 있어서 우선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4. 인물구조분석

본문을 내러티브의 특징상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 그리고 말과 행동 또한 인물들의 상황을 구조의 요소로 삼아서 구성된 인물단위를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인물들을 병행구조로 나타낼 수 있다.


A 야곱-요셉 <아버지와 아들관계> 2a

B 요셉-형들(빌하/실바) <요셉의 로에(돌봄)의 역할> 2b

C 요셉/형들-아버지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고함> 2c

A' 이스라엘-요셉 <아버지와 아들관계> 3a

B' 아버지-요셉(라헬) <요셉의 계승자 역할> 3b

C' 형들/아버지-요셉 <형들이 요셉을 미워함> 4


위 구조는 ABC가 반복되는 병행구조로서 아버지 야곱/이스라엘, 요셉, 그리고 형제들이 인물구조의 요소들로 구성되어있다. 개인적으로는 요셉이 6번, 아버지/야곱/이스라엘이 4번 형들이 두 번 나타난다. 특히 요셉은 모든 인물구조의 요소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버지와 요셉과의 관계는 4번 나타나고 요셉과 형들의 관계는 두 번 나타난다.

첫 번째 선형구조(ABC)는 야곱의 자녀들 중 요셉을 중심으로 몇몇 자녀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요셉과 아버지의 관계로 끝을 맺는다. 이어서 A'B'C'에서는 앞에 나타난 인물 관계들이 조금 변경 되어 나타나면서 반복된다. 두 번 반복되는 선형구조를 종합해 보면, 아버지 야곱/이스라엘이 요셉과 관계되고 요셉은 형들과 관계된다. 결국 한 가족의 멤버들이 요셉을 축으로 두 그릎으로 나뉘어서 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 속에서 개인적으로는 요셉이, 인물관계에서는 야곱과 요셉이 전체구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가정의 가장으로서 사랑을 주는 자의 상징적인 역할과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는 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와 요셉의 관계에 갈등을 느끼고 동생 요셉과 대립된 관계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는 병행구조의 각 단위들을 비교하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들 그리고 말과 행동들이 자세하게 나타난다. AA' 에서는 야곱과 요셉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아버지 야곱/이스라엘이 다른 자녀들 10명(동생 베냐민은 제외하고)보다 요셉에게 더욱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에서는 야곱의 톨레돗 곧 야곱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의 자녀들 중 요셉의 열일곱 살의 삶을 부각시키고 있다. A' 에서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요셉을 다른 자녀들 보다 더 사랑(בהא)한다고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14)

BB' 에서는 요셉과 몇몇 형들 그리고 요셉과 아버지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의 역할들이 엿보인다. B에서는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다”고 개혁한글판에 번역되어있지만,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요셉이 목장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을 돌보고 있다”라고 번역한다.15) 만일 이러한 번역이 원문에 가깝게 해석된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요셉의 ‘로에’(הער/돌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6) 그러나 여기서 야곱의 본처의 자녀들 중 레아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지 라헬의 첫째 아들인 요셉의 열일곱 살의 성실한 삶을 강조하면서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밝혀준다. B'에서는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는 이유와 거기에 따른 채색옷인 ‘케토넷 파씸‘ (םיספ תנתכ)을 입히는 모습이 묘사된다. 특히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는 이유를 채색옷을 지어 입히는 모습과 함께 ’이는 노년의 아들이기 때문‘(םינקז-ןב יכ/키 벤 저쿠님)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여기서 요셉을 ’노년의 아들‘(KJV) 혹은 ’노년에 낳은 아들‘(NIV)로 설명하는데 물론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B에서 언급된 후처들인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의 구조적 비교와 대조 입장에서 야곱의 본처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라는 뜻도 내포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두 인물 관계들의 요지는 요셉이 아버지 같은 로에의 역할자로서 형들을 돌보고 있고, 아버지는 요셉을 후계자로 삼는 가운데 계승자로서의 요셉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다.

CC' 에서는 요셉과 아버지 그리고 형들과 요셉의 관계들이 비교된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대비되는 모습들이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말하고 있고, 반면에 형들은 그러한 보고로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작용해서 사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요셉을 미워하다 못해 서로가 언행이 불편할 정도이다. C에서는 요셉이 아버지에게 형들의 과실을 고한다. 여기서는 요셉이 고한 형들의 과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혹은 거짓으로 과실을 고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C'에서는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다(אנש). 이는 형들이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בהא)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 확실치 않지만, 사랑과 미움이 서로 비교 대조되면서 갈등이 싹트고 있다. 이 부분은 병행구조의 특징상 중심 주제를 이루는데,17) 미움과 사랑의 대응 관계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5. 본문의 메시지


우리는 구조분석의 목적에 따라서 본문의 구조와 의미와의 관계를 구조의 특징과 연결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에 나타난 구조의 흐름 속에서 야곱가정의 긴장관계가 나타난다. 인물병행구조의 특징에 따라 주제가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되는데, 이는 요셉과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한 요셉과 형들과의 관계가 사랑과 미움으로 인한 가정 안에서의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집안문제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가? 요셉의 고자질 때문인가? 아니면 아버지 야곱의 편애 때문인가? 과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37장 2절에서 ‘야곱 톨레돗’이 시작된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톨레돗의 의미가 후손 혹은 후예들에 대한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의미 안에서 보면 ‘야곱 톨레돗’은 야곱의 자녀들에 대한 삶을 다룬다.18) 앞에서 10번의 톨레돗 사건들 중에서 족장들에 대한 '톨레돗'들(11:27-25:11; 25:19-35:29)은 모두 후손들의 삶을 보여준다. 첫 번째 족장인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데라 톨레돗' (11:27-25:11)안에서 다루고 있다.19) 그와 관계된 사람들 특히 사라와 롯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과 후계자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는데, 이들 중 특히 이스마엘과 이삭 중 누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계자인지를 다루고 있다. ‘이삭 톨레돗’(25:19-35:29)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족장인 이삭과 그의 아내와 관계만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의 삶을 다루면서 특히 그들 자녀 중 누가 이삭의 후계가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다룬다. 이와 같이 ‘야곱 톨레돗’도 역시 유사하게 그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후계 구도에서 과연 누가 야곱을 이어서 후계자가 될 것이냐를 다루고 있다. 12명의 아들들 중에 장자인 르우벤이 후계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자녀인지에 대한 주제의 흐름이 구조와 맛 물려서 통일성 있게 전개되어진다.20) 이러한 후계자 구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요소로서의 자손과 무관하지는 않다.21)

왜 해필 요셉이며 또한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인가? 험프리스(Humphreys)는 이러한 점을 '계승모티프'(succession motif)로 풀어간다. “계승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요셉이야기 이전에 기록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가장어린 동생에 의해서 형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주제들에 대해서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한다.”22) 앞에서 전개된 이야기들에서 보면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는 결코 인간의 서열에 있지 않다. 이러한 신학적 주제가 인물 병행구조 속에서 내포되어 있는데, 야곱과 요셉과의 관계와 역할 속에서 강조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야곱의 톨레돗’에서는 매우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야곱의 자녀들에 관한 삶을 서술하겠다는 시작을 알리면서 열일곱 살의 요셉을 곧 바로 조명하는 것이 이러한 점을 잘 반영한다. 이것은 후계자 구도를 서론에서 강화시켜 보이려는 저자의 구조적 고안으로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아버지와 요셉과의 관계가 4번이나 주도적으로 나타남이 바로 이러한 ‘계승모티프’의 중요성을 구조의 의미로 부각시키려는 저자의 특별한 고안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험프리스(humphreys)는 저자가 요셉과 그의 가족들에서 "이러한 계승 관계를 보다 넓은 의미 안에서 경쟁 모티브(rivalry motif)로 더욱 강화시키려 하였다"고 말한다.23) 지금 본문의 상황은 여러 주제들 중 특히 약속의 주제를 다루는 전체구조의 서론으로서 야곱이 후계자 선정문제로 인해서 고민하는 가운데서 요셉을 주목하고 있다. 곧 형들과 요셉간의 장자권 경쟁관계를 구조적으로 소개하기 위함이다.24) 필즈(Fields)는 이러한 ‘전형적인 모티프’는 종종 이야기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25) 이러한 견해로 볼 때 본문의 인물병행구조는 후계자의 선정 개념인 ‘신앙경주 모티프’를 본문에 반영한 저자의 서론적 의도로 간주될 수 있다.26)

만일 그러하다면 야곱의 후계자 선정기준과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이전 족장들의 사건들 안에서 이러한 모티프는 이미 사용되어서 서술 되었다.27) 현재 야곱의 고민은 큰 아들 장자 르우벤, 둘째 시므온, 그리고 셋째 레위가 과연 자신을 이어서 장자권을 물러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스타인베르그(Naomi Steinberg)는 레아의 자녀들을 “가능성 있는 상속자들”(potential heirs)로 여기는 반면, 요셉을 “우선권이 있는 가능한 상속자”(potential primary heir)로 주장한다. 그러나 첩의 자식들에게서 낳은 네 명의 형제들은 상속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한다.28) 이런 점에서 장자권 계승에 대한 야곱 가정의 긴장감은 분명히 있다. 이들은 이미 앞 장들에서 아버지께 큰 누를 끼쳤다. 상속가능한 아들 중에서 첫 번째 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을 범하여서(35:22), 아버지가 이것을 마음에 두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을 장자 르우벤의 심정에서 읽을 수 있다(37:22).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다 못해 죽이려고 한다(37:19-20). 그리고 기다렸다가 요셉을 죽이는 계획을 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르우벤이 동생들에게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넣자고 만 하였다(37:21-22). 이러한 ‘대안적 계획’29)은 요셉을 살려서 아버지께 데려가서 공로자로 인정받아 과거의 죄를 사함받고 장자권을 되찾으려는 속셈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22b)는 계획 이었다.30)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의 문제는 창세기 34장에서 잘 보여준다. 세겜의 추장의 아들이 여동생 디나를 강간하여 괴로운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 살려준다고 해놓고 할례 받아 고통당하는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처 죽인 장본인들이다. 이에 35장에서 아버지 야곱은 크게 실망하면서 식구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가서 모두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삶의 모습들이 구체적으로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유언하는 본문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르우벤, 시므온, 그리고 레위 모두는 저주를 받게 된다(49:3-5). 이와같이 야곱가정의 장자권 문제 곧 계승문제가 전체주제들의 흐름 속에서 처음 시작하는 서론부분에서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야곱과 요셉과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한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랑을 편애라고 생각한다.31) 그래서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도 편애의 상징물로 본다.32) 이는 요셉이 형들과 함께 양을 치다가 되어진 형들의 잘못들을 아버지께 고자질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3) 그리고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원인이 노년에 낳은 아들로서 그가 사랑했던 라헬에 대한 애착심의 발로로 여긴다.34)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물론 이러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해도 그의 아버지가 그를 다른 자녀들 보다 더욱 사랑한 이유는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서도 그녀의 자녀인 요셉을 불쌍히 여기다 못해 채색옷을 요셉에게 지어 입혔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론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적인 관점에서 ‘신앙경주 모티프’로 보면, 야곱의 계승자 선택의 조건이 육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들어난다. 그렇다면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노년의 아들”(KJV)이기 때문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로벤탈(Lowenthal)은 이것을 늙어서 낳은 아들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셉의 나이는 다른 형제들과 비슷하여서, 자기 동생 베냐민과 나이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은 요셉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한다.35) 실제로 42:10절에 보면 형들이 애굽에 곡식 사러 갔다가 요셉의 시험에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며,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와 함께 남아있는 베냐민을 아버지가 노년에 낳은 아들(벤-저쿠님)이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베냐민에 대한 이러한 적용은 어느 정도 수용 할 수 있지만, 요셉에게는 로벤탈(Lowenthal)이 말한 대로 “어색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강규성은 그의 논문에서 ‘벤-저쿠님’을 “아주 특별한 아들임을 표현하는 용어”로 제안한다.36)

우리는 야곱의 후계자 선정 조건에 이러한 특별함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요셉이 특별한 아들이라면 무엇이 그러하다는 것일까? 요셉이 형들을 도우면서 함께 잘못을 저질러 놓고 아버지께 고자질 한 것일까? 아니면 형들이 잘못을 행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께 사랑받기 위해서 거짓으로 보고한 것인가?

웬엄(Wenham)은 요셉이 형들에 대한 보고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단어 디바(הבד-보고하다)는 부정적인 개념에서 자주 쓰인다고 하면서,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그의 형들에 대해서 거짓으로 보고” 했다고 강조한다.37) 결국 이 말은 요셉이 형들이 나뿐 짓도 안했는데 거짓말로 아버지에게 보고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형들의 잘못이 있다면 어떤 잘못인지 혹은 무엇을 말했는지는 본문 전체에 흐르는 내용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을 우선 37장 이후에 펼쳐지는 애굽에서의 요셉과 형제들간의 긴장 관계에서 보면, 형들이 요셉의 개인적인 잘못 혹은 형들과 함께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형들이 요셉의 애원에도 팔아버린 것을 죄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스파이로 몰려 감옥에서 지낸 것도 이 죄 값으로 본다(42:22). 특히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며 화해할 때도 언급하지 않는다(45:1-15). 본인이 죽기 전인 50장에서도 그러하다. 오히려 형들이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요셉이 해할까봐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요셉과 형제들의 애굽에서의 관계에서 보았을 때, 요셉이 형들이 잘못 하지 않았는데 거짓으로 아버지께 고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요셉이 장자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거짓보고를 했다면, 왜 하필이면 아버지의 첩의 자식들에게 했을까 하는 것이다. 만일 요셉이 그렇게 할 정도로 나쁜 아들이었다면, 첫 번째 부인인 레아의 여섯 자녀들을 모함해서 그들의 계승권을 박탈시키는 작전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38) 그러나 사실상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은 결코 장자권을 계승할 수 없는 신분들이다.39) 결과적으로 요셉이 구태여 첩의 아들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간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요셉의 인간성을 ‘신앙경주 모티프’와 인물구조와의 관계에서 풀어 볼 때 요셉이 아버지께 형들의 과실을 고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와 그들과의 관계를 나쁘게 하기 보다는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앞으로 이러한 의도를 애굽에서 요셉의 두 번의 시험에서도 나타나지만,40) 요셉은 형들로 깨닫게 하도록 하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열일곱 살의 요셉의 삶을 이야기 처음부터 그리고 가까이 조명하는 이유가 그런 점에 있다. 요셉이 미숙하여 천방지축 같은 아이임41)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죄를 멀리하고 의로운 자로 살아가는 요셉의 꿋꿋한 신앙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요셉의 로에(돌봄)의 역할에서 잘 나타난다. 양치고 있는 형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 하였다는 뜻이다. 로에(돌봄)의 역할을 하면서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어리석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노년에 열두 자녀들 중 후계자를 선정하는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요셉이 이러한 성실하고 의로운 아들임을 깨닫게 되고, 그를 다른 자녀들 보다 더욱 사랑할 뿐 아니라, 후계자로 삼아서 신앙의 축복을 그를 통하여 전수하려는 목적으로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이다.42)

아버지 야곱이 그래서 요셉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점을 ‘노년의 아들’(KJV)이라는 단어 ‘벤-저쿠님’과 ‘신앙경주모티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러한 의도를 더욱 자세하게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주석가들은 ‘늙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해석하는데 리브로스(Libros)의 방대한 히브리어 단어사전에서 저쿠님 (םינקז)을 “노년의 단계”(stage of old people)로 번역한다.43) 이 뜻은 ‘노년에 낳은 아들’(NIV) 이라기보다는 야곱이 노후의 삶의 단계에 살고 있음을 강조하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필슨(Phison)이 말하기를 탈굼 온켈로스 (Targum Ongelos)는 ‘저쿠님’을 늙은 나이로 보지 않고 ‘지혜자’, ‘재판관’, 혹은 성문에 않아 있는 ’장로‘로 사용하지만 이러한 뜻으로는 창세기에 사용되지는 않았다며, 야곱이 노년에 낳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한 미숙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44) 곧 나이 관점에서 보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저쿠님'을 황혼의 시기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야곱은 더욱 후계자를 원했고 요셉의 의로운 모습을 후계의 조건으로 삼은 것이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노년의 단계’ (벤-저쿠님)에 성실하고 또한 의롭게 사는 아들로서, 아버지가 그를 다른 자녀들 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고, 급기야 그에게 계승자의 표시로서 채색옷을 입혀주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45)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입힘에 대해서, 가레트(Garrett)는 야곱이 요셉에게 장자권을 수여하려는 의도임을 인정한다. 이는 장자인 르우벤이 아버지께 이미 큰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이어서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46) 만일 장자 르우벤에 대한 아버지의 미움이 그의 죄로 인한 것과 르우벤의 어머니 레아를 야곱이 싫어하기 때문이라면, 역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요셉의 성실하고 의로운 삶과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므로 요셉을 후계자로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47) 이런 점에서는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랑과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은 후계자의 선정 기준이 영적인 면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육적인 면도 더불어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48) 창세기 49장에서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자녀들의 삶의 기준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하는 그의 마지막 유언 속에서 이 사실을 불 수 있다. 또한 채색옷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49) 후계자 선정에 대한 정당한 권위를 상징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종교적-사회적 요인들 안에서도 잘 나타난다.50)



결론

이와 같이 우리는 ‘신앙경주 모티프‘가 인물구조 안에 나타난 아버지와 아들관계 안에서 순수한 영육간의 사랑관계를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의 영적인 면의 아름다움과 육적인 면의 사랑스런 아내의 아들에 대한 양면이 야곱의 후계자 선정 구도의 요소로 작용했음을 구조적 관점에서 찾아보았다. 이런 점에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서로의 언사가 불편하게 되고, 또한 그 가정에 평화가 상실 되어 가는 것은, 야곱의 육적인 편애 때문이라기보다, 요셉의 형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아들 요셉을 사랑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물병행구조의 특징상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과 미움의 갈등관계를 주목하게 한 것이다. “그 형들이 아버지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בהא)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אנש)“하였다(37:4). 구조의 특징상 결국 이것은 믿음 없는 요셉의 형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지, 요셉의 고자질로 인한 혹은 거짓으로 형들의 잘못을 보고해서 얻어낸 아버지의 편애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분석에서 얻은 결론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사랑한 것은 편애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아들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는 역할자로 강조되고 있고, 또한 요셉은 평화를 깨는 문제아가 아니라 야곱의 황혼의 시기에 의로운 아들로서 역할을 한다. 결국 불신에서 나온 형들의 불평이 아버지와 가족 간의 긴장을 조장하고 있고, 또한 그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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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3. 10:46 Daily Bread

출처 : http://blog.daum.net/haj4062/15718109

궁금했다. ‘신학생이 가장 만나고 싶은 인물’을 꼽을 때면 늘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소문도 꽤 들었다. 그래서 성탄을 앞두고 22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를 찾았다. 거기서 이재철(60) 담임목사를 만났다.

그가 걸어온 길은 이채롭다. 1971년 2월 한국외국어대 프랑스어학과를 졸업한 그는 유대인 종합상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독립해 항공운송 사업을 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중동행 근로자를 실은 파키스탄 비행기가 한 번 뜰 때마다 1200만 원씩 떨어졌다. 그런 비행기가 1주일에 두세 번 떴다. 서울 반포의 40평 아파트가 80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큰돈을 벌었고, 막 살았고, 부도위기도 겪고, 재기를 하던 끝에 그는 서른 일곱 늦은 나이로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목사가 됐다.

서울에서 교회(주님의교회)를 개척했다. 출석 교인 수가 3000명을 훌쩍 넘었지만 10년 만에 사임했다. “나처럼 순결치 못한 사람이 이 땅에 새로운 교회를 세울 자격이 있을까. 5년은 짧고 15년은 길다. 10년만 하겠다”는 처음 약속을 스스로 지킨 것이다. 이후 스위스로 떠났다. 거기서 한인교회를 섬기다가 다시 돌아왔다.

100주년기념교회의 설교에는 ‘영성의 울림’이 있다. 그걸 듣고자 전주에서 서울로 매주 올라오는 교인도 있다. 설교 때는 교회의 예배당과 지하실, 교육관이 5000여 명으로 가득 찬다. 그리스도교 영성에 목마른 이들이다. 이 목사에게 ‘성탄’과 ‘예수 오심’에 대해 물었다.

-성탄절이다. ‘예수 오심’의 의미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말씀’이라고 하면 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우리나라 초기 한글성경에는 ‘태초에 도(道)가 유(有)하니라’고 돼있다. 그 말이 딱 맞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길(道)을 주신 거다.”

-어떤 길인가.

“땅에서 하늘로, 찰나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자아의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른 종교에도 도(道)가 있다. 길이 있다.

“차이가 있다. 다른 종교는 사람이 그 길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선 신이 직접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래서 성탄절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살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예수님께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장 24절)고 하셨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그 길을 가려고 한다. 그런데 대전제가 있다. 바로 ‘자기부인’이다. 자기부인 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자기부인이란 뭔가.

“신앙과 미신의 차이가 뭔가. 미신은 내가 가진 재물과 재능으로 신을 어르고 달래서 내 뜻을 이루는 거다. 자기강화를 위한 거다. 신앙은 다르다. 신이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대신 내가 신에 의해 다루어지는 거다. 그걸 위해선 받아들임과 자기부인이 필요한 거다.”

-예를 들어보자. 입시생이 있다고 치자.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합격을 위해 하나님께 매일 기도도 했다. 그런데 입시에 실패했다. 실망이 컸다. 그런 사람에게 ‘받아들임’과 ‘자기부인’은 어떤 건가.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다. 하나님이란 허상을 믿은 거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니 이렇게 되리라’하는 건 자기 자신을 믿는 거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너를 위해서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요즘 사람은 손으로는 우상을 빚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우상을 빚는다. ‘내가 하는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돼.’ 그게 바로 우상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오히려 어떤 상황과 결과가 오더라도 그걸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받아들임이 왜 중요한가.

“나의 기대와 전혀 다른 상황과 결과가 올 수도 있다. 그걸 수용할 때 ‘내가 세운 우상’이 깨져나간다. 그게 자기부인이다. 자기부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세워놓은 우상을 끊임없이 깨는 과정이다. 애벌레가 고치를 붙들고 있으면 나비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 받아들임은 버려야 할 때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받아들임을 두려워한다. 자기부인을 무서워한다. 모든 걸 잃을까 겁을 낸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영적인 삶에선 버릴수록 얻는 거다. 받아들임과 자기부인은 다시 채워짐을 위한 과정이다. 마치 우리 몸의 세포가 신진대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버려지는 것과 같다. 버려져야 새 세포가 생기는 거다.”

-예수님이 보이신 받아들임과 자기부인은 어떤 건가.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되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가능하면 이 잔이 물러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도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끌려가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육신을 부인했다. 그게 예수님의 자기부인이다. 그런 삶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거다. 그걸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신 거다.”

-‘말로 하는 기독교인’도 있고, ‘생명을 체험한 기독교인’도 있다.

“말이 먼저 올 수도, 체험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체험도 일회성에 그치면 곤란하다. 신앙은 점이 아니라 선이어야 한다. 점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연결이 안 되면 선이 되지 못한다. 주일날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우리의 삶 속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점이 되고 만다. 예배당 안의 그리스도교로 끝나고 만다.”

-마지막으로 어떤 마음으로 성탄을 맞아야 하나.

“태초에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짓지 않고, 목사를 짓지 않고, 사장이나 교수를 짓지 않으셨다. 사람을 지으셨다. 그런데 죄성에 빠진 사람이 자기 감옥에 갇혀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길을 일러주셨다. 그 길을 가는 건 우리의 몫이다. 그래서 받아들임과 자기부인에 대한 결단이 필요하다.”

<출처 : 중앙일보(대담/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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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3. 10:40 Daily Bread

출처 : http://blog.daum.net/calebjang/1840

이재철목사의 회심


1984년 어느날,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다가 귀가한 것은 새벽 2시경 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는 나쁜 습관이 있었는데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집에 와서는 반드시 밥을 먹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집사람을 깨워서 차려주는 밥을 먹곤 하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집사람을 깨우지 않았습니다. 방에 들어가자 아내가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머리맡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아 성경을 읽으며 저를 기다리다 잠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엎드린 아내의 얼굴 밑에 하얀 노트 한 권이 깔려 있었습니다. 갑짜기 그 노트가 보고 싶어 살며시 꺼내 보았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서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사랑 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시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 도와 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노트는 여기저기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저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고, 귀에서는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습니다. 저는 노트를 내려놓고 서재로 들어가 소리를 죽여 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자신의 적나나한 실상을 똑바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오직 저 한사람을 믿고 자신의 인생을 제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가 나로 인하여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도데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아내가 죽음의 방법에 골몰하고 있을 때 나는 도데체 어디에 있었던가? 아내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나를 웃음으로 대할 때,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함으로 아내를 대한 적이 있었던가? 제 마음속에서 마구 솟구쳐 오르는 질문들에 대하여 저는 한 마디의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죽음을 생각하던 그시간에 저는 환락가의 현장에서 오직 쾌락만을 탐닉하던 한심한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야말로 이상적인 배우자, 멋진 남편, 괜찮은 남자, 능력있는 청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라 착각하며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저는 제 아내가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남편 같지 않은 남편 탓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울었을까? 죽음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내려누르는 절망감에 몸서리는 얼머나 쳤을까? 아내가 당해야만 했을 고통과 아픔이 고스란이 전이되어 제 마음을 난도질했기에 저는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 가셨기에 제가 호주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새벽마다 교회에서 이 자식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얼마나 울며 기도 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이 자기 아내를 죽음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정도로 타락한 아들이 되었으니 어머님이 느꼈을 배신감과 절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제 자신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어머님의 태속에서 생명을 받은 이래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은혜를 베프시고 필요한 은총을 필요할 때마다 덧입혀 주셨음에도, 저는 마치 가롯 유다처럼 36년 동안 주님께 단지 배신으로만 보답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삶을 살고 있을까?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의 영혼은 악취가 진동하는, 갈기갈기 찢어진 더러운 걸레조각처럼 여겨졌습니다. 주님께 버림받은 영혼, 저주받은 영혼이라는 생각 때문에 저는 가슴을 치고 몸서리를 치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전처럼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처참하고 참담한 제 실상을 알았기에, 제 자신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기에, 남은 것이라곤 절망밖에 없기에, 저는 낮고 낮은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등 뒤에서부터 저를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매우 포근했습니다. 제가 우는 소리에 잠이 깬 아내가 들어왔나 보다 하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착각이었나 보다하고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재차 포근히 안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포근함이 처음보다 더 강했습니다. 뒤를 돌아 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 번째로 눈을 감았을 때 제 마음속 깊은곳에서 세미한 음성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재철아, 나는 너를 한 번도 버린적이 없단다." 저는 깜짝 놀랐고, 그 음성은 계속 되었습니다. "네가 나를 버리던 그 순간에도 나는 줄곧 너와 함께 있었단다. 앞으로도 나는 영원토록 너와 함께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가장 처참한 절망과 비통속에서 몸부림치는 그 순간, 주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저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사랑으로 저를 품고 계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제가 의식치 못할 때에도 언제나 제 곁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 자신의 능력을 신봉하는 오만에 빠져 있을 때 성령님께서 제 주인이 되실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참한 제 실상을 발견하고 절망 속에서 낮고 낮은 마음으로 주님이 긍휼하심을 간구드릴 때, 성령님께서는 제 마음속에 들어오시어 제 주인이 되사 저를 지배하기 시작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저는 이상한 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즐기던 술과 담배가 냄새마져 역겨워진 것도 그 날 부터입니다.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트럼프와 화투가 보기도 싫어진 것도 그 날부터입니다.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사랑하던 가족들이 저더러 변했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도 그 날부터이고, 제 가정과 저의 일터가 진리 위에서 바로 서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날부터였습니다. 그로부터 만 8년 3개월이 지난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 목사로 서 있습니다.

제가 제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드리는 것은, 변화된 제 모습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고, 제가 제 자신의 참담한 실상을 바로 깨달아 주님 앞에 굴복하던 그 순간부터 성령님께서 제 인생의 주인이 되셨음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은 누구 곁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아무리 내곁에 계셔도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마음속엔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선데이 크리스챤' 이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목사다운 목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오직 성령님의 지배 아래 있을 때만 가능함을 밝혀 드립니다. 제가 이만하면 되었다고 자만한 마음으로 자기 착각에 빠지는 즉시, 제 마음이 온갖 더럽고 추한 생각으로 가득 차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음을 고백 드립니다. 만약 제가 성령님의 지배를 떠나 옛날처럼 자신을 섬기는 오만한 자리로 되돌아 간다면, 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이중인격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형편없는 인간임을 고백 드립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은혜를 베플어 주실 때 자신의 실상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착각에서 벗어나며 자기 도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 하시어 나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을 섬기는 오만한 자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은 강권적인 방법으로 나를 꺽으시고 나의 추하고 연약한 실상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십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주님과 바르고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자기를 신봉하는 오만한 자리를 포기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소망합니다. 헛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기 위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분의 사랑 앞에 온전히 굴복 하십시오. 그 순간 성령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어, 진리 안에서 여러분의 생을 전혀 새롭게 빚어 주실 것입니다..

posted by johnworld
2010. 3. 20. 23:25 Daily Bread

출처 : http://www.iccm.net/bbs/board.php?bo_table=m05s03&wr_id=9&page=6

방 선기 목사. 직장사역연구소 소장

요한복음을 묵상하다가 6:27에서 눈이 머물렀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의 인치신 자니라" 얼핏 보면 경제적인 필요를 위해서 너무 애쓰지 말고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 일하라는 것 같아서 직장에서 일하는 크리스쳔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돈 버는 일은 다 그만두고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서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은 바로 이전에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후에 이들에게 "썩을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얼마든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고 하실 수 있었는데 그러시지 않고 그들이 현실적으로 필요한 떡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사람이 사는데 썩을 양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경제활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강조하신 것 뿐입니다.

이 말씀만 가지고 직업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후3:12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공연히 할 일이 없어서 교회에서 문제나 일으키지 말고 주어진 시간에 열심히 일해서 경제적인 책임을 지라고 한 것입니다.
흔히 교회와 관련된 일은 영적인 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일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런 일은 그만두고 돈벌이 하라는 권면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정반대가 되는 것 같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경제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을 자신도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일해서 벌었다고 했습니다.(살후3:8)

이 두 말씀을 함께 읽으면 주님의 뜻을 훨씬 균형 있게 알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쳔들에게 경제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는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목적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한데 바로 이것을 주시는 우리 주님을 위해서 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반드시 종교적인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며(요6:29)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는 사람은 현재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하는게 아니라 현재 하고 있는 그 일에서 주인으로 모시며 주님의 뜻대로 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직업 관은 오해 되기 쉬운 성경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데서 발견이 됩니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