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New life !
johnworld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05. 5. 20. 13:28 Daily Bread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그 목적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 "왜"를 알면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알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지 못하고 늘 겉핥기 식이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에서 큰 일을 기대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기대한 것 이상을 경험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가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장래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정도만을 기대한다면 신앙 생활이 좌절로 점철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변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나 지금 사람들을 세상에 두시는 이유는 같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26). 간단한 이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역할이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닌, 영이시며,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한복음 4:24, 1:18)

그러면 "형상" 또는 "모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자기 자신과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그것을 드러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그러내야 하고, 우리의 행동 또한 하나님의 행동을 닮고 드러내야 한다. 이것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요 계획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그가 하나님께서 지은신 목적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매일의 일상적인 일은 어떻게 처리하는가?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는가? 고용주는 고용인을 어떻게 대우하는가? 고용인은 고용주를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일을 하는가? 자기 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이웃들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안다고 하듯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모든 말과 태도와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나타냄으로써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볼 때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버렸다는 것이 분명하다. 시기, 질투, 탐심, 사랑없음, 교만, 편견, 자기 중심적인 생각... 왜 인간은 그토록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까?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그렇게 타락했을까? 인간의 삶과 행동은 왜 그렇게도 한결같이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 뭔가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인간의 목적과 역할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어떤 요소를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요소가 상실되고 없는 것이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27 Daily Bread

성경에 나오는 슬픈 사건들 가운데 몇몇은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났다. 때로는 그들의 헌신의 깊이가 깊을수록 이야기는 더 슬프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 두 가지를 들어 보겠다.

아브라함이 75세의 고령이고, 그의 아내 사라는 그보다 열 살 아래인 65세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다.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결혼하여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한 명의 자녀도 얻지 못했고, 이 면에 대해서 그들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약속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은 그 약속을 믿고 부푼 꿈을 안고 기쁨 가운데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아브라함은 85세, 사라는 75세가 되었으나, 여전히 자녀가 없었다. 참으로 실망이 될 뿐 아니라 당황도 되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창세기 16장을 보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들의 대화 내용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 하갈을 취해 아이를 낳기로 한 것이다. 당시 문화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관습을 공인해 주신 적은 없었지만, 당시에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관습이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을 취하여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었다.

아브라함의 동기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시기 전까지는 자녀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귀에 쟁쟁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자기 노력으로 일환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갈을 통하여 자녀를 낳으면 어떨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게 되었던 것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인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다시 14년이 지난 후에야 사라 자신이 잉태하여 이삭을 낳았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지 무려 25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하실 때 아식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창 22:2)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인정치 않으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진지하게 임한다 하더라도 그 분을 위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을 하나님은 인정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일을 위한 통로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지, 하나님을 대신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이스마엘의 출생은 아브라함이 구상하고 계획을 짜고 행한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로만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들을 대면할 때 그것들을이루는 수단은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렇게 마음이 평안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말이 우리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행하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빌립보서 2:13)을 토대로 하고 있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26 Daily Bread

그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신앙 생활의 원천이요 중심이라기보다는, 다만 "후원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분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게 해주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어떤 것들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승차권, 증명서, 그리고 카탈로그였다.

승차권에는 "천국행 편도 승차권"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이 천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물 가운데 필수적인 것임을 알았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시인했고, 기꺼이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로 결심했으며,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에, 나는 영생의 선물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이며, 나를 구원해 주신 목적이며, 그리스도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믿었다.

증명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김종대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을 증명함. 하나님" 내가 승차권을 받기 위해서는 이 증명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증명서는 잉크 대신 피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7). 나는 이 구원의 선물에 대해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해주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위한 삶"은 어려웠고, 세 번째인 카탈로그가 내게 주어진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탈로그란 성경이었다. 나는 천국을 슈퍼마켓과 같은 곳으로 생각했는데, 그 슈퍼마켓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종업원이시고, 진열대에는 영적인 상품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으로 상상했다.

그 상품들을 이용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슈퍼마켓의 상품 카탈로그를 뒤적이다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면 기도로 주문을 한다. 그러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내가 주문한 상품을 배달해주셨다.

예를 들어, 카탈로그 즉 성경을 읽다가 "사랑"을 원하게 되었다고 하면, 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달라고 기도로 주문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사랑을 내게 배달해 주셨다. 그러면 나는 이 사랑을 먹고 얼마 동안은 효과가 나타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다.

또 성경을 읽다가 "기쁨"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나는 "기쁨"을 달라고 기도록 하나님께 주문했다. 그러면 성령께서 "기쁨" 한 병을 내게 갖다 주셨다. 나는 병을 열어 "기쁨"을 몸에 바르고, 얼마 동안은 기쁘게 지냈다.

내게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능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로 요청을 하면, 성령께서 "능력"을 하나 가져 오고, 나는 그것을 먹고 얼마간은 능력있게 살았다.

물론 그 어느 것도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슈퍼마켓 주인이신 하나님께 계속 주문을 해야 했다. 그것은 피곤한 일이었고, 언제나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영적 상품들을 내게 배달해 주고 계시는 것인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내게 주고 계셨다. 내가 요청했던 "모든 것들"은 내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안에 다 들어 있었다. 내 속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 삶은 이 땅에 있는 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었다(갈2:20). 그것은 내 속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며, 성령께서는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시고,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재생산하시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는 것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내가" 뭔가를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나는 나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성공했을 때는 자기 만족과 교만에 빠졌고, 실패했을 때는 자기 비하와 절망에 빠졌던 것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고 말했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25 Daily Bread

물 묻은 손으로 비누를 쥐려고 애써 본 적이 있다. 쥐었다 싶으면 어느새 다시 빠져 나가 버린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삶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왔다. 삶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경험하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직접 체험하는, 기쁨이 넘치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목적을 알게 되고, 또한 틀에 박히고 무의미해 보이기만 한 삶에 참 의미와 만족을 주는,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새롭게 배울 때는 흥분을 느끼기도 한다. 때로는 확신 있고 생동감 넘치는 견고한 삶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붙잡았다 싶으면 어느새 빠져 나가고, 그런 삶에 대한 기억과 함께 좌절감만 남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실을 바라보게 되면, 생동감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앞으로도 결코 상태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첫 몇 해 동안의 나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어느 형제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던 95년 8월 30일 오후였다. 나는 거기에 응답했다. 나는 어릴 적 부터 교회에 다녔고, 또한 복음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는지에 대한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 그 이후 나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의미하는바 모든 것을 삶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데는 몇 녗이 더 걸리긴 했지만, 내가 구원받은 것은 분명했다. 내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사랑이 자리잡게 되었고,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새로운 열망과, 사람들과 일상적인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발단이었다. 하나님을 위해 살며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새로운 열망은 현재의 나의 삶이 내가 추구하는 이상과는 너무 차이가 있다는 확연히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기쁨과 열정은 이내 좌절감으로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시시때때로 이런 것을 느낀다. 나의 신앙은 삶에서 아무 힘이 없었으며, 나는 실패자였다. 그러나 나는 용기가 없어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그 당시 내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빌립보서 2:3 말씀을 알고 있었더라면, 나의 문제를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말씀을 알고 있지도, 그러한 진리를 이해하고 있지도 못했다. 나는 내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소원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원을 위해 행하는 일에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관계하신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연약하기만 한 내 자신이 나의 행동을 그 소원과 일치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올바른 것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과 실제 행동이 차이가 나면 날수록 나는 더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경험했다.

자연히, 그리스도께 더 큰 "헌신"을 하도록 도전하는 설교를 들을 때 마다 나의 무력감은 더했다.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기도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신선한 열정이 되살아나고 발걸음은 힘이 있었으며, 이번에는 뭔가 이루어 보겠다는 꿈에 부풀곤 했다. 그러나 며칠이 못 되어 나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다시 헌신에 관한 도전을 받고 내 자신을 하나님께 재헌신하곤 했다. 이런 과정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이지만, 그때마다 매우 진지한 태도로 임했었다. 종종 '이젠 됐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쥐었다 싶으면 빠져 나가는 미끄러운 비누처럼, 그 새로운 경험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너무 높은 수준이었는가?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수준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부지런히 달리도록 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높은 수준을 제시하신 것은 아닐까? 따라서 그 수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혹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는 마치 당나귀 앞에 당근을 매달아 놓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멋있는 약속을 제시해 놓고 우리가 열심히 그것을 향해 나아가도 결코 도달할 수 없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놀리시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새로운 진리 하나를 깨달음으로써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거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었다. 만일 누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물었다면, 나는 즉시 "제 속에 거하십니다"라고 확신있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게 있어서 예수님은 나를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여 천국으로 향하는 길로 이끄신 후에는 아무 적극적인 역할도 수행하시지 않는 "잠자는 파트너"와 다름이 없었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