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New life !
johnworld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0. 9. 10. 22:47 스크랩

예수의 정치

(The politics of Jesus)

- 평화의 신학 -

(the theology of shalom)

이문식 (산울교회 목사)

Ⅰ. 서론 - 문제제기

성경에 나타난 정치의 원리가 가장 극명하고 성숙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이다.

구약과 신약 사이를 '약속-성취'의 관계로 보는 구속사적 관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예수님 당시의 사회 정치적 여건 속에서 '예수와 그 제자들의 행로' 또한 자의든 타의든 정치적으로 해석되었으며 예수의 생애 또한 선동죄, 반로마 납세 거부죄(눅 23장)로 기소되어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처형 당하는 정치범적 최후를 당했다는 보편사적 관점에서 볼때에도, 예수님의 정치사상이야말로 바로 성경에 나타난 정치 원리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를 살핌으로써 하나님의 성육신적 자기계시에 나타난 정치의 원리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이 소고의 목적이다.

Ⅱ. 예수 당시의 사회 정치적 상황

예수님 당시의 유대 팔레스타인 사회가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는 달리 너무나도 독특한 종교, 사회 복합적 신정공동체였으므로, 그 분석에 있어서 그 종교공동체적 특징만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분석하게 되면,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적용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의 상황을 분석함에 있어서 유비 (analogy) 가능한 분석 방법을 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주로 당시 유대 사회의 구성 요소인 각 계층의 집단들이 주로 어떠한 사회, 정치, 경제적 여건에 의하여 유대 사회의 정치 메카니즘을 형성케 되었는지를

- 특히, 로마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하여 -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갈릴리 지역의 정치 권력의 배열은 대 헤롯의 사 후에 행해진 권력의 재편성에 의한 결과였다. 대 헤롯은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될 인물이나 집단을 철저히 제거, 견제하였는데, 먼저 세습직이었던 대제사장직을 임명직으로 바꾸었다. 헤롯은 그 과정에서 대제사장 힐카누스를 죽임으로써 세습 권한의 유일한 계승를 끊어버렸고, 그 이후는 그가 직접 임명하였을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을 핍박하여 의원들 다수를 죽이는 등 유대 토착세력을 강하게 억압하였다. 따라서 대 헤롯의 사후 대제사장 및 토착귀족 등의 사두개파는 헤롯 일가가 계속 유대를 통치하기보다는 토착세력에 관용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이 관습이었던 로마의 직접 통치를 더 선호하게 되어, 대표단을 비밀리에 로마로 파송하여 직접통치를 호소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산헤드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지배집단이며, 막대한 성전세를 수납하는 권한을 통해 당시 유대 부유층의 대다수를 구성했던 성전귀족인 사두개인들의 정치 성향은 친로마적 경향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당시의 성전은 헤롯이 자기의 유대 통치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대 유대인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지은 것으로 그 건축 동기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후 로마의 총독들은 성전 헌금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이의 수입관리도 사두개파의 대제사장들이 관리케 함으로서 이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였다. 당시 통상 인구2-3만명으로 추산되는 예루살렘의 인구를 염두해 둘 때 매년 약 10여만 명씩 성전에 순례차 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바친 성전세나 희생제물 매매 수입,환전 수입 등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따라서 성전은 로마의 지배 와 사두개파와 같은 친로마적 기득권 계층의 억압적 지배를 보장해 주는 ‘강도의 굴혈’이 된 것이다. 특히,대제사장의 임명권이 로마 총독들 의 손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산헤드린과 사두개파는 로마 식민지 지배의 전위역활을 충실히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대제사장의 임기중 로마 총독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면 즉시 경질되고 다른 사람이 임명되곤 했다. 또 대제사장들은 여러 번 로마의 지배에 맞서지 말도록 유대 민중들에게 냉정한 호소를 했었으며 이들의 친로마 경향이 얼마나 뚜렸했는지 AD 68년에 열심당원이 예루살렘을 장악했을 때 당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살해됐으며 집은 불탔고, 다른 대제사장들은 도망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그 종교사상에 있어서도 거의 헬라화되어 부활 등을 부인하는 등 그레코로만 문명에 대한 문화적 종속상태도 심화되어 있었다. 동시에 대내적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채무관계로 얽어 매어 가혹한 수탈과 착취를 자행하였는데, AD 66년 열심당이 사두개파 대제사장들이 채권증서를 보관해 두었던 공문보관소를 방화한 사건에서도 이들에 대한 일반 민중의 증오를 엿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정치, 문화적으로 로마에 예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 확보하기 위하여 유대 사회 내의 모순된 계층 분화를 심화시킨 착취 세력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들의 성전 체제를 ‘강도의 굴혈’,‘장사치의 소굴’로 파악한 것은 너무도 정확한 사회 정치적 통찰력이었다. 이에 반하여, 당시의 신학자들인 서기관들의 절대 다수와 일부 사제들과 레위인들도 지도자 그룹을 형성하고, 구전 전승의 실천적인 옹호자로서 당시의 중간층인 상인, 농부 등의 자영 평민들로 구성된 바리새파는 숫자상으로는 아주 적은 폐쇄적인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민중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하여 강력한 반사두개적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바리새파는 주전 2세기에 사두개파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는데, 이들은 귀족들에 대해 다수의 유대인들의 정서를 대변하였으며, 경건의 모범을 보임으로서 사두개파와의 대내적 투쟁에서 계속 승리하였다.

이들의 숫자는 헤롯왕 때 약 6,000명이었는데 이들은 당시 대다수의 가난한 유대인들과 소작민, 노예로 굴러떨어져 율법을 학습할 수 없었 던 땅의 사람들(암하레쯔;amhaaretz)을 자신들로부터 엄격히 구분했음 에도 불구하고 존경심을 상실하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배타성에 소외와 증오도 가졌지만 사두개파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 며, 또 이들의 반사두개 노선 때문에 대체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들은 산헤드린에서 점점 더 그 영향력을 키워나가 드디어 유대 전쟁 직전에는 완전히 산헤드린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 전쟁 이전까지는 대내적으로 반사두개적 입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삼갔으며 로마의 지배자들이나 지배 구조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였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헤롯의 집권을 반대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침묵하였으며 헤롯 사후의 집권분쟁 중에도 그들은 관여하지 않았다.이 점이 그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그들은 로마 총독이 율법을 어기는 종교적 행위를 했을 때에만 공격적으로 맞서고 저항했으며 로마의 정치적 질서와 지배 자체에는 대체로 협조적이있다. 즉 이들은 정교분리적 경건주의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열심당적 열기에 동조한 소장 바리새파(특히 샴마이학파)의 대두로 인하여 유대 전쟁까지 점점 저항세력화 되어갔다. 친로마적인 사두개파나 중립적인 바리새파에 반하여 철저히 반로마적인 유대 해방운동 그룹이 있었는데 소위 '열심당'(the zealots)이다. 이들은 “율법”에 대한 순수한 열광을 이념으로 하여 구약의 인물 엘리야와 비느하스의 모델에 따라 우상숭배하는 자를 죽이고 이방인을 거룩한 땅에서 내 쫓는 종말론적 성전(Holy War)을 수행하는 무장투쟁 그룹이었다. 이들의 신앙고백의 정식(forimula)은 “이교도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은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주(Lord)나 왕(King)이라는 칭호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방인인 황제를 “주" (Lord)라고 부르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였으며 군대의 수적 열세를 무릅쓰고 게릴라전으로 성전을 수행하곤 했다. 특히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열심당원은 꽤 활발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AD 5년의 시리 아 총독 구레네에 의한 조세 목적의 인구조사를 '로마에의 예속화 조짐'으로 여겨 가말라의 유다(Judas of Gamara)는 바리새파 중 과격 순수파인 샴마이파의 지도자 자독(R. Zadok)의 협력을 받아, AD 6년 구레네 총독의 세금 결정시에 갈릴리 지방에서 첫 민중 봉기를 시도하였다. 유다는 첫 봉기 후 로마 진압군에 의해 좌절 처형되나 그의 세 아들들(James, Simon, Menahhem)은 AD 67년까지 투쟁하였으며 이후 젤롯 해방운동은 계속 확대 점증되는 과정에 있었다. 이들은 유대 독립전선이라는 정치적 목표 이외에도 유대사회 내부의 모순을 제거하려는 대대적 투쟁을 병행하였다. AD 67년 열심당 지도자 므나헴은 세무 증서를 보관하고 있던 예루살렘 공문서 보관소에 불을 질렀고, AD 69년 시몬 기오라(Simon bar Giora)는 유대 노예의 전면 해방을 선포하는 등 이들은 대내적인 사회 개혁의 프로그램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 전쟁 직전 여러 파벌로 갈라져 치열한 내전과 불화에 빠졌다가 결국 티투스(Titus) 휘하의 로마군에 의해 패퇴되어 맛사다 요새에서 영웅적인 최후를 맞았다. 또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종말적인 최후의 메시야 성전에만 참여하고 그 전까지는 격리된 공동체 생활을 할 것을 주장하던 쿰란의 엣세네파가 있었다. 그러나 맛사다의 유대 장군들 가운데에는 엣세네파 출신의 장군들도 끼어 있었으므로 미루어보아 이들도 결국 맛사다의 반로마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그 종말을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종파에 속한 사람들의 숫자는 사실 유대 전체 인구 50만에 비추어 보면 아주 소수이다. 요세푸스는 바리새파가 약 6000명, 엣센파가 4000명,대제사장과 사두개 평신도는 이들보다 더 소수였으며, 열심당원도 초기 10년에는 소수였다는 시사를 한다.

따라서 좀더 포괄적인 사회정치적 배경을 알려면 유대인 일반 대중의 형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유대인 자산 계층(대상인,토지 소유자, 세금 청부업자, 고리대금업자, 대제사장, 세속 귀족들, 헤롯당 파)이나 중간 계층(소상인,소토지 소유자,수공업자,평사제층)에 속하지 않는 빈민층으로써 노예, 날품팔이, 소작농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땅의 사람들’(amhaaretz)로 불리는 소외계층의 대부분은 참혹한 빈곤 상태였으며, 로마의 중과세와 지배, 중간 계층의 억압구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채무문서’를 태우고 ‘노예해방’을 선언하며 ‘부유한 자’들에게 강도질하여 군자금을 노획하는 열심당원들에게 선동되기 쉬웠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실,이들은 열심당의 혁명에 깊이 동요되고 가담하게 된다. 한마디로, 예수님 공생애 시기의 정치 상황은 점점 유대사회의 계층간의 불화와 반목이 심화되고 종파간의 갈등이 대립되며,반로마 유대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성숙되어가던 시기였던 것이다.

Ⅲ. 예수의 정치적 태도의 특징

18C의 라이마루스(H.S. Rimarus) 이후 1930년대의 아이슬러 (R. Eisler), 그리고 최근 1967년의 브랜든(S. G. F. Brandon)등의 학자들은 예수와 열심당원 간의 유사성을 논설하며 예수는 열심당 운동의 이상과 목표에 동조한 유사 열심당적 혁명가(parazealot revolutionary)로 파악한다. Brandon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데 있어서 주로 의지하는 본문들은 ‘납세 문서’(막 12:13-17), ‘내가 세상에...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검 없는 자는 옷을 팔아 살지어다’(눅 22:35-38)등의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의 진정한 의미는 보다 더 자세히 논증되어야 하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브랜든은 자기 입장과 모순되는 구절들에는 의도적으로 주목하지 않았으며 자기 주장을 지지해주는 듯이 보이는 구절들만 편파적으로 채용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브랜든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즉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반열심당적인 말씀과 행위들은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 순응하는 종교로 제시하기 위하여 후대에 성경 기자들이 예수를 ‘평화의 그리스도의 상’(the image of pacific Christ)으로 투사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비평학의 판단에 의하면 브랜든이 후대의 창조로 여겨 기초자료서의 가치를 극구 부인했던 반열심당적 구절들의 대부분은 소위 ‘Q자료’에 속하는 원초적인 구절로서 예수님 자신의 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하였다. 따라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신학자간에 신빙성 있는 기초 본문으로 공인된 구절들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예수의 정치적 태도와 그 특징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게 되었다.

1. 예수 정치의 종말론적 보편성

예수는 열심당과 같은 유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사해동포적 보편주의자로 보게 하는 구절들이 훨씬 많이 있다. Q자료의 가장 오래된 구전 전승(Sayings tradition)으로 비평학자들이 분류한 눅 6:27-36의 구절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누구인가? 마태의 특수 자료에 속하는 마 5:41은 “또 누구든지 너희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라고 말함으로써 당시 로마제국에 의해 사용되어진 강제징용법을 배경으로 하여 원수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다. 따라서 예수의 원수 카테고리에는 분명히 로마제국이 들어 있다. 이러한 예수의 선언은 민족적이고 지상적인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열심당의 태도와는 아주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종파와 분파, 계급, 인종, 민족, 국가간의 반목과 대립을 초월하며, 그러한 대립 자체가 원초적으로 소멸되는 급진적인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사마리아인과 이방인들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종교적 헌신으로까지 찬양하던 열심당원들에게 예수 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 사랑의 실천자로 제시하는 비유(눅10:30-37)는 아주 편협한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또 로마의 개인 세리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시는 모습(마 11:18,눅 7:33)이나 세리 마태를 제자 공동체에 편입시키는 모습도 열심당들의 생각엔 조국에 대한 배신적 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친로마적인 인물로 교정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는 로마 제국과 기존 지배체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먼저, 예수는 당시 갈릴리 베뢰아 지방의 영주 헤롯 안디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정보를 접하자 ‘그 여우에게 이르되’(눅 13:31-33)라고 말함으로써 헤롯의 위협에 타협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여우’라고 경멸하였다. 예수는 로마의 지배자에 대하여 존경 혹은 침묵은 커녕 분명하게 비판적 자세를 보이신 것이다. 이것은 납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마 12:15-23, 막 12:13-17, 눅 20:20-26). 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는 예수의 대립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눅 20:23-25의 세 구절은 전체로 볼 때 아주 비슷하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이 대답은 그동안 교회의 정교 분리의 근거 구절로 많이 애용되었고, 혹은 로마의 지배를 지지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해석의 관건이 되는 접속사 ‘카이’(και)를 But으로 해석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and to God, what belongs to God)가 아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but to God, what belongs to God)로 해석하게 되면 그 뜻은 아주 달라진다. 이것은 가이사의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 사이에 하나를 양자택일 하라는 결단의 요청이다. 당시 열심당원은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헬라 동전을 소지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여겨 아예 지니고 다니지 않았고 오직 두로 동전을 사용하였다. 반면 이 질문자는 황제의 초상의 새겨진 동전을 소유하고 있던 자로서 이미 친로마주의였다. 따라서 그의 질문은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는 것이었으므로 예수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한 것은 일종의 방어적인 조어(造語)였던 것이다. 그에게 ‘카이’(But)란 접속사는 전 문장(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보다는 오히려 뒷 문장(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본문은 가이사에게로의 세금 납부를 지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통치를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답은 형식 논리상으로 아주 모호하게 나타냈다. 이것은 열심당원으로 모함하려는 바리새주의자들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예수의 지혜로운 word play였으며 은유적 답변이었다. 그러나 이 답변은 또한 전형적인 열심당적 자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만일 열심당이 답변하였더라면 보다 명확하게 세금 납부를 거절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는 항상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 우선순위를 두고 세속 질서를 상대적으로 파악하셨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열심당처럼 로마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을 자신의 1차적 과제로 삼지 않으셨음을 이 대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답변은 하나님의 왕권 앞에서 가이사의 주권을 상대화시키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요청한 답변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를 자신의 통치의 지팡이로도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기능할 때에 그렇게 사용하실 뿐 역기능하고 우상화 되면 곧 그 권세를 폐기해 버리시는 것이다. 세속 질서는 그것이 로마의 질서건 유대 민족주의 질서건 간에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태도는 세속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을 이분화시킨 정교 분리적 태도가 아니라, 로마의 질서는 하나님의 질서의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의해 지지받거나 거부되어야 할 상대적 질서임을 나타낸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가치체계에 의해 살펴본 로마의 질서는 예수에 의해 어떤 가치 판단을 받고 있는가? 최후의 만찬에서 행한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에 관한 교훈(마 20:24-28,막 10:1-45,눅 22:24-30)을 보면 예수는 ‘로마의 힘의 지배’를 날카롭게 반박한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 너희 중의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 나는 섬기는 자로 왔느니라”(눅 22:25-27)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섬기는 리더십과 로마를 포함한 이방군주들의 힘의 리더십을 날카롭게 대비하며 제자들에게 급격한 가치 전도를 요구한다. 즉 예수의 나라는 로마의 질서를 그 가치와 본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의 정치적 태도는 친로마주의자가 아니 다. 그렇다고 예수는 열심당처럼 유대 민족주의에 기초한 반로마주의 자도 아니다. 예수는 열심당처럼 로마 통치 체제의 전복이나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 유형을 주장하고 기존 정치권력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단호히 순응하기를 거부하였다. 곧 역사에 개입할 하나님 왕국은 로마의 폭력에 대항한 민족주의적인 대항 폭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한계를 넘은 과격한 새로운 보편윤리를 요청한다. 따라서 종말론적 보편성은 역사 속의 모든 대립과 증오를 뛰어넘는 아가페의 급진성을 그 본질로 요구하는 것이다.

2. 예수 정치의 종말론적인 급진성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보편성은 아가페 사랑이라는 과격성을 요구한다. 종말론적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기존 제도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인종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종파든, 계급이든, 가족이든,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도 부인하기를 요구하는 철저함과 급진성(Radicality)을 그 본질로 한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9).

따라서 예수의 사랑은 기존의 세속적 관계와 심각한 분열을 야기시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4, 눅 12:51ff) 온 가족이 함께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면 그것은 복된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어느 일부가 주님과의 관계보다 우선시 될 때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나고 마는 법이다. 이처럼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종종 레디칼한 반응을 요청하고 야기시키는데, 예수는 이것을 자주 ‘칼’이라는 상징으로 은유화시켰다. 그렇다면, 이 칼로 묘사된 과격성(radicality)은 과연 어떤 성격의 급진주의인가? 브랜든(Brandon)은 이 칼을 열심당의 정치적 급진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 ‘성전’(Holy war)을 선포하는 예수의 열심당적 선언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눅 22:35-38의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는 언급도 예수의 제자들을 향한 무장 투쟁의 준비와 점검에 관한 기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쿨만(Cullman)은 눅 22:35의 ‘칼’을 유대인들이 여행 중 당할 예기치 못할 공격에 대비하여 갖고 다니던 평상적인 호신용 칼로 해석하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앞으로는 박해 속에서 긴 전도 여행을 하게 될 것을 예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쿨만(Cullman)은 38절에서 “검 둘이 있나이다”라는 제자들의 답변에 예수께서 “족하다”고 응답하신 것도, 칼을 열심당적 무장 명령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의 편견 앞에서 대화를 중단하시는 예수 특유의 언어 방식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오스카 쿨만은 브랜든(Brandon)이 이 본문을 성전을 위한 무장 명령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좀더 심사숙고할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과연 ‘성전’(Holy war)에 관한 언급이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베츠(Otto Betz)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분명히 성전(Holy war)에 관한 히브리 전승에서 나온 언어와 개념이 있다’(마 11:12, 눅 16:16)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는 말은 하나님 나라는 성전 수행자에 의해 무력으로 정복되는 영역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것은 열심당의 정치적 성전을(Holy War)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가 말한 투쟁은 벨리알(Belial)의 세력과의 투쟁으로써 강한 자(사탄)를 묶는 영적 차원에서의 거룩한 전쟁인 것이다.(마 1:29). 따라서, 예수가 세상에 준 검(마 10:34)은 종말론적 심판의 ‘칼’이며, ‘불’(눅 12:49)이다. 이 불심판은 예수의 죽음의 세례(눅 12:50)에 의하여 시작되며, 엄청난 영적 분리와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전쟁은 정치적 성전이라기보다는 우주적이고 묵시적(apocalyptic)인 성전이며, 예수 또한 정치적 열심당이라기보다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선포하는 묵시적 열심당(apocalyptic Zealots)인 것이다. 또한 예수의 체포시에 칼을 빼 든 제자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25)라고 제자들에게 비폭력을 요구하시는 이유도 예수의 묵시적 인식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2)- 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의 종말론은 묵시론적 급진주의(radicalism)이기 때문에, 이 과격성은 영적 차원에서 사탄과의 투쟁으로 일어나며, 동시에 진지하게 자기의 생명까지도 포기하는 자기 부인의 사랑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투쟁 형식은 열심당적인 무장 폭력 투쟁이 아니라, 종말론적 사랑에 기초한 비폭력 의 아가페 형식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끊임없이 열심당적 유혹을 거부하게 된다. 그는 광야에서 세속 권세를 보이며 그것을 취득하여 정치적 방식으로 메시야 사역을 감당하라는 사탄의 유혹(마 4:10)과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며 정치적 메시야로 내세우려는 군중들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유혹(요 6:15)에 단호하게 저항했다. 또 제자들에게 최초로 자신의 죽음을 계시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 일이 결코 주께 일어나지 마옵소서.”라고 외치는 베드로의 요청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침으로써 극복한다(마 8:27-33). 그리고 마지막 수난시에 그는 대 제사장에 의해 ‘백성을 미혹시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정치적 반란 죄목으로 빌라도 총독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자신이 유대인의 왕 메시야인 것을 인정하나(막 15:2)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 18:36)’라고 천명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의 종말론적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예수는 비록 ‘유대인의 왕’이라는 열심당의 죄명 -반란죄- 으로 정죄되어 전형적인 로마의 정치적 처형방식인 십자가형으로 처형되나 결코 ‘열심당적 혁명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야라기 보다는 훨씬 더 자주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 ‘인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정치적인 다윗 메시야로서보다는 분명 속죄의 길을 가는 ‘인자 메시야’로서 계시하였던 것이다.

3. 예수의 종말론적인 변혁성

예수의 종말론은 자기 부인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철저한 변화를 동반한다. 이 자기 부인은 곧바로 현 세속질서를 상대화시키며, 이 세속질서의 이기적인 본성을 폭로한다. 그리고 이 세속질서의 악과 이기심의 폭력구조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는 임한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소경이 눈을 뜨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인간 역사 안으로 돌입하는데(마 10:7-8,눅 7:19-23), 이 종말론적 변화는 기존 사회의 지배질서를 강력하게 뒤흔든다. 예수의 ‘땅의 백성’들에 대한 태도와 ‘여자와 어린아이’에 대한 태도, ‘세리와 창기’에 대한 태도는 기존 사회, 유대 사회의 신분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들과 큰 충돌을 일으킨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축복하시며(눅 6:20-26), 가난을 영성적 축복(심령의 가난)으로 파악하시며(마 5:3),제자들을 ‘연대성으로서의 가난’(poverty as a solidarity)에 초청 헌신케 하며(눅 18:28-30), 삭개오같이 부유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으로(눅 18:27) 소유욕을 벗어나서 나누는 삶을 살게 함으로써 예수는 당시의 부유층의 삶의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신다. 채무 증서를 태우는 열심당적 사회혁명 프로그램보다 더 근본적이고 종말론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놀라운 변화가 개개인의 삶과 사회질서 안에 도래하는 것이다. 기존 유다 사회의 억압구조의 상징물,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성전을 정화시키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면서 예수는 사두개파로 추정되는 당시의 성전 귀족들과 공개적으로 첨예한 대립을 겪는다. 이 성전 청결 사건은 우선 구속사적 의미에서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이것은 예수의 3일만의 부활을 예고하는 계시 행위인 것이다.(요 2장). 그러나 이 행위가 그 당시 사회와 기득권 계층에게 끼친 영향력도 아주 큰 것이었다. 또 이미 살핀 것처럼 예수는 로마의 권위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 기준에 따라 상대화시켜, 때로는 부정적으로 때로는 비판적으로 대하였다. 사실 마틴 헹겔(M.Hengel)은 지나치게 예수의 비폭력을 열심당의 폭력과만 강조하여 대비시킴으로써 결과론적으로 예수를 로마에 대한 비의도적인 지지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지난날 한국의 설교자들도 자주 범했다. 사실, 마틴 헹겔은 예수가 체 게바라가 아니라는 점만 역설했지 남미의 군사파쇼정권의 구조적 폭력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의 입장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다.

또 오스카 쿨만은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임하리라고 여겼던 예수는 수 세기 동안이나 세상이 지속하리라는 것을 고려에 넣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고 봄으로서 예수의 메시지는 원래 곧 임박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개인의 회심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의해 곧 소멸될 기존 사회구조의 개혁에는 아무 흥미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존 질서의 타도에 관심을 둔 열심당원과 예수와의 차이를 살피며 열심당원을 주로 비판한다. 결국 이 입장은 지나치게 개인 회심에만 초점을 맞추어 구체적인 사회구조의 변화와 개혁 프로그램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만다. 또 기득권 세력에 대한 심판과 회개를 촉구한 예수의 모습을 쉽게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

Ⅳ. 결론 - 지배질서와 교회와의 관계

세속 권력과 철저히 분리된 소수세력이었던 초대 기독교회는 철저히 예수의 태도를 지배질서에 대한 비타협 노선으로 찬양했다. AD 3C 교부 터툴리안은 ‘누구든지 동시에 그리스도인과 황제가 될 수 없다’며 교회와 권력의 결합 가능성을 철저히 부인했고 오리겐은 “영토 보호를 위한 로마의 무장 투쟁에 그리스도인이 가담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는 교회도 점점 정치권력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세교회는 기존 정치 질서를 지지하거나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즉 세속의 구조 안에 교회가 함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십자군 전쟁이었다.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정당화하는 종교 이데올로기로서 ‘성전’을 선포했고 그리스도를 ‘전쟁신’으로 묘사하는 전쟁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중세교회는 지배 질서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같은 신앙의 분파(개신교)를 이단으로 몰아 처형했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그 후 개신교 안에서도 이루어졌다. 루터는 “폭동은 전혀 이성을 갖지 못한다. 어떤 폭동도 그것이 바른 문제를 가졌다고 해도 온당치 못하다. 그것은 항상 개선보다 더 많은 피해를 초래한다.”고 말함으로서 당시 농민 폭동을 비판했으나 동시에 그들을 군대로 잔혹하게 진압한 지배 귀족들에 대한 비판에는 침묵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유대인들과 그 거짓말에 관하여”(1543)란 글에서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도의 방화와 집단수용소에의 감금을 정당화시켰다. 이런 루터파와 친지배 질서적 전통은 독일에서 Ⅰ,Ⅱ차 세계대전 시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1914년 8월 베를린의 개신교 노회 사무국은 “하나님은 살육의 긴박 상황 가운데서 우리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전쟁터도 성령의 열매로 무르익어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제국주의적 정복전쟁을 옹호했다. 포어베르크는 “그리스도인은 증오해도 좋은가?”(1914)라는 논문에서 “독일이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데 연약한 감정에서 중단하게 된다면 하나님 께서 부여하신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폭력에 대한 교회의 수용은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칼빈주의 유산인 ‘정의로운 전쟁’개념을 미국은 인디언 멕시코에의 군사 개입에 이용하였다. 이런 방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메카시적 냉전시대에는 반공주의들의 테러를 지지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항상 교회와 기존 정치권력이 결합되면 기존 정치권력이 결합되면 기존 정치권력의 적은 악마로 표상화되고 그에 대한 폭력은 거룩한 전쟁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이것이 과연 온전한 교회의 태도인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종말론적인 사랑이 현 질서에 대한 철저한 변화와 회개를 요구한다면 먼저 기존 질서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 체제의 악을 뿌리뽑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지배 질서의 구조적 악을 드러내어 변혁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 속에 무너져버린 한국 교회의 현실은 세속의 이념들을 상대화시키고 초월하기는 커녕 오히려 절대화시키고 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종속된 결과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러한 지배구조의 악순환을 중단 종결시키려는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쟈끄엘룰의 권고대로 폭력과는 다른 개념으로서의 “힘(force)”을 요청한다. 여기서 “힘(force)”이란 무엇인가? 폭력(Violence)이나 권력(Power)이 그 행사주체가 자기 부인과 자기 절제를 못하는 상태에서 상대방에의 증오와 미움이 함몰되어 나오는 파괴적인 것인데 반하여 그리스도인의 힘(force)은 산상수훈의 종말론적인 사랑을 자기 부인과 자기 절제를 통하여 철저하게 유지하며 증오와 살의에 함몰되지 않고 기존 질서를 변혁하려는 건설적인 역동성인 것이다. 이런 건설적인 힘의 사용은 그 자체가 변혁적 성격을 강력히 드러내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창조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역사적인 대표적 예가 바로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오렌지 공의 화란 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같은 경우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시대의 변혁 방법론으로 언제나 혁명만을 선호하는 혁명 열광주의도 경계해야 할 것이나, 동시에 교회가 개혁에의 참다운 노력이 없을 때 맞게 되는 수구세력의 반동의 어두움도 그에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peacecorea.tistory.com/65?srchid=BR1http%3A%2F%2Fpeacecorea.tistory.com%2F65


posted by johnworld
2010. 8. 1. 22:17 스크랩


드디어 받았습니다. 뭘? Winner Story를...

뭐랄까요? 이런 경험 처음이라서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난감하고, 개념도 없어서리...

하여튼 그래도 보고는 드려야겠기에...


Winner Story라는 분명하고도 선명한 글씨가 먼저 제 눈에 들어왔던 것이었습니다.

두근 두근 떨리는 맘으로 열어 보았더랬습니다. 열어 본 순간...

그랬습니다! 제 눈엔 신비한 광채가 발하는 Winner Story였던 것이었던 것이었씀다.

아... 겉에는 중후한 느낌의 검정색 박스로 둘러 있었고,

안에는 옅은 갈색의 영어들이 쓰여있는 포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주변 둘레를 살펴 보았습니다.

돌려 보니, 안쪽의 박스에는 제품에 대한정보로8G와 White에 체크가 되어 있었고,

검정색 포장 뒷면에는 Dimension, Weight, Display, Video, Audio, Image, 음성녹음, FM Radio, Slot, Interface, Battery 등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네요.



긴장되는 맘으로 안의 옅은 갈색의 포장을 빼낸 후, 드디어 개봉!

그런데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로 Winner story의 사용자 메뉴얼, 그리고 그 메뉴얼 뒤로는

바로 그렇게 보고팠던 Winner Story가 그 姿態(자태) 를 드러내고 있었씀다.

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었던 것, 보시는 바와 같이 바로 안의 내용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박스 안쪽을 두텁게 만들었더군요. 물론 그 안은 빈 공간으로 되어 있었구요. 이 정도로라면, 웬만한 충격으론 내용물이 훼손되진 않을 듯 싶더군요.

계속해서 떨리는 손으로 포장을 계속 거두었습니다.




위너 스토리 본체가 있던 밑 부분에는

USB 케이블(충전 케이블 겸용), 이어폰, 파우치, 핸드스트랩이 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위너 스토리를 파우치에 넣어 보고 싶었습니다.


음... 그런데 파우치가 새거라고 그런지, 위너 스토리 본체를 힘껏(?) 밀어 넣어야만 했습니다.

자꾸 쓰다보면 괜찮아지겠죠?

계속해서 위너 스토리 본체를살펴 보기로 했습니다.




무게도 165g으로 무겁지도 않은 편이면서, 제법 Slim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다른 PMP 기종을 사용해 본 경험이 없어서리...)

음,그리고위너 스토리의 제일 윗면 전원 부분에 있는 글씨 M (Mark 버튼), P (Play,Pause 버튼) 문자가 거꾸로 보이실 겁니다.

이건 사용자가 위너 스토리를 들고 사용할 때는 바른 상태로 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단지 눕혀서 찍은 관계로 글씨가 뒤집혀 보인다는 건만 아시면 될 듯...

다 아는 내용을 혼자서 너무 어렵게 설명하는가 싶은데...

그리고 스크랩 이벤트에 당첨되어 덤으로함께 보내주신 책... 바로 이 책 되시겠씀다.



오석태 선생님의 스크린, 미드 영어회화... 일단 내용이 매우 알차 보이는데...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위너 스토리와 코드가 매우 잘 맞는 책!


개인적으론 시중에 단어학습을 위주로 하는 학습기가 하나 있긴 한데, 작은 화면과 단어만을 학습하고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지금,

Winner Story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싶습니다.

앞으로 공부하면서 영어에 대한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거라 확신하면서...

이만 개봉기를 마감하겠습니다.

posted by johnworld
2010. 7. 17. 22:55 스크랩


posted by johnworld
2010. 7. 17. 14:20 스크랩

출처 : http://blog.daum.net/kcgpr/8807288?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kcgpr%2F8807288

아이패드 등장에 시장 ‘후끈’…단말기 출시도 줄이어

‘만능형’ ‘독서전용’ 성격 달라…승자 예측 두고 ‘팽팽’


#1. 애플의 태블릿피시 ‘아이패드’가 미국에서 오는 3일 판매에 들어간다. 지난 1월 말 제품 발표 당시 ‘기대에 못미친다’며 부정적이던 시장 반응이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모건스탠리는 출시 첫해 아이패드의 판매예상치를 애초 500만대에서 최근 800만~1000만대로 높였다. 애플 앱스토어에서도 아이패드용 프로그램의 인기가 확인된다. 3월 앱스토어의 전자책 애플리케이션은 2만7000여개로, 그동안 1위이던 게임을 앞질렀다. 아이패드 출시 앞두고 출판사들이 다양한 콘텐츠를 내놓은 덕분이다.

#2. 국내 전자책 시장도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해 6월 전자책 전문업체 네오럭스가 ‘누트2’를 내놓은 뒤 업종과 회사 규모를 따지지 않고 여러 업체들이 뛰어들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시제품을 내놓은 데 이어 올해 두 번째 제품(SNE60)을 발표했다. 아이리버는 ‘스토리’, 북큐브네트웍스는 ‘북큐브’, 인터파크는 ‘비스킷’이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선보였다. 4월에는 네오럭스와 아이리버가 기존 제품을 업그레이드한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영풍문고·예스24 등 온오프라인 서점과 한길사·민음사 등 출판사들이 공동출자한 전자책업체 한국이퍼브도 오는 6일 넥스트 파피루스의 ‘페이지 원’을 비롯한 단말기 5종과 콘텐츠를 공급할 계획이다. 전자책 시장을 관망하던 출판사들과 온·오프 서점들이 ‘대세’에 대한 확신을 품은 것이다.

이처럼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전자책 시장이 본격 개화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우선 기술 방향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책을 읽는 데 어떤 단말기가 더 적합한가?”

기존 전자책 단말기는 대부분 전자잉크 기술을 써왔다. 미세한 전자잉크 알갱이들을 흩었다가 모아 글자와 이미지를 표시하는 방식이다. 화면 뒤 조명(백라이트)이 필요없어 전력 소모가 극히 적고, 한번 충전해 9000여쪽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컬러를 표시할 수 없고 동영상도 볼 수 없다. 반면에, 아이패드는 터치로 조작하는 ‘손안의 피시’다. 동영상 등 피시에서 하던 모든 것을 모두 구현한다. 전자책을 책처럼 넘기며 볼 수 있고, 신문의 사진을 클릭하면 동영상이 돌아간다. 백라이트를 쓰고 배터리 사용시간이 짧다.

모든 게 다 되는 ‘만능용’ 아이패드와‘독서전용’ 전자책간 경쟁은 컬러티브이와 흑백티브이간의 대결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떤 기기가 책읽기에 더 적합하냐’는 간단치 않다. 전자책 단말기는 책읽기에 불필요한 모든 기능을 배제한, 미니멀리즘 기기다. 동영상도 안되고, 인터넷서핑도 불가하기 때문에 책읽기에만 전념하게 된다. 약점이 장점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조준일 엘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전자산업은 컨버전스(복합화)가 대세이지만 컨버전스가 고도화될수록 디버전스(기능배제)화가 촉발될 것”이라며 “사용방식이 복잡해지면 불편하기 때문에 특정기능에 전문화된 제품이 주류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시장조사기관인 스트래티지어낼리틱스가 최근 미국의 전자책 구매자 3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도 전자책의 핵심요소를 보여준다. 조사결과 전자책 사용자들이 우선 고려한 것은 휴대성, 상표, 콘텐츠 구매편리성, 콘텐츠 규모, 저장용량, 무선인터넷 순이었다. ‘컬러 화면’에 대한 요구는 16개 조사항목 가운데 꼴찌였다.

강우종 네오럭스 대표는 “아이패드 이전의 태블릿피시로 전자책을 못읽었던 게 아니고, 전자책은 전자잉크 기술이 최적이라는 것은 논쟁이 끝난 문제”라며 “다만 애플과 같은 대기업 참여로 전자책 활성화에 필요한 생태계와 기반환경이 구축돼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자책을 ‘책벌레’에게만 팔아서는 시장 확대가 어렵다는 데 업계 고민이 있다. 전자책 콘텐츠회사인 북토피아의 박영률 대표는 “아이패드의 인기에 따라서 전자책 콘텐츠 공급자들이 포맷을 결정하는데, 한국에서는 전자잉크 기술을 뛰어넘어 아이패드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출처: 한겨레 구본권 기자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