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숭고에 대하여>(낭시 외, 김예령 옮김, 문학과 지성사)에 대한 글.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084&pt=nv
3. http://www.calitosway.net/4010
4. http://imjohnny.egloos.com/1625051(박준상님의 글과 낭시 사진을 볼 수 있다.)
5. 로쟈님의 <장-뤽 낭시의 '뮤즈들'> http://blog.aladdin.co.kr/mramor/1039434
좀 더 찾아보면 유용한 자료가 나올 터이다...
낭시와 관련한 영문 자료들(인터뷰 등을 포함)은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Nancy, Jean-Luc, and Katherine Lydon. “Exscription.” Yale French Studies.78 (1990): 47-65. http://www.mediafire.com/?bjtykysjjyy
Nancy, Jean-Luc, and Michael Syrotinski. “Les Iris.” Yale French Studies.81 (1992): 46-63. http://www.mediafire.com/?m0vjhrzyzbu
Nancy, Jean-Luc, and Paula Moddel. “Menstruum Universale (Literary Dissolution).” SubStance 6.21 (1978): 21-35. http://www.mediafire.com/?nxhgzyh01ch
Nancy, Jean-Luc. “Mundus Est Fabula.” MLN 93.4 (1978): 635-53. http://www.mediafire.com/download.php?djnby2azpj0
Nancy, Jean-Luc, and Tracy B. Strong. “La Comparution /the Compearance: From the Existence Of “Communism” To the Community Of “Existence”.” Political Theory 20.3 (1992): 371-98. http://www.mediafire.com/download.php?jhwl3nvyena
Nancy, Jean-Luc, and Thomas C. Platt. “The Two Secrets of the Fetish.” Diacritics 31.2 (2001): 3-8. http://www.mediafire.com/?xzxcoyyjzjz
Nancy, Jean-Luc, and Richard Livingston. “The Unsacrificeable.” Yale French Studies.79 (1991): 20-38. http://www.mediafire.com/?d3djujmvwdo
Hall, Mirko M., and Jean-Luc Nancy. “The War of Monotheism: On the Inability of Civilization to Expand: The West Battles against Itself.” Cultural Critique.57 (2004): 104-07. http://www.mediafire.com/?mojc1tukim3
Nancy, Jean-Luc. “Wild Laughter in the Throat of Death.” MLN 102.4 (1987): 719-36. http://www.mediafire.com/?uvdnxzpy11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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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낭시의 책이 상당수 번역되어 있다. 그 중에는 <주체 뒤에 누가 오는가?>(Who Comes After the Subject?)라는 책도 있다. 이건 낭시가 쓴 것이라기보다는≪주체 뒤에 누가 오는가?≫는 장-뤽 낭시가 제기한 물음에 대해 프랑스 사상가들(장 프랑소와 쿠르틴, 에티엔 발리바르, 믹켈 보르흐-야콥센, 알랭 바디우, 모리스 블랑쇼 등)이 답변한 것을 모은 책이다. http://www.amazon.com/Comes-After-Subject-Eduardo-Cadava/dp/0415903602
그 책의 첫 대목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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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철저하게 비판받았다. 그 비판이 일단락된 현재, 도덕이나 이성의 복권을 내건 인간주의적 사상이 발흥하고 있다. 그러나 휴머니즘으로의 회귀는 철학의 망각에 속한다고 낭시는 비판한다. 서양의 주체․인간주의가 포스트모던에 의해 왜 비판되었는가, 그것에 대해 말하자면 푸코가 폭로했듯이 보편적 이상으로 간주되어야 할 인간성을 내건다는 것은 정상적인(이라고 간주된) 인간의 범주에는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소외하며 규탄하는 사태를 낳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적 동질성을 인종차별에 대치시키는 한, 차별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체의 단순한 무화(無化)는 주체의 형이상학의 완성 형태이다. (스스로를 그 자신의 차이의 해소로서, 또는 자신의 아이러니로서 인정하는 자기-현전이다.) 그렇지만 주체의 무화라는 이 니힐리즘에 대해 ‘주체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주체의 장소에 누가 대신 도래하는가를 제시해야만 한다. 즉, ‘주체의 뒤에는 누가 오는가?’를.
여기에서 철학적 주체에 대한 정의를 뒤돌아보자. 철학적 주체란 헤겔의 “자기 속에 자신의 모순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모순이 자기 고유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주체성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외재성, 소원함, 타자)를 목적론적이고 절대적으로 재전유한다. 그 때문에 모든 변증법의 시작에는 주체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재, 실존이란 주체가 모든 술어에 선행하는 한에서 주체의 본질이다. 그러나 실존은 본질(결정된 것, 분해불가능한 궁극적 요소)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현실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존하는 ‘실존자’이다. 즉, 인간의 본질인 주체란 지금까지의 철학이 생각해 왔듯이 절대적으로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그 장에서 그 때 그가 대면하는 것과의 관계에서만 본질을 지닐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일관성이라는 정체성/동일성 신화는 붕괴되어 버린다.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게 되는 ‘타자’라고 낭시는 생각한다. 자신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장소에는 사실 아무런 고정적인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바로 이’ 곳에서 어떠한 ‘하나’가 도래한다. ‘하나’는 실체적 통일이 아니다. 자신으로의 도래 속에서 하나이자 유일할 수 있으나 ‘그것’ 자체에 있어서는 다수이며 반복되는 것이다. 현전이란 자기에게 무제한적으로 도래하며 도착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 결코 자기 자신의 주체가 아닌 ‘주체’이다. 이 새로운 사고방식에 대해 종래의 형이상학은 자기에게 도래하지 않는 타자를 항상 자신의 내부에 변증법적으로 편입하고 지배하려고 해 왔다. 이것은 자신이 모든 것에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오해 때문이다. 자기는 타자와의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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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시의 ≪코르푸스≫Corpus라는 책. 일단 몸이나 신체 등으로 옮길 수 있지만, 내용을 감안하면 이때의 몸은 단독자로서의 몸이라기보다는 '공통'의 성격을 지닌 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네트워크적 주체관을 공동체로서 탐구하기 때문이다. 종래의 형이상학은 타자의 현전을 거부하고 자기완결적, 자기충족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자신의 현전을, 이어서 재현전으로 자신을 고정화하려고 꾀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낭시는 자기, 즉 탈자존재(脱自存在)는 하나의 영혼이지만, 분절화되고 밖을 향해 열려 있는, 닫혀 있지 않는 신체라고 생각한다. 관련된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마다 특이한, 자기에게 있어 이질적인 하나의 도래의 자유를 따라 나는 존재한다. 자유란 실존자의 성질도, 그 기능도 아니다. 그것은 실존하는 현전에의 자기 도래이다. 현전은 그때마다 공동에 있다. 현전에의 도래는 복수(複数)이다.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그 공동체에는 본질은 없으며, 공동 존재는 없다. 어떠한 주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분화된, 어머니 바다 속처럼 혼돈은 아니다. 개별적으로 분절화된 존재의 네트워크의 공동체, 교통/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공동체이다. 복수의 도래는 단수의, 결코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특이한 ‘하나’의 도래이다. 주체 없는 공동체에서 복수적인 것과 단수적인 것이 서로 해방과 분유(나눔, 공유)를 반복한다.
이것이 낭시가 제창한 새로운 주체, 즉 탈자존재(脱自存在) 개념이다. 신체는 끊임없이 외부에 각인되면서 열려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피부의 한계 위에서 확산, 수축하고 연장된다. 나의 신체는 나에게 항상 이질적인 것, 소유권이 박탈된 것으로 있다. 어떠한 본질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탈자성(脱自性)의 본질이다. 내재성도 아니다. 초월적 주체도 아니다. 외부도 내부도, 기능도 합목적성도 아니다. 있는 것은 “타자로서의” 신체뿐이다. 간극뿐이다. 신체는 공간과 행위 속에서, 애인들처럼 비슷한 방식으로 탈자존재하는 신체와 서로 접촉하고, 자신들의 공동화(空洞化)를 무한하게 갱신하고 서로 틈을 벌리고 서로에게 돌려 보낸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서로 접촉하려고 하는가? 법칙으로서의 성, ‘접촉해’, ‘키스해’라는 명령은 종의 충동으로도, 리비도로도 설명-계산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명령이 목표로 삼는 것은 어떤 대상도 아니고 자기도, 아니도 아니라, 단순히 자기와 접촉한다는 것의 환희/고통이기 때문이다. (자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되는 것.) 자기에게서 당신을 만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체가 항상 보다 멀리라고 강제하는 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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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뤽 낭시와 공유·소통에 대한 물음
박준상 (연세대 철학과 강사)
1. 공유 내의 존재 etre-en-commun
여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뤽 낭시Jean-Luc Nancy(1940- )에 대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하는가? 그의 사상의 특성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을 밝혀봄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낭시의 사유의 핵심에 정치적인 것이 놓여 있으며, 그의 사상은 시종일관 정치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많은 다른 정치사상가들의 경우에 그러하듯, 낭시는 물론 정치적 사건들(동구권의 해체, 걸프전), 정치적 변화들(세계화, 서양중심주의의 한계), 정체政體들·이데올로기들(민주주의, 공산주의, 나치주의)에 대해 구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분석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일 뿐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이어질 뿐이며, 모든 경제·문화·사회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설명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원리를 배경에 깔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낭시의 정치철학은 이른바 '형이상학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 또는 조건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치적인 것이란 이미 공동존재(함께 있음, etre-avec)에, 인간들 사이의 소통에 기입되어 있으며, 어떤 '우리'의 존재의 수행(실현, 표현)이다. '우리'의 존재, 다시 말해 '나'의 존재도 타자의 존재도 아닌, 모든 단일성, 동일성(정체성), 내재성 바깥의 존재, 고정된 개체의 속성에 따라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나'와 타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 내의 존재, 관계에만 정초될 수 있는 존재.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귀결되는 자기의식의 반대편에 놓이는 존재, 또한 어떤 주제theme에 고정되어 동일화된, '내'가 구성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 정치적인 것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수행이란 '우리'의 서로에게로 향함·나타남, 관계 내의 서로를 향한 실존들의 만남, 접촉touche이다. ('접촉'은 낭시의 용어이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람은 그의 동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이다. 데리다의 낭시에 바쳐진 저서,『접촉, 장-뤽 낭시』 참조,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ee, 2000.)
낭시는 보이지 않는 관계('나'와 타인은 보이지만 그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를 조명하며, 거기에 그의 사유, 정치적 사유의 핵심이 있다. 그러나 '나'와 타인―또는 타인들―의 관계를 정치에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거나 과장이 아닌가? 분명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 그 자체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공유 내의 존재는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종류의 만남의 근거에 있는 나눔partage, 어떤 '무엇'을 나눔이 아닌,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나눔의 양태, 나눔의 전근원적 양태를 지정한다. 공유 내의 존재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종류의 소통과 공동체 구성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결정·행동에 있어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유 내의 존재는 '정치적'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정치의 근원이다.
아마 낭시는 공유 내의 존재가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사유된 적이 없이 망각 가운데 묻혀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까지 나눔과 공동체라는 정치적 문제에 있어, '무엇'을 나눔과 '무엇'에 기초한, '무엇'을 위한 공동체만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걸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의 '무엇', 즉 재산의 공유共有였다.
나치는 열광적인 정치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그것은 공동의 이념적 '무엇'(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의 기초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 '무엇'(재산, 국적,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왜곡, 말하자면 보이는, 쥘 수 있는―전유專有할 수 있는―동일성의 지배, 공유 내의 존재의 망각. 그 '무엇'에 따라 전개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목적일 수 없는, 실존의 나눔의 망각, 함께 있음 자체의 망각.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에 대한 이해와 소유라는 관심에 사로잡혀 존재망각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낭시는 우리가 보이는 '무엇'에 대한 공유 바깥의 나눔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기입되는 공유 내의 존재를 망각했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결국 낭시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물음이 있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우리는 재산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재산을 나눈다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 즉 공유 내의 존재를 위한 함께 있음,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됨,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2. 유한성의 경험
공유 내의 존재,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시적 어떤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外存ex-position,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 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 유한有限한 자들의 만남. 낭시는 현대철학에서 많이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된 '유한성finitude'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상가이다.
인간의, 인간들의, '우리'의 유한성, 여기서 유한성은 첫째로 완전한 내재성內在性의 불가능성이다. 완벽히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을 수 있는, 그 스스로에 정초된―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로 향함, 그에게 노출되어 있음, 그를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그것이 '나'의 존재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향해 있는 타인에 의해 제약된 존재, 하지만 그 제약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sens에 이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유한성 가운데에서의 존재란 먼저 외존 가운데에서, 관계 내에서의 존재, 폐쇄성과 내재성 바깥의 존재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 유한성은 만남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접촉은 불규칙적, 단속적 시간에, 즉 시간성 내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을 통해 확인하고, 표상할 수 있는 '무엇'에 정초되어 있지 않고, '무엇' 바깥의 타인의 나타남에 응답하는 순간의 정념情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접촉, '무엇'에 의하지 않는, '무엇' 때문이 아닌 급진적인 만남, 그것에 정념만이, 극단의 단수성(singularite, 타인의 나타남의 단수성)을 긍정하면서, 답할 수 있다. 정념, 만져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무엇'에 따라 고정될 수 없는 관계 자체에 대한 감지.
그러나 만남의 유한성은 인간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나아가 지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유한성은 관계를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즉 타인을 '나'에게 필요한 그 '무엇'의 요구에 따라 어떤 동일성 내에로 동일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에 따라 그것은, 만일 '무엇'이 관계를 지배할 때, 그러한 지배(예를 들어 재산의 지배, 정치적 이념의 지배, 인종과 국적의 동일성의 지배―지금 이 땅의 경우 학벌과 지역적 동일성의 지배)에 지속적으로 저항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이유·목적도 없는 만남, 또는 그 자체가 이유와 목적인 만남, 즉 실존들의 접촉과 그 순수성을 정당화한다.
세 번째로 낭시가 말하는 유한성은, 그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한계상황(죽음, 병, 고독)에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양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낭시에게 유한성은 공유 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접근이 '나'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존재양태, '그 누구Man'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에로 눈을 돌리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반해 낭시는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본래적 실존에로 돌아가게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외존(타인을 향해 존재함,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을 통한 급진적인 공유 내의 존재를 부르게 한다고 본다.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은 '나'와 자신의 본래적 관계의 회복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절대타자 앞에서 '나'의 동일성이, 그것이 무엇이든,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모리스 블랑쇼(1907-2003)
그것은 '나'와 자신의 관계의 파기의 경험이며, 본래성Eigenlichkeit에로 향해 가는 경험이라기보다는, 어느 누구의, 아무의 경험(이 점에 대해 낭시와 사상적으로 가까운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죽음에 대한 분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품과 죽음의 공간',『문학의 공간』, 박혜영 역)이며, 공유 내의 존재로 열리는 경험이다. 다시 말해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은 '나'의 규정일 수 있는 모든 것이 무효화되고 익명적 실존에로 되돌아가는 경험이며, 그 익명적 실존을 감당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고 본다면, 타인을 향해 가는, 타인을 부르는 외존의 경험이다. "죽음은 공동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공동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그 역도 마찬가지이다."(낭시,『무위無爲의 공동체』) (죽음과 외존, 공유 내의 존재, 공동체―공동체는 낭시에게 원칙적으로 어떤 가시적 공동체, 기반과 조직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 타인과의 어떤 급진적인 소통의 체험이다―의 연관성, 그에 대한 낭시의 사유는 자신의 특별한 체험에 의해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산소부족증 때문에 폐이식수술을 받았으며, 더구나 완전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환자'이다. 왜냐하면 산소부족증은 재발할 위험이 있으며, 재발의 경우 생명을 건 재이식수술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낭시 개인의 경험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 가운데 죽음과 병이라는 '침입자intrus'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어는 누구의 것일 수도 있는 유한성의 경험이다. 그 경험에 대해 낭시는, 자신의 투병생활을 기술하면서, 성찰해보고 있다. 낭시,『침입자』 참조.)
3. 문학과 공유 내의 존재
낭시에게 문학과 문학작품의 경험이란 문제는 그의 사유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낭시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문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술, 영화에까지 이르지만, 여기서는 그의 문학에 대한 성찰만을 살펴볼 것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사유 방식과 경향은 낭만주의 이후에 속한다. 그 사실을 낭시는 사상적으로 그와 매우 가까운 동료,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와 독일낭만주의자들의 동인지『아테네움Athenaum』에 실린 텍스트들을 공동편역(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문학적 절대』, 그들이 쓴 서문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낭만주의란 무엇인가',『세계의 문학』, 박성창 역, 2002 가을 106호)하면서 명백히 드러냈다. 낭시의 사유가, 문학의 여러 문제와 결부될 때, 독일낭만주의에 가까이 닿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사실은 하지만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독일낭만주의에서 최고의 형이상학적 절대(주객 합일의 절대, 주체와 세계의 합일의 절대)의 표현에 이르는 통로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시예술Dichtkunst이 드러내는 어떤 감각적 현현顯現, 즉 인간주체의 제시(Darstellung, 형상화)이다. 또한 낭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말하는 더할 나위 없는, 전유할 수 없는 외재성으로써 '의미의 의미sens du sens'란 개념에 포착되는 의미가 아니라,―낭만주의에서 강조된 제시에 유비될 수 있는―개념 이전 또는 바깥의 의미, 개념을 초과하는 의미, 감각적 의미, 즉 이미지의 제시presentation이다. 그러나 낭시는 문학이 인간의 세계와의 어떤 절대적 합일을 보여준다는 독일낭만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의문시하며, 나아가 그 절대적 합일이 주체의 감각적 제시를 통해 표현된다는, 그들에게 남아 있는 독일관념론(피히테)의 잔재를 거부한다. 독일낭만주의에 근대의 산물인, 주체의 위치에 대한 과장된 강조가 있을 것이다. 낭시가 말하는 '의미의 의미'로서의 의미는, 낭만주의적 주체의 제시가 아니라, 문학작품에서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유한성의, 어느 누구의 것일 수도 있는 유한성의 형상화이다. 익명적 유한성의 형상화, 다시 말해 유한성의 이미지를 통한 제시.
문학작품이, 독일낭만주의들이 강조되듯, 철학적 개념의 전개라기보다는 인간성의 형상화라고 본다면, 그 인간성은,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세계와의 합일에 이른 '절대적' 주체에 육화되어 표현되지 않는다. 낭시에 의하면, 문학이 그려내는 인간성은 특정한 주체의 것이 아니며, 유한성에 한계 지워진 무명씨의 것이다. (무명씨의 인간성이 무엇인가는 낭시가 그의『사유의 무게』에 끼워 넣은, 조르쥬Georges라 불리는 남루한 부랑자의 사진에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 사진에 낭시는 그 조르쥬라는 무명씨를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 사진은 필사적으로 현실과, 그 불안정함, 은총, 덧없음을 보여준다. 어떤 곳에서, 한 순간, 어떤 것 또는 어느 누구가 나타났다. 사진은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의심, 우리의 망각, 우리의 해석에 맞서 대립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사진은 그러한 명백성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유한성이 말하게 하기. 내재성·폐쇄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유한성(타인에게로 외존할 수 밖에 없다는 유한성), 만남의 유한성(순간에 극단의 단수성에 기입되는 타인의 현전이 갖는 유한성), 한계상황과 죽음이 요구하는 유한성(사라짐의 필연성), 그러한 유한성이 긍정되게 하기, 거기에 문학의 과제가 있다. 문학은 그러한 유한성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에 따라 문학은 공유 내의 존재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한성의 제시 가운데 독자가 읽을 수―볼 수―있는 것은, 그 '무엇' 바깥의―또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지배당하지 않는―한계에서의 인간존재 자체 그리고 개인의 모든 특수한 속성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현전이기 때문이다. 이상적·본질적 인간(성)의 모델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거부해야, 그것에 저항해야 하며, 거기에 공유 내의 존재, 즉 정치적인 것을 향한 첫 걸음이 있다. 독일낭만주의는 문학이 철학적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인간성의 현시라고 보았다. 그러나 독일낭만주의가 어떤 형태의 '고귀한'―절대와 함께 하는―낭만적·예술가적 주체를 고양시킨 것은 정치적 관점에서 하나의 오류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하나의 인간의 모델을 세웠기 때문이다―그 모델로부터 바그너에서 니체까지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열정 속에서 세계와의 합일을 꿈꾸며, 자신의 파멸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비극적 영웅, 하지만 아무나 될 수 없는 영웅. 그러나 '우리'의 '열정'과 '비극'은 다른 곳에 있다. '우리'의 열정은 힘의 고양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며, 한계에, 유한성에 처한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열정, 소통에의 열정이다.
'우리'의 비극은, 단순히, '우리'가 사라져갈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 '비극'은 허무주의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사라져감, 죽음을 통해서만 소통의 무한성을, 공유 내의 존재의 무한성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공동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이다"). 문학은 공유 내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그에 따라 문학은 정치적인 것과 마주한다. 그러한 사실은 그러나 문학이 정치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문학 가운데 정치적인 것의 전형이 그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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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뤽 낭시는 주로 독일철학, 예를 들어 독일낭만주의,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자신의 사유의 기반으로 삼았으며,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이후에 가능한 공동체주의(communisme, 이 역어를 '공산주의' 대신에 택했다)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낭시는 또한 그 보다 한 세대 전 사상가,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를 이어가면서 '무엇'의 동일성의 지배에 저항하는 일종의 유한성의 정치철학을 대변하고 있다(그러한 정치철학은 바타이유, 블랑쇼, 낭시의 사상을 바탕으로 현재 프랑스에서『선線Lignes』이라는 잡지의 정치적 입장의 배경이 된다). 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등과 함께 가장 주목받고있는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중 한사람이다. 이 사실을 낭시의 또 다른 측근, 데리다는 2000년『접촉, 장뤽 낭시』를 상자해 확인시켰다. 흔히 낭시를―라쿠라바르트도 마찬가지이지만―데리다의 후계자, 또는 제자로 여기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해라고 말할 수 있다. 낭시가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소통, 공동체, 접촉등의 정치적 주제들을 독자적(독창적)인 관점에서 전개해 나아갔다. 낭시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대학 철학과에서 오랜 동안 교수생활을 하다 얼마 전 은퇴했다. 중요 저서로는, 바타이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의 지배 바깥의 공동체, 조직·기관·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무위無爲의 공동체La Communaute desoeuvree』, 실존이 어떻게 타인과 함께 하는 실존, 공-실존co-existence인가를 밝힌『복수적 단수의 존재L'Etre singulier pluriel』, 개념·명제 너머의 의미, 개념·명제의 성립조건으로서의 의미, '의미의 의미'에 대한 정식화,『세계의 의미Le Sens du monde』, 현전presence에 대한 새로운 해석,『사유의 무게Le poids d'une pensee』등이 있다. 낭시의 사상은, 그의 저서들의 번역과 더불어,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상태에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거의 소개 되어있지 않고, 단 한 권의 번역서도 찾을 수 없다. 블랑쇼는 그의『무위의 공동체』에서 영감을 얻어, 저자는 다르지만, 그 책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밝힐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e inavouable』라는 책을 썼다. 낭시는 2001년에 블랑쇼의『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마주한 공동체La Communaute affrontee』라는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 책이『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번역에 함께 묶여 우리나라에 소개될 것 같다(모리스 블랑쇼,『밝힐 수 없는 공동체』/장-뤽 낭시,『마주한 공동체』, 이학사). (박준상)
[출처] 장-뤽 낭시(1940-).|작성자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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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73) 우리 평범한 삶, 그 어디에도 숭고는 없다 | ||||
2008 08/05 뉴스메이커 786호 | ||||
늘 지체되는 약속, 치솟는 세금과 물가, 불공정한 경쟁, 사소한 다툼, 어이 없는 배신, 타인의 무신경함, 터무니없는 험담과 비난, 오해, 과민반응, 짜증과 신경질…. 내가 이런 것들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사는 게 진절머리가 날 때, 나는 비 오는 날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을 달린다. 비와 땀방울에 젖은 머리칼들이 이마에 달라붙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며 마침내 심장이 파열하기 직전까지. 나는 달리고 또 달린다. 때로는 비틀스의 노래를 듣는다. 내겐 언젠가 외국 여행 중에 발견하고 사들인 비틀스의 전곡을 담은 열한 장의 시디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며 비틀스의 노래를 들을 때면 나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며 화가 가라앉고 봉두난발로 허공을 떠다니는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린다. 나는 벤야민을 사랑한다. 그래서 벤야민의 책을 읽는다. 하루 종일 차를 잔뜩 끓여놓고 그것을 천천히 마시며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으며 아주 신중하게 마음이 행복해질 때까지 자제한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월화수목금토, 오감의 즐거움과 상관없이 배 고파서 먹는 끼니, 보람 없이 의무로만 채워지는 수고, 봉급이 나오는 날짜만 꼽아가며 출근하는 직장, 해마다 나이를 하나씩 더 먹는 것… 이것들에는 범속함의 지루함에 대한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묵묵히 치러야 하는 할당된 책임,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지나야 끝나는 견딤만 있을 뿐이다. 미지근한 맥주 몇 병, 혹은 소주 몇 병과 입에 집어넣는 죽은 동물의 근육 몇 점, 노래방에서 악쓰며 부르는 유행가 몇 곡, 그리고 피로에 절어 기절한 듯 자는 잠이 고작해야 그 책임과 견딤에서 풀려난 우리가 받는 보상이다. 거기 어디에도 숭고는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숭고는 솟구침이며 황홀경, 진실의 위대한 측면이며 미적 고양(高揚)이다. 시, 바흐의 음악, 모네가 그린 수련, 눈이 번쩍 뜨이는 승경(勝景), 이타적 희생, 임종하는 이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마지막 말들 속에 찰나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렇다면 숭고는 어디에 있는가? 숭고는 감성과 오성, 혹은 미(美)와 진리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도덕에서 숭고는 희생과 포기에서 생기는 잉여들, 즉 능동적 가난과 가난이 표상하는 금욕주의에서 발견되는 그 무엇이다. 예술에서 숭고는 미적 실재로 현현된 것, 그 너머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자유의 고양, 감각적 직관을 꿰뚫으며 일어나는 윤리적 황홀경 따위다. 대개의 예술은 사용, 이득, 수익, 손실과 무관하다. 그 자체로 하나의 기쁨이며 보상이다. 얀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볼 때 나는 숭고의 한 측면을 감지한다. 푸른 두건을 쓴 소녀의 순진무구한 표정 속에서 크게 뜬 눈동자는 그 아래 짙은 명암 속에서 빛나는 진주 귀고리와 같이 빛난다. 그 습기를 머금은 채 말갛게 빛나는 눈빛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현실 저 너머의 어떤 세계를 암시한다. 뛰어난 예술은 가능성의 극한에 가 닿지만 그것은 가냘프고 찰나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나는 내 그림이 그것들의 외관이 아니라 그 아래에, 저 스스로의 난폭함과 항구적인 힘 겨루기 밑에 있다는 것을 안다. 선(善)이나 숭고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취약하다.”(니콜라 드 스탈) 장-뤽 낭시는 숭고를 문제삼을 때 그것은 ‘제시의 문제’라고 말한다. 제시의 다양한 양태, 이를테면 언술·출현·봉헌·진실·경계·소통·감정·세계·벼락 등은 하나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숭고는 자주 미학의 차원에서 다루어지지만, 미학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예술 속에서 예술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언제나 한계의 예술이니만큼, 예술의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장-뤽 낭시) 예술은 그 한계에 닿을 때 봉헌의 제스처를 취한다. 봉헌에는 순진성과 단순성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감정들의 생동감은 나타나지만 요란한 과도성 혹은 숭고한 열광은 없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숭고와 같이 드높거나 깊디 깊은 곳에 깃들지 않는다.” 그 표면은 그저 과잉이 없는 평온을 지향할 따름이다. 장-뤽 낭시는 숭고가 예술에 대한 사유의 가장 고유한 영역이 될 수 있는 계기를 칸트에서 찾는다. 낭시는 “예술에 대한 사유의 핵은 숭고이며, 미는 단지 그것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예술이 추구하는 바 미와 따로 존재하는 숭고란 없다. 왜냐하면 “숭고, 그것은 그를 통해 미가 우리를 건드리는 계기지 미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숭고는 작품과 접촉함으로써 존재하지 그 형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접촉은 작품의 바깥, 작품의 경계선에서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접촉은 예술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예술이 없다면 그 접촉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예술이 드러나고, 예술이 주어진다. 이 사실이 바로 숭고다.” 왜 숭고를 문제삼는가. 미학이 숭고를 문제삼는 것은 미학의 월경(越境)이며 진화의 증거다. 프랑스의 68세대 철학자들이 싹을 틔우고 푸코, 리오타르, 라캉, 들뢰즈, 레비나스 들에 의해 그 논의가 확장된 숭고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구조주의 사유의 압력 아래에 있던 68세대 철학자들이 그 전 세대가 제시한 사유의 틀을 깨고자 하는 욕망이 숭고로 이끈 촉매제가 되었다. 전 세대가 제시한 낡은 틀이 아니라 저희들이 만든 새로운 사유의 틀로 자신의 세대를 규정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들로 하여금 숭고를 사유의 영역 안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틀을 깨고자 하는 것, 경계 바깥으로 튕겨 나가려 함은 다시 그 틀과 경계에 대한 사유로 재귀하도록 이끈다. “숭고에 대한 사유에 의하면, 윤곽이나 틀, 자취는 그것들 자신으로 귀착한다. 그것들은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 제시 자체의 중지, 다시 말해 윤곽과 틀, 자취들이다.”(장-뤽 낭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숭고에 대한 사유는 경계의 미학 혹은 미학의 경계에 대한 사유로 귀착한다. 다시 한 번 묻자. 숭고란 무엇인가? “찰나적으로 획득한 불멸성의 지점,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항하여 죽음으로부터 낚아챈 말은 숭고하다. 그 안에서 생성-소멸의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그 지점은 죽음의 곡선에 속하되 그와 동시에 그 곡선을 거슬러오르고, 곡선과 접촉하는 순간 역력한 방향의 전환을 일으키며 위로 솟아오르는 첨점이자 육체와 영혼이 합쳐진 채로 정지하는 절정이다. 또한 불안정한 산꼭대기에서 최대한 높이 뛰어내리는 순간에 그런 것처럼, 극미한 무중력의 유토피아다.”(미셸 드기) 숭고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과 세계의 접점, 안과 바깥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숭고는 예술과 자연의 결합 안에서 파생하고 그 파생하는 힘으로 끝없이 움직여 나간다. 숭고는 틀과 경계 안에 가둬놓을 수 없는, 넘치고 흘러나가는, 유동하는 움직임 속에서만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장석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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