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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20. 12:59 Daily Bread
높은 하늘을 날아본 새가 낮은 땅에서 만족할 수 없듯이, 말씀의 깊은 바다를 경험한 사람은 얕은 물가에서 만족할 수 없다.

텔마 홀(Thelma Hall)이 쓴 "깊이 깊이 말씀 속으로"(Too Deep for Words)는 우리를 말씀의 깊은 바다 속으로 인도해 준다.

이 책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재발견을 위해 쓰여진 책. 거룩한 독서는 네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은 읽기(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그리고 관상(Contemplatio) 이다.

읽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단계.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청하는 것.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우리의 지성을 동원하게 된다.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는 이성적인 추리 과정이 묵상의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거룩한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거룩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말씀 속으로 들어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내 눈으로' 예수님의 응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묵상이다.

기도의 단계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단계. 묵상의 차원이 지적 활동과 상상의 차원이라면 기도의 단계는 마음의 차원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열고,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노력을 하게 된다.

관상의 단계는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관상'은 하나님 안에서의 '쉼', 하나님을 향한 '애정 어린 응시', '앎을 넘어선 앎', '황홀한 주의를 하나님께 기울이는 것'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관상은 묵상의 사고와 이성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정감적인 기능인 정서와 느낌까지 초월한다. 관상의 단계는 침묵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말씀에 깊이 잠기는 것. 말씀에 깊이 잠겨 안식하는 것. 이 단계에서 말씀 속으로 우리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우리가 읽혀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하고, 사랑 안에서 안식하는 것.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

거룩한 독서는 단순히 천천히 읽는 책읽기가 아니다. 거룩한 독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게 해 준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2:57 Daily Bread
비전에는 일반전인 Vision 과 특별 Vision 이 있다.
우리는 종종 특별한 Vision 에만 관심이 있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특별 Vision 은 일반적인 Vision 이 이루어진 후에 알게 되는 것.
일반적인 Vision이란 무엇인가? "누림"과 "전함"이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과 주님 안에서의 평안한 삶을 사는 누림이 있어야 한다. 그 누림이 있을 때 비로소 기쁜 마음으로 전할 수 있게 되는 것. 내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없는데, 평안이 없는데 어떻게 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입술만 움직여 지는 내용이 없는 전함이 될 수 있다.

나는 누리고 있는가? 진정 하나님을 기뻐하는가? 무엇을 통해서 누리고 있는가? 자연과 사람들과 내게 주신 것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누림이 없다면 알맹이가 없는 내용이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일 수 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채워지고 기뻐하고 누리길 원하신다.

"Vision" 이란 나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와 나의 삶을 바라 보는 것.
더욱 더 일반 비전에 충실할 때 특별 비전을 보게 하신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2:56 Daily Bread

마음에 늘 부담이었던,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것이 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대전에서 서울로 입성할 당시에 새로운 직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여, 모두 다 크리스챤을 만들겠다는 굳은 결심(?)이 나름대로 있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도 멋진 간증과 나름대로의 "능력(?)"을 보이겠다는 은연중의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나름대로 좋은 이미지로 보아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사람이 유독 모든 회사원들이 있는 회식 자리에서 "나 한테 더 이상 전도를 하지 말라"고 했다. 불쾌하고 듣기 싫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 하나.... 믿는 사람이 없는 그런 직장에서, 무척이나 피곤한 생활을 했다. 가끔 팀장이란 사람이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했을 때, 살며시 팀장의 책상에 "힘내시라고... 기도하겠다"고 했던 메시지를 듣고 후에 팀장이 그 메모를 잊지 못해 고마워했던 기억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직원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소위 말해서 "왕따"를 당해보아야만 했다. 학교 다닐 때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뉴스에서만 듣고 보았던 "왕따"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모조리 뒤흔들어 버리는, 스스로를 비참하게 바라보게 하는 아주 처절한 시간들이었다.

서울에 들어올 때의 나름대로의 자신감과 무언가를 이루어내겠다던 결심이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지고 만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에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나의 마음을 괴롭혔던 것이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동시에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자 했던 나의 신앙의 나약함과 그리고 오히려 그들에게 인정은 커녕 따돌림과 하나님을 입에서도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야만 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이 되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되었으며,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채 했던 나의 미련함과 착각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하고, 송구하고, 부끄럽고...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시간이 지나 새롭게 갖게 된 직장은 반대로 모두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인 동시에, 나의 업무도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다. 어쩌면 이번 수련회에서 강사 목사님이 말했던 "쉼"과 "누림"을 주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이 안에서도 나름대로의 고충과 고민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의 경험과 비해서는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누림과 쉼, 여유... 실력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 결국 실력있는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신앙과 일 모두에서 실력있는... 그것은 단순히 앞서 나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앞서 나가지만 방향은 있어야 하겠고, 방향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성취해갈 수 있는 실력과 노력이 없다면...

이제 내 안에 미처 점검되지 않았던 것들을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 모색과 그것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일 필요한 시점이다.

실패였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다시금 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내 자신을 믿지 못할 뿐더러, 내 안에서 어떤 실력도 갖추어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안에 어떤 잠재력과 힘을 은사를 주신 것들은 알고 있다. 그것이 다섯이든... 하나이든... 이제 그것을 붙잡고 실력있는 신앙과, 실력있는 사회인으로서의 역활을 할 수 있도록 고민과 나를 깎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생각했던 것과 같이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40 에 모세를 부르셔서 쓰신 하나님이 나 역시 늦었다고 포기할 시점은 아닌 듯 싶다.

이제 앞으로 나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그 비전위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바라며 믿으며 푯대를 향해 앞으로 가야하겠다.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로운 오늘의 나를 위해서...

코람데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2:54 Daily Bread
무디가 미국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전도대회를 인도하게 되어, 대회 며칠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다음날, 무디가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는데 머리기사로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사정상 거절했더니 화가 난 기자들이 그런 기사를 쓴 것이었다.

그 기사를 보고 이번에는 무디의 스태프들이 화가 났다. "무디 목사님, 이거 말도 안 되는 기사입니다. 인격 살인이 아닙니까? 어떻게 할까요?"
무디 목사는 가만히 그 기사를 읽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기사보다 훨씬 더 교만한 사람인데, 이만하면 잘 써줬는데?... 하나님께서 겸손하라고 말씀하시는 사인입니다. 좀 더 겸손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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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으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갈 수 있는 상황의 연출이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의 차이가 이런데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너무 막연하다. 어떻게 큰 사람이 되는가?

화를 낼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인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줄 아는 사람인가?
말씀이나 삶을 통해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인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까?
궂은 일을 마다않고 다 하는 사람인가?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묵묵히 감수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것인가?
내가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어떤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일까?

최근에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주신다. 그 사랑이라는 개념도 너무 광범위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섬김과 희생과 본을 보이는... 타인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큰 사람이 되는 비결은 아닐까 생각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6~28)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 23:11)

먼저 섬기는 자와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섬기고자 하는 마음... 종이 되고자 하는 마음... 세상의 돌아가는 법칙과는 반대로 오히려 낮아질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최근의 읽었던 말씀 중에 새롭게 들리는 말씀이 있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 6:41)
위의 말씀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하셨던 여러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의 율법은 "오리(1마일)"를 기본적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같이 동행할 것을 요구하면 그것은 딱 "오리"까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새로웠던 것은 이 전에는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었다. 즉 같이 가고자 청했던 사람이 오리를 더 가자고 요구했던 것으로 그래서 십리를 갔던 것으로 이해를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말씀을 살펴 본 결과, 그렇지를 않았다.

억지로 동행을 요구해서 오리까지를 가게 되었고, 그 이상은 요청했던 사람이 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억지로 오리까지 갔고, 다음에는 십리를 동행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처음에는 "기본"이었고, 후에는 동행했던 사람의 자발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가 새롭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더해주었다는것이다.
힘에 지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분에 넘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또한 그렇다. (눅 10:25~37)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때려 맞아서 반은 죽었던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피하여 도망갔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주고, 또 주막까지 데려다 주어 돌보아 주고(care), 떠날 때에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지불하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올 때 갚겠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중에 누가 이웃인가를 그 잘난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셨다.

힘에 지나도록 그를 "돌보아" 주었다.
분에 넘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피했던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개 취급 당하며 서러운 대접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의 선행... 사랑...
그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며,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다.

나는 십리를 동행하는가?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고 있는가?
섬기고 있는가?

지금 나의 관심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과 거리가 멀다면 나의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한낱 "희망사항"일 뿐일 것이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