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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20. 12:54 Daily Bread
무디가 미국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전도대회를 인도하게 되어, 대회 며칠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다음날, 무디가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는데 머리기사로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사정상 거절했더니 화가 난 기자들이 그런 기사를 쓴 것이었다.

그 기사를 보고 이번에는 무디의 스태프들이 화가 났다. "무디 목사님, 이거 말도 안 되는 기사입니다. 인격 살인이 아닙니까? 어떻게 할까요?"
무디 목사는 가만히 그 기사를 읽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기사보다 훨씬 더 교만한 사람인데, 이만하면 잘 써줬는데?... 하나님께서 겸손하라고 말씀하시는 사인입니다. 좀 더 겸손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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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으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갈 수 있는 상황의 연출이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의 차이가 이런데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너무 막연하다. 어떻게 큰 사람이 되는가?

화를 낼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인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줄 아는 사람인가?
말씀이나 삶을 통해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인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까?
궂은 일을 마다않고 다 하는 사람인가?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묵묵히 감수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것인가?
내가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어떤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일까?

최근에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주신다. 그 사랑이라는 개념도 너무 광범위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섬김과 희생과 본을 보이는... 타인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큰 사람이 되는 비결은 아닐까 생각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6~28)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 23:11)

먼저 섬기는 자와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섬기고자 하는 마음... 종이 되고자 하는 마음... 세상의 돌아가는 법칙과는 반대로 오히려 낮아질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최근의 읽었던 말씀 중에 새롭게 들리는 말씀이 있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 6:41)
위의 말씀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하셨던 여러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의 율법은 "오리(1마일)"를 기본적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같이 동행할 것을 요구하면 그것은 딱 "오리"까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새로웠던 것은 이 전에는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었다. 즉 같이 가고자 청했던 사람이 오리를 더 가자고 요구했던 것으로 그래서 십리를 갔던 것으로 이해를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말씀을 살펴 본 결과, 그렇지를 않았다.

억지로 동행을 요구해서 오리까지를 가게 되었고, 그 이상은 요청했던 사람이 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억지로 오리까지 갔고, 다음에는 십리를 동행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처음에는 "기본"이었고, 후에는 동행했던 사람의 자발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가 새롭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더해주었다는것이다.
힘에 지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분에 넘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또한 그렇다. (눅 10:25~37)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때려 맞아서 반은 죽었던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피하여 도망갔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주고, 또 주막까지 데려다 주어 돌보아 주고(care), 떠날 때에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지불하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올 때 갚겠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중에 누가 이웃인가를 그 잘난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셨다.

힘에 지나도록 그를 "돌보아" 주었다.
분에 넘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피했던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개 취급 당하며 서러운 대접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의 선행... 사랑...
그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며,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다.

나는 십리를 동행하는가?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고 있는가?
섬기고 있는가?

지금 나의 관심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과 거리가 멀다면 나의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한낱 "희망사항"일 뿐일 것이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