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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20. 13:12 Daily Bread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partiality)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favoritism)되이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hasty) 안수하지 말고..." (딤전 5:21~22)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내용이다. 그가 에베소의 교회에 있을 때에 이런 리더쉽을 발휘하라는 내용이었다.

편견, 즉 partiality 가 없어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심하면 극단적으로 치우친 생각과 결정으로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할 수 있다. 때문에 앞에 있는 사람은 '편견'을 갖고 대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말이다.

편벽, 즉 favoritism 이 없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본인의 기호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르는 자들에게 더 넓은 더 깊은 하나님의 말씀이 터치될 수 있도록,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솔, 즉 hasty 를 말하고 있다. 급히 서두르는 것과 조급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대학부 임원과 만남을 가졌다. 대학부와의 모임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할 때, 어색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 교환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바로 어제...

목사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부흥회를 하자는 것이다. 전화로 어제 대학부 임원과 대화의 내용을 전했고, 모임을 더 가진 후에 모색을 해보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후에 대학부 목사와 얘기를 통해 부흥회를 하자는 쪽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하라는 것이다. 물론 나의 의견을 묻긴 했지만, 내 의견이 관철될리가 없다.

답답하다. 성도들은 다양한 좋은 메시지를 들을 권리가 있다. 강사를 이미 정하고, 부흥회 날짜까지 잡아 놓은 상태에서...

위기는 바로 그것이 위기이다. 일방적인 일반화된 '영적 처방'으로 성도들을 생각하게끔 하고, 분별력 있게 만들지 않는 그것이 위기이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11 Daily Bread

선택이란, 사람마다 신앙의 수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자신들의 삶에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다.
우리들이 만나는 상황은 객관적이지만 그 상황을 해석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선택은 주관적이다.

그래서 선택은 상황을 압도하는 능력을 갖는 동시에
상황에 압도당하는 비굴함을 갖기도 한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09 Daily Bread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1:19~20)

holding on to faith and a good conscience...

오늘 아침 출근 길에서 운전 중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조그만 트럭이 길 켵에 세워 놓았던 자가용 차량의mirror를 깨고 말았다.빨리 가려고 하다가 그만 옆의 차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 차가 서서 어떤 조치를 취할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같이 출근하던 여직원은 차를 길 곁에놓고 통행에 불편을준 운전자를 탓하기도 했다. 맞는 말이다. 길 곁에 저렇게 주차를 해 놓았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리를 깬 트럭 운전자는 그냥 간 것이 정당화되거나 합리화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아저씨는 양심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간의 믿음과 신뢰를 버린 것이다.

그 차량의 주인이 나와서 본인의 차 rear view mirror 가 깨져 떨어진 것을 보면, 그 운전자 역시 세상 사람들의 양심 없음과 믿지 못할 세상이란 생각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유리 하나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그리고 이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직원은 저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저런 정도는 봐주어야 한다는 것... 내 차량이 그렇게 되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텐데...

누구의 잘잘못과 시시비비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 원활한 소통을 생각하여 주차하는 배려와 마음, 그리고 트럭 아저씨의 비양심,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조류인 듯 하다.

착한 양심... 착하다는 기준이 무얼까? 선함의 기준이 모호한 듯한 구절이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착한 것이란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으면 좋았었을텐데...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그것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름대로 설정한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될 수 없다. 사람 나름대로 착함의 기준이 다 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주차를 시켜놓은 운전자는 착하지 못하다. 역시 그냥 간 트럭 운전자 역시 착하지 못하다. 어떤 구체적인 기준이 없음에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선다. 그렇다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가?

난 착함의 기준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상사와 부하 직원간의 도리, 학교에서 선생님과 배우는 학생간의 도리, 그리고 집에서 아버지와 자식간의 도리... 지켜져야 할 그 무엇, 그것이 바로 '도리'이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지켜져야 할 그것들이 깨어져 버린다면 착하다는 것을 찾아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신앙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도리'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날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켜야 할 도리와 본분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착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이다.

본문에서도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그런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린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 있던 이단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을 왜곡하여 전한 이들이다. 때문에 궤변과 사변만 낳은 자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착하지 않은, 믿음과 양심을 버린 사람들이다.

파선한 배의 묘사를 통해 그들의 상태를 묘사한 것도 재미있다.

나에게 스스로 증거가 되는 '양심'을 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착한 사람이 되어, 또한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

마 5:16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잠 2:4~9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07 Daily Bread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이 구절의 앞부분에는벨사살 왕이 자기 아버지였던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함으로 7년을 짐승처럼 지낸 것을 알고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것을 보았는데, 오늘 이 구절에 역시 같은 표현인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즉,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았음에도 그의 여전한 모습을 관찰 할 수 있다.

다리오 왕이 새롭게 부임한 이후에 다니엘 외의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하였고, 결국 그의 신앙과 관련된 부분을 단서로 잡아 그와 같은 내용에 어인을 찍도록 왕을 부추긴 것이다.

그들의 뜻대로 일은 진행되었고, 다니엘은 결국에 사자 굴에 던져진다.읽으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마치 드라마에서 보던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 진 이후의 굴 안에서 어떤 상황과 형편이었는지의 묘사는 없고,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아껴 근심하고, 금식하고 하는 모습들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 잠시 다른 장면을 보여주고, 궁금증을 유발시킨 후 끝에 가서야 그 결과를 알게 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다니엘서에도 이 부분과 관련해서마찬가지로 다음 날 새벽같이 다리오 왕이 사자 굴로 가서, 슬피 울며 소리 질러 다니엘을 부르는 장면이 나오면서, 다니엘이 굴 안에서 대답하여 아직 살아있다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드라마에서의 그런 처리 기법은 이것을 보고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니엘의 그와 같은 행적은 나로 하여금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믿음의 견고함과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다니엘은 포기해야 할 것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타협해야 할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나이에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왔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것은 부모를 떠나 타지에 포로의 몸이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곳에서 배운 학문이 점성술 등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거스리는 학문을 배웠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의 이름조차도 "벨드사살" 이라는 즉, '벨이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소서' 라는 뜻의 바벨론 신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물론 그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그와 같은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 상황에서 나름대로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를 거절하는 지혜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처음의 그와 같은 여러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몇가지 것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이 구절은 그의 나이 80 쯤이 되어서의 기록이며, 그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는 왕의 어인이 찍혀 어길 시에 돌아오는 생명의 위협을 알면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는 모습이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분명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된다. 당시의 상황에서 '어인이 찍힌 조서'만큼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을까? 그것은 곧 그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믿음'이라는 것이지금의 현재 이곳에서의 상황과는다르지만그와 같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목에 칼이 들어오면서 나의 '믿음'을 드러내야만 하는 상황이 언제든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금 갖고 있다는 '믿음'을 테스트 한다는 사실... '믿음'은 '치장'이나 '수려한 말'로 표현되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디에선가도 그와 같은 생명을 담보로 치열하게 '믿음'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어찌되었든 다니엘의 믿음은 그러하였다. 알고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는... 그가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였을까? 자세한 기도의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전에 행하던 대로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가 사자 굴에 던져질 그 상황에서도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6:16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다니엘은 저항하지 않았다... 전혀... 그냥 던져졌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에 있다. 그렇다고 육체의 삶이 전혀 가치 없는 것일까?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그가 외칠 수 있는 말이라도 있지 않았었을까? '삶에 대한 애착'과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면서 순순히 응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일까?...
조그만 손해나 피해에도 마음 조급해하고 불편해 하면서 챙길 것 다 챙기는 나와 같은 부류와는 전혀 다른 분이다. 어쩌다가 무슨 일로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왜 바보처럼 가만히 있느냐"는 핀잔이라도 듣는 때면, "내가 참 많이도 어리석고, 아는 것이 없고, 계산적이지 못했다. 왜 나는 저 사람들처럼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같이 휩쓸려 가는... 나만 바보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될 때... 정말 그것이 잘하는 것일까? 그런 내가 다니엘과 같은 상황을 만나기다로 했다면... '믿음'이라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명리'에 밝은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것이 때론 나로 하여금 숨막히게 만든다... 가끔 나는 내가 '바보(?)'스러울 때가 좋은 때도 있는 것을...

결국 그는 살게 되었고, 그를 고소한 무리들은 오히려 그 사자 굴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며, 전과 다른 새로운 조서가 내려진다. 그는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흔들림 없는 견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 그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