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New life !
johnworld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05. 5. 21. 14:43 As it is

- 당신도 리더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

얼마 전 어떤 형제에게 “형제님, 비젼이 무엇이세요” 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형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저의 비젼입니다.”

요즘 신앙 좋다는 많은 젊은 친구들의 하나같은 비젼은 유명한 지도자내지는 중요한 리더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개인적으로 사역을 하다 보면 리더가 되지못해 안달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니까 말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소위 말해서 이 시대에 잘 나가는 교회들이나 뜨는 교회들까지도 앞 다투어 각종 지도자 세미나나 지도자 학교 등을 열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정말 현 세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치를 지배하는 성질의 것인 것 같다고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세대가 수십 번 바뀌어도 아직까지 전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유명한 지도자이시라는 것과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 비젼이 분명 주께로부터 온 비젼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은데 사실 난 이러한 고백을 들을 때마다 좀 섬뜻한 기분이 든다.
지도자, 리더가 되는 것이 비젼인 젊은이들이 정말 리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마 23:11 -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 막 9:35 -
“너희는 그렇지 않을 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찌니라” - 눅 22:26 -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눅 22:27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리더는 고상한 말로 쓴다면 섬기는 자, 양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자라고 말들 하지만 조금 더 정신이 확 깨는 용어를 굳이 쓰자면 나는 리더는 파출부 격이고 몸종이며 보디가드 격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들 다 쉴 때 일하는 자, 남들이 다 먹고 나면 그제서야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자, 남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야 하는 사람들.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지도자며 리더들의 삶이다. 인정받는 지도자란, 이러한 사람들보다도 더 무식하게 자기를 버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텐데 정말 지도자가 되는 것이 그렇게도 간절한 소원일까?

나는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러한 예수님의 온전한 진리를 가지고서 리더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그가 리더가 되게 하기 위한 무수한 노력이라도 열심히 돕고 싶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본질의 변화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리더가 되기를 다툰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할 것이다.

권위에 대한 영적인 무지에 사로잡힌 자들은 늘 사람을 대단한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노력하는데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유능한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심지어 그러한 사람들과만 사귀려는 그런 경향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대단하게 보는 사람들과는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드시 내가 연약해 질 때 나를 버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잘못된 이해, 권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위험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은 본인들이 늘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뭏튼 요즘 세대처럼 리더 되기를 좋아하는 때에 주님나라가 오게 된다면 무척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 것 같다고 본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예, 저는 어디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던 무슨 리더입니다.” 라고 대답들을 할 것 아닌가?
나는 똑같은 대답들에 식상해 하시는 주님 앞에 내가 대답할 차례가 올 때 주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실까봐 무척 겁난다.

“너도 리더냐?”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 마 23:10 -

posted by johnworld
2005. 5. 21. 14:42 As it is

이 책을 만난 것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과 선택과 갈림길에서 나로 하여금 내가 왜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Guide'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필립 얀시와 유진 피터슨과 같은 영성이 내게도 있다면... 최근에는 조호진 목사님이나 김호경 교수와 같은 날카롭고 분명한 메시지의 소유자가 되길 바란다. 그런 분들의 영성과 성경을 보는 독특한 해석과 적용이 오늘 나에게 산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신앙의 삶이 그렇게 쉽게 '믿음'과 결부되어져서 결판날 것 같으면 지금 겪는 과정의 해답이 뻔한 것이며 단순하다. '믿음이 없어서니까...'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 외적인 문제들을 그렇게 공식화 시키고 일반화 시켜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면, 오해이다. 성경은 수학과 같은 공식이 나오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하는 기도와 말씀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선동하는 사람들의 얘길 들어보면, 천편일률적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내 경험상... 그런 것들이 내 삶에 힘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나오는 그들만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옛 선인들의 경험을 오늘 나의 경험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성경은 내게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때문에 올바른 성경 해석과 관찰과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일차적인 문자해석에 얽매이는 접근은 우리로 하여금 생동감없고 경험없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를 만들 뿐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내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기 위한 하나님의 속성을 분석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오늘 나는 그 분을 만나야 한다. 그 분 역시 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며,나 역시 그 분의 사랑이 필요한 때문이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1. 14:41 As it is
국도에서 경찰이 속도 위반 차량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차량 하나가 너무 느리게 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차를 불러 세웠더니 4명의 할머니가 타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운전을 하고 나머지 세 할머니는 뒷자리에 앉아서는 손발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왜 잡는 건가?

경찰:여기서는 그렇게 느리게 달리면 안돼요.

할머니:이상하다…. 분명 이길 처음부분에 '20'이라고 써 있던데? 그래서 20㎞ 속력으로 왔는데 뭐가 잘못 됐어?

경찰:아! 그건 국도 표시예요. 여기가 20번 국도 거든요.

할매:아,그래? 거 참 미안하네….

경찰:근데 뒤에 할머니들은 왜 손발을 부들부들 떨고 계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운전하는 할머니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좀전에는 210번 국도를 타고 왔거든."

posted by johnworld
2005. 5. 21. 14:35 As it is

위대한 음악가 쇼팽은 그의 스승인 엘서너의 평가대로 본래부터 음악에 있어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다 쇼팽은 피눈물 나는 노력을 바쳤다. 그러나 그가 일생에 걸쳐 위대한 쇼팽일 수 있었던 것은 값싼 인기를 위해 음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양심을 배반하지 않았다.

로마 감옥의 바울은 쇼팽과 같은 데가 있었다. 그는 자신과 자기 안에 거하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데마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 중히 여기는 양심이 파선해 버린 사람이었다.

누구든지 자기 신앙 양심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외적으로 아무리 어려운 고통과 실망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생의 목적에 사로잡힌 사람, 내면에 신앙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종일관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이 어찌 끝까지 인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신앙의 힘이 없이 어찌 현재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그러한 신앙이 주는 긴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네로 황제와 초라한 감옥의 바울을 비교해 보았을 때, 바울이 네로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바울의 복음이 로마 제국마다 오래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세상 사람의 눈에 미친 자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현실이 되고 말았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세계를 내다보는 사람은 분명히 시종일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 성구단상 / 옥한흠 외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