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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7. 23:02 Daily Bread

출처 : http://cafe.daum.net/pastors/83o/5440

#이 소논문은 연구논문집에 개제된 학술적인 글입니다만 여러분의 설교에 조금이나 도움을 주기위해서 올렸습니다.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편애인가?

인물구조로 본 창세기37:2-4절


1. 서론

요셉을 예수님의 모형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교회의 지지를 받다가, 요즘 역사적-문학적 방법론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학자들로 인해서 이견해가 바뀌고 있다. 이는 성경본문에 나타난 요셉의 삶이 예수님의 모형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요셉의 천방지축 같은 삶으로 인해 형들이 그를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가정의 불화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견해가 옳은 것인가?

창세기 37-50장 전체를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요즘 공시적 방법(synchronic approach)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1) 이는 전체구조가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고, 내용과 주제의 통일성과 흐름이 자연스럽게 구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2) 이들 중 몇몇 학자들은 창세기에 기록된 단어 ‘톨레돗’(תודלת-자손, 역사, 혹은 계보)이 새로운 사건 혹은 구조의 시작 표시로 보고 창세기 37-50장을 구조적 관점에서 주석한다.3)


2. 문제제기

창세기 37장2-4절을 주해함에 있어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는 본문의 범위에 대한 질문이다. 현제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는 37장 1절이 본장의 시작으로 되어있는데, 2절을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4)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2-4절은 창세기37-50장 전체구조의 서론으로 삼을 수 있을까? 둘째는 본문의 주제에 대한 질문이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일러바친 것이 고자질인가? 아니면 잘못하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고한 것인가? 만일 사실대로 말했다면,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편애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자는 '내러티브 설교'의 특징들인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 이러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 그리고 인물의 환경 등을 구조의 요소로 삼아서 구성된 인물구조를 구조분석방법의 목적에 따라 먼저 분석한 후. 구조와 의미를 논하면서 위 문제들을 풀어 갈 것이다.5)


3. 본문의 범위

우선 창세기 37장 1절의 위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몇몇 학자들은 창세기 37:1절을 ‘에서 톨레돗’(36:1-37:1)의 결론으로 보고 2절에 나타난 ‘야곱 톨레돗’의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6) 창세기 전체본문에서 사건이나 족보의 시작을 알리는 '톨레돗'(תודלת) 문구가 10번 나타나는데,7) 이러한 문구는 전통적으로 창세기를 저술한 저자의 저술 방식으로 보았다.8) 그러나 이들은 확실한 증거를 보이지 못하다가 요즘에 공시적 방법의 학자들에 의해서 ‘톨레돗’ 문구가 단락은 물론이요 하나의 구조를 형성하는 시작표시 혹은 표제기능으로 보게 되었다.9) 필자는 ‘야곱 톨레돗’ 문구를 새로운 본문 혹은 구조의 시작 표시로 보려한다.

그렇다면 37:2-4절은 본문의 전체구조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10) 구조적으로 본문을 주석하는 학자들 중에서 4절까지를 서론으로 보는 학자는 코츠(Coats)와 험프리스(Humphreys)인데, 이들은 각각 그들의 구조인 “편집된 구성체”(redactional unity)와 “포물선”(trajectory)구조 안에서 이야기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11) 또한 화이트(White)는 그의 설화론(Narratology) 관점에서 이러한 부분에는 직접대화(direct speech)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전체내용의 서론으로 본다.12) 또한 몇몇 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인, 아버지 야곱/이스라엘, 요셉, 그리고 형제들의 반복이 창세기 50장에도 나타나는데 이러한 인물들의 등장을 요소로 해서 본문의 서론과 결론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13) 이런 점에서 창세기 2-4절을 전체구조의 서론과 첫 번째 병행구조의 시작으로 보고 본문을 주해함에 있어서 우선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4. 인물구조분석

본문을 내러티브의 특징상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 그리고 말과 행동 또한 인물들의 상황을 구조의 요소로 삼아서 구성된 인물단위를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인물들을 병행구조로 나타낼 수 있다.


A 야곱-요셉 <아버지와 아들관계> 2a

B 요셉-형들(빌하/실바) <요셉의 로에(돌봄)의 역할> 2b

C 요셉/형들-아버지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고함> 2c

A' 이스라엘-요셉 <아버지와 아들관계> 3a

B' 아버지-요셉(라헬) <요셉의 계승자 역할> 3b

C' 형들/아버지-요셉 <형들이 요셉을 미워함> 4


위 구조는 ABC가 반복되는 병행구조로서 아버지 야곱/이스라엘, 요셉, 그리고 형제들이 인물구조의 요소들로 구성되어있다. 개인적으로는 요셉이 6번, 아버지/야곱/이스라엘이 4번 형들이 두 번 나타난다. 특히 요셉은 모든 인물구조의 요소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버지와 요셉과의 관계는 4번 나타나고 요셉과 형들의 관계는 두 번 나타난다.

첫 번째 선형구조(ABC)는 야곱의 자녀들 중 요셉을 중심으로 몇몇 자녀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요셉과 아버지의 관계로 끝을 맺는다. 이어서 A'B'C'에서는 앞에 나타난 인물 관계들이 조금 변경 되어 나타나면서 반복된다. 두 번 반복되는 선형구조를 종합해 보면, 아버지 야곱/이스라엘이 요셉과 관계되고 요셉은 형들과 관계된다. 결국 한 가족의 멤버들이 요셉을 축으로 두 그릎으로 나뉘어서 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 속에서 개인적으로는 요셉이, 인물관계에서는 야곱과 요셉이 전체구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가정의 가장으로서 사랑을 주는 자의 상징적인 역할과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는 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와 요셉의 관계에 갈등을 느끼고 동생 요셉과 대립된 관계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는 병행구조의 각 단위들을 비교하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들 그리고 말과 행동들이 자세하게 나타난다. AA' 에서는 야곱과 요셉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아버지 야곱/이스라엘이 다른 자녀들 10명(동생 베냐민은 제외하고)보다 요셉에게 더욱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에서는 야곱의 톨레돗 곧 야곱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의 자녀들 중 요셉의 열일곱 살의 삶을 부각시키고 있다. A' 에서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요셉을 다른 자녀들 보다 더 사랑(בהא)한다고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14)

BB' 에서는 요셉과 몇몇 형들 그리고 요셉과 아버지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의 역할들이 엿보인다. B에서는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다”고 개혁한글판에 번역되어있지만,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요셉이 목장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을 돌보고 있다”라고 번역한다.15) 만일 이러한 번역이 원문에 가깝게 해석된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요셉의 ‘로에’(הער/돌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6) 그러나 여기서 야곱의 본처의 자녀들 중 레아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지 라헬의 첫째 아들인 요셉의 열일곱 살의 성실한 삶을 강조하면서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밝혀준다. B'에서는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는 이유와 거기에 따른 채색옷인 ‘케토넷 파씸‘ (םיספ תנתכ)을 입히는 모습이 묘사된다. 특히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는 이유를 채색옷을 지어 입히는 모습과 함께 ’이는 노년의 아들이기 때문‘(םינקז-ןב יכ/키 벤 저쿠님)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여기서 요셉을 ’노년의 아들‘(KJV) 혹은 ’노년에 낳은 아들‘(NIV)로 설명하는데 물론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B에서 언급된 후처들인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의 구조적 비교와 대조 입장에서 야곱의 본처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라는 뜻도 내포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두 인물 관계들의 요지는 요셉이 아버지 같은 로에의 역할자로서 형들을 돌보고 있고, 아버지는 요셉을 후계자로 삼는 가운데 계승자로서의 요셉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다.

CC' 에서는 요셉과 아버지 그리고 형들과 요셉의 관계들이 비교된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대비되는 모습들이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말하고 있고, 반면에 형들은 그러한 보고로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작용해서 사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요셉을 미워하다 못해 서로가 언행이 불편할 정도이다. C에서는 요셉이 아버지에게 형들의 과실을 고한다. 여기서는 요셉이 고한 형들의 과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혹은 거짓으로 과실을 고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C'에서는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다(אנש). 이는 형들이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בהא)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 확실치 않지만, 사랑과 미움이 서로 비교 대조되면서 갈등이 싹트고 있다. 이 부분은 병행구조의 특징상 중심 주제를 이루는데,17) 미움과 사랑의 대응 관계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5. 본문의 메시지


우리는 구조분석의 목적에 따라서 본문의 구조와 의미와의 관계를 구조의 특징과 연결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에 나타난 구조의 흐름 속에서 야곱가정의 긴장관계가 나타난다. 인물병행구조의 특징에 따라 주제가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되는데, 이는 요셉과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한 요셉과 형들과의 관계가 사랑과 미움으로 인한 가정 안에서의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집안문제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가? 요셉의 고자질 때문인가? 아니면 아버지 야곱의 편애 때문인가? 과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37장 2절에서 ‘야곱 톨레돗’이 시작된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톨레돗의 의미가 후손 혹은 후예들에 대한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의미 안에서 보면 ‘야곱 톨레돗’은 야곱의 자녀들에 대한 삶을 다룬다.18) 앞에서 10번의 톨레돗 사건들 중에서 족장들에 대한 '톨레돗'들(11:27-25:11; 25:19-35:29)은 모두 후손들의 삶을 보여준다. 첫 번째 족장인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데라 톨레돗' (11:27-25:11)안에서 다루고 있다.19) 그와 관계된 사람들 특히 사라와 롯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과 후계자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는데, 이들 중 특히 이스마엘과 이삭 중 누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계자인지를 다루고 있다. ‘이삭 톨레돗’(25:19-35:29)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족장인 이삭과 그의 아내와 관계만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의 삶을 다루면서 특히 그들 자녀 중 누가 이삭의 후계가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다룬다. 이와 같이 ‘야곱 톨레돗’도 역시 유사하게 그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후계 구도에서 과연 누가 야곱을 이어서 후계자가 될 것이냐를 다루고 있다. 12명의 아들들 중에 장자인 르우벤이 후계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자녀인지에 대한 주제의 흐름이 구조와 맛 물려서 통일성 있게 전개되어진다.20) 이러한 후계자 구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요소로서의 자손과 무관하지는 않다.21)

왜 해필 요셉이며 또한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인가? 험프리스(Humphreys)는 이러한 점을 '계승모티프'(succession motif)로 풀어간다. “계승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요셉이야기 이전에 기록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가장어린 동생에 의해서 형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주제들에 대해서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한다.”22) 앞에서 전개된 이야기들에서 보면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는 결코 인간의 서열에 있지 않다. 이러한 신학적 주제가 인물 병행구조 속에서 내포되어 있는데, 야곱과 요셉과의 관계와 역할 속에서 강조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야곱의 톨레돗’에서는 매우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야곱의 자녀들에 관한 삶을 서술하겠다는 시작을 알리면서 열일곱 살의 요셉을 곧 바로 조명하는 것이 이러한 점을 잘 반영한다. 이것은 후계자 구도를 서론에서 강화시켜 보이려는 저자의 구조적 고안으로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아버지와 요셉과의 관계가 4번이나 주도적으로 나타남이 바로 이러한 ‘계승모티프’의 중요성을 구조의 의미로 부각시키려는 저자의 특별한 고안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험프리스(humphreys)는 저자가 요셉과 그의 가족들에서 "이러한 계승 관계를 보다 넓은 의미 안에서 경쟁 모티브(rivalry motif)로 더욱 강화시키려 하였다"고 말한다.23) 지금 본문의 상황은 여러 주제들 중 특히 약속의 주제를 다루는 전체구조의 서론으로서 야곱이 후계자 선정문제로 인해서 고민하는 가운데서 요셉을 주목하고 있다. 곧 형들과 요셉간의 장자권 경쟁관계를 구조적으로 소개하기 위함이다.24) 필즈(Fields)는 이러한 ‘전형적인 모티프’는 종종 이야기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25) 이러한 견해로 볼 때 본문의 인물병행구조는 후계자의 선정 개념인 ‘신앙경주 모티프’를 본문에 반영한 저자의 서론적 의도로 간주될 수 있다.26)

만일 그러하다면 야곱의 후계자 선정기준과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이전 족장들의 사건들 안에서 이러한 모티프는 이미 사용되어서 서술 되었다.27) 현재 야곱의 고민은 큰 아들 장자 르우벤, 둘째 시므온, 그리고 셋째 레위가 과연 자신을 이어서 장자권을 물러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스타인베르그(Naomi Steinberg)는 레아의 자녀들을 “가능성 있는 상속자들”(potential heirs)로 여기는 반면, 요셉을 “우선권이 있는 가능한 상속자”(potential primary heir)로 주장한다. 그러나 첩의 자식들에게서 낳은 네 명의 형제들은 상속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한다.28) 이런 점에서 장자권 계승에 대한 야곱 가정의 긴장감은 분명히 있다. 이들은 이미 앞 장들에서 아버지께 큰 누를 끼쳤다. 상속가능한 아들 중에서 첫 번째 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을 범하여서(35:22), 아버지가 이것을 마음에 두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을 장자 르우벤의 심정에서 읽을 수 있다(37:22).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다 못해 죽이려고 한다(37:19-20). 그리고 기다렸다가 요셉을 죽이는 계획을 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르우벤이 동생들에게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넣자고 만 하였다(37:21-22). 이러한 ‘대안적 계획’29)은 요셉을 살려서 아버지께 데려가서 공로자로 인정받아 과거의 죄를 사함받고 장자권을 되찾으려는 속셈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22b)는 계획 이었다.30)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의 문제는 창세기 34장에서 잘 보여준다. 세겜의 추장의 아들이 여동생 디나를 강간하여 괴로운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 살려준다고 해놓고 할례 받아 고통당하는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처 죽인 장본인들이다. 이에 35장에서 아버지 야곱은 크게 실망하면서 식구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가서 모두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삶의 모습들이 구체적으로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유언하는 본문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르우벤, 시므온, 그리고 레위 모두는 저주를 받게 된다(49:3-5). 이와같이 야곱가정의 장자권 문제 곧 계승문제가 전체주제들의 흐름 속에서 처음 시작하는 서론부분에서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야곱과 요셉과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한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랑을 편애라고 생각한다.31) 그래서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도 편애의 상징물로 본다.32) 이는 요셉이 형들과 함께 양을 치다가 되어진 형들의 잘못들을 아버지께 고자질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3) 그리고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원인이 노년에 낳은 아들로서 그가 사랑했던 라헬에 대한 애착심의 발로로 여긴다.34)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물론 이러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해도 그의 아버지가 그를 다른 자녀들 보다 더욱 사랑한 이유는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서도 그녀의 자녀인 요셉을 불쌍히 여기다 못해 채색옷을 요셉에게 지어 입혔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론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적인 관점에서 ‘신앙경주 모티프’로 보면, 야곱의 계승자 선택의 조건이 육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들어난다. 그렇다면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노년의 아들”(KJV)이기 때문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로벤탈(Lowenthal)은 이것을 늙어서 낳은 아들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셉의 나이는 다른 형제들과 비슷하여서, 자기 동생 베냐민과 나이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은 요셉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한다.35) 실제로 42:10절에 보면 형들이 애굽에 곡식 사러 갔다가 요셉의 시험에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며,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와 함께 남아있는 베냐민을 아버지가 노년에 낳은 아들(벤-저쿠님)이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베냐민에 대한 이러한 적용은 어느 정도 수용 할 수 있지만, 요셉에게는 로벤탈(Lowenthal)이 말한 대로 “어색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강규성은 그의 논문에서 ‘벤-저쿠님’을 “아주 특별한 아들임을 표현하는 용어”로 제안한다.36)

우리는 야곱의 후계자 선정 조건에 이러한 특별함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요셉이 특별한 아들이라면 무엇이 그러하다는 것일까? 요셉이 형들을 도우면서 함께 잘못을 저질러 놓고 아버지께 고자질 한 것일까? 아니면 형들이 잘못을 행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께 사랑받기 위해서 거짓으로 보고한 것인가?

웬엄(Wenham)은 요셉이 형들에 대한 보고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단어 디바(הבד-보고하다)는 부정적인 개념에서 자주 쓰인다고 하면서,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그의 형들에 대해서 거짓으로 보고” 했다고 강조한다.37) 결국 이 말은 요셉이 형들이 나뿐 짓도 안했는데 거짓말로 아버지에게 보고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형들의 잘못이 있다면 어떤 잘못인지 혹은 무엇을 말했는지는 본문 전체에 흐르는 내용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을 우선 37장 이후에 펼쳐지는 애굽에서의 요셉과 형제들간의 긴장 관계에서 보면, 형들이 요셉의 개인적인 잘못 혹은 형들과 함께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형들이 요셉의 애원에도 팔아버린 것을 죄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스파이로 몰려 감옥에서 지낸 것도 이 죄 값으로 본다(42:22). 특히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며 화해할 때도 언급하지 않는다(45:1-15). 본인이 죽기 전인 50장에서도 그러하다. 오히려 형들이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요셉이 해할까봐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요셉과 형제들의 애굽에서의 관계에서 보았을 때, 요셉이 형들이 잘못 하지 않았는데 거짓으로 아버지께 고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요셉이 장자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거짓보고를 했다면, 왜 하필이면 아버지의 첩의 자식들에게 했을까 하는 것이다. 만일 요셉이 그렇게 할 정도로 나쁜 아들이었다면, 첫 번째 부인인 레아의 여섯 자녀들을 모함해서 그들의 계승권을 박탈시키는 작전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38) 그러나 사실상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은 결코 장자권을 계승할 수 없는 신분들이다.39) 결과적으로 요셉이 구태여 첩의 아들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간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요셉의 인간성을 ‘신앙경주 모티프’와 인물구조와의 관계에서 풀어 볼 때 요셉이 아버지께 형들의 과실을 고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와 그들과의 관계를 나쁘게 하기 보다는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앞으로 이러한 의도를 애굽에서 요셉의 두 번의 시험에서도 나타나지만,40) 요셉은 형들로 깨닫게 하도록 하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열일곱 살의 요셉의 삶을 이야기 처음부터 그리고 가까이 조명하는 이유가 그런 점에 있다. 요셉이 미숙하여 천방지축 같은 아이임41)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죄를 멀리하고 의로운 자로 살아가는 요셉의 꿋꿋한 신앙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요셉의 로에(돌봄)의 역할에서 잘 나타난다. 양치고 있는 형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 하였다는 뜻이다. 로에(돌봄)의 역할을 하면서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어리석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노년에 열두 자녀들 중 후계자를 선정하는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요셉이 이러한 성실하고 의로운 아들임을 깨닫게 되고, 그를 다른 자녀들 보다 더욱 사랑할 뿐 아니라, 후계자로 삼아서 신앙의 축복을 그를 통하여 전수하려는 목적으로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이다.42)

아버지 야곱이 그래서 요셉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점을 ‘노년의 아들’(KJV)이라는 단어 ‘벤-저쿠님’과 ‘신앙경주모티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러한 의도를 더욱 자세하게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주석가들은 ‘늙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해석하는데 리브로스(Libros)의 방대한 히브리어 단어사전에서 저쿠님 (םינקז)을 “노년의 단계”(stage of old people)로 번역한다.43) 이 뜻은 ‘노년에 낳은 아들’(NIV) 이라기보다는 야곱이 노후의 삶의 단계에 살고 있음을 강조하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필슨(Phison)이 말하기를 탈굼 온켈로스 (Targum Ongelos)는 ‘저쿠님’을 늙은 나이로 보지 않고 ‘지혜자’, ‘재판관’, 혹은 성문에 않아 있는 ’장로‘로 사용하지만 이러한 뜻으로는 창세기에 사용되지는 않았다며, 야곱이 노년에 낳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한 미숙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44) 곧 나이 관점에서 보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저쿠님'을 황혼의 시기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야곱은 더욱 후계자를 원했고 요셉의 의로운 모습을 후계의 조건으로 삼은 것이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노년의 단계’ (벤-저쿠님)에 성실하고 또한 의롭게 사는 아들로서, 아버지가 그를 다른 자녀들 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고, 급기야 그에게 계승자의 표시로서 채색옷을 입혀주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45)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입힘에 대해서, 가레트(Garrett)는 야곱이 요셉에게 장자권을 수여하려는 의도임을 인정한다. 이는 장자인 르우벤이 아버지께 이미 큰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이어서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46) 만일 장자 르우벤에 대한 아버지의 미움이 그의 죄로 인한 것과 르우벤의 어머니 레아를 야곱이 싫어하기 때문이라면, 역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요셉의 성실하고 의로운 삶과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므로 요셉을 후계자로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47) 이런 점에서는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랑과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은 후계자의 선정 기준이 영적인 면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육적인 면도 더불어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48) 창세기 49장에서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자녀들의 삶의 기준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하는 그의 마지막 유언 속에서 이 사실을 불 수 있다. 또한 채색옷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49) 후계자 선정에 대한 정당한 권위를 상징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종교적-사회적 요인들 안에서도 잘 나타난다.50)



결론

이와 같이 우리는 ‘신앙경주 모티프‘가 인물구조 안에 나타난 아버지와 아들관계 안에서 순수한 영육간의 사랑관계를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의 영적인 면의 아름다움과 육적인 면의 사랑스런 아내의 아들에 대한 양면이 야곱의 후계자 선정 구도의 요소로 작용했음을 구조적 관점에서 찾아보았다. 이런 점에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서로의 언사가 불편하게 되고, 또한 그 가정에 평화가 상실 되어 가는 것은, 야곱의 육적인 편애 때문이라기보다, 요셉의 형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아들 요셉을 사랑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물병행구조의 특징상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과 미움의 갈등관계를 주목하게 한 것이다. “그 형들이 아버지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בהא)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אנש)“하였다(37:4). 구조의 특징상 결국 이것은 믿음 없는 요셉의 형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지, 요셉의 고자질로 인한 혹은 거짓으로 형들의 잘못을 보고해서 얻어낸 아버지의 편애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분석에서 얻은 결론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사랑한 것은 편애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아들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는 역할자로 강조되고 있고, 또한 요셉은 평화를 깨는 문제아가 아니라 야곱의 황혼의 시기에 의로운 아들로서 역할을 한다. 결국 불신에서 나온 형들의 불평이 아버지와 가족 간의 긴장을 조장하고 있고, 또한 그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간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