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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20. 13:42 As it is

어제 기독교 방송을 듣다가 한 진행자가 자기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하나님이 자기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아이들도 사랑한다는 걸 배웠다는 것이다.
그 아이 하는 말
"나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아이들도 사랑하는 걸 보니까... 하나님은 바람둥이 예요..." 그러더란다....

그 애가 바람둥이가 뭔지를 알고나 그랬던걸까? 아이의 시야로 대답한 말이긴 하지만.... 무척이나 재밌는 말이다.

내가 만일 교사였다면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을까?

하나님은 자신만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아이의 마음이.... 단지 아이이기 때문에 그런 얘길 한걸까? 우린 때로 하나님이 특별히 나를 사랑하셔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음성을 듣는 그런 특별한 존재로 영성의 우월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이의 마음뿐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욕심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더 독점하여 희소성의 가치내지는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실 수 있는 하나님...
다른 사람을 더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보다 더...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난 왠지 하나님으로 부터 소외된 것이란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은 정말 바쁘신 분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야 하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요일"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이 딱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러실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 분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변함없으신 사랑... 한결 같으신 사랑... 물론 나보다 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실 수 있으시기도 하지만... 나에게 대해서는 여전하신 한결 같으신 분이란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할 수 없다. 독점하기엔 그 분의 사랑이 너무 많고 크고 넘친다. 아마 혼자 독차지 하면 넋을 잃고 그 사랑 다 누리기도 힘들것이다. 그럴바엔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나누어 주는 편이 훨씬 유익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때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기대 이상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때 부담이 되기도 하는 것이...

어찌되었든 우린 그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우린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이 신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34 Daily Bread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진정이라면 그분이 하신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분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말한다면... 두 번씩이나 지적적으로 보리떡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셨는데,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시다고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 주셨는데, 그 가족들에게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던 사람들, 예수님의 가르침에 분노를 느껴 그분을 죽이려고 모의했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은 위대한 일들을 많이 행하셨다. 그분은 세상을 뒤흔들어 놓으셨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분이 세상에 미치고 있는 영향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크다. 예수님의 생애는 인류 역사를 기원 전(B.C)과 기원 후(A.D)로 양분한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그분만큼 많은 일을 하지는 못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도 뭔가를 이룩해 왔다. 역사에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성취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전기를 읽고 있다.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이 어떻게 그런 위대한 일들을 해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을 사셨으며, 그와 같은 일들을 행하셨을까? 어떻게 이적들을 행하셨을까? 어떻게 그렇게 권세 있게 말씀하셨을까? 어떻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5:19).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한복음 8:28).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요한복음 5:30). 이 여러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일을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나중에 이 사실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 않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10).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셔서 그분의 일을 하신 것이다.

전구는 빛을 발해야 한다. 이것이 전구의 존재 목적이며, 이 목적을 위해 전구를 산다. 전구는 모양이나 크기가 가지각색이고, 밝기도 다양하다. 그런데 빛을 발하는 것이 전구의 목적이긴 하나, 전구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구를 사서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빛을 내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하고 말 것이다. 빛을 내도록 만들어지긴 했지만, 전구 스스로는, 다시 말하면 독립적으로는 빛을 낼 수 없다. 전구는 전원에 연결되었을 때라야 빛을 발하도록 만들어졌다. 전구를 쟁반 위에 두었을 때 빛을 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구 자체에 무슨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구는 그렇게 해도 빛을 발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전구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즉 그것을 소켓에 끼우고 전기가 통하게 됐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할 것이다.

인간들도 그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발할 때만 원래 의도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전원으로부터 분리된 전구만큼이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전구와는 달리 인간은 그럭저럭 살아가긴 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아들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일을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우리는 죄는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시게 된다. 우리 속에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원래 의도된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다. 우리는 전원에 연결된 전구처럼 되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된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37)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32 Daily Bread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실제적으로 생각하면서 나도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면 너무도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게 되고, 좌절감과 무력감과 환멸감만 더 느끼게 된다.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그가 정식 축구팀과 경기를 한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이 생각했던 만큼 축구를 잘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만일 국가 대표팀이나 세계 일류팀과 축구를 하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축구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고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며, 공 한 번 잡아 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더 높은 수준의 사람들과 경기를 할수록, 또 그들의 수준과 자기의 실력을 비교할수록, 더욱 더 그는 자신이 실력이 없고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를 알게 되면, 감탄을 느끼며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자하는 진지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본을 따르고자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선한 의도로 한 이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좌절감만을 안겨 준다. 예수님의 완벽한 삶을 살펴보며 그 본을 따르고자 애를 쓰면 쓸스록 더욱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이 위대하고 내가 당연히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예수님의 삶과 나의 삶 사이에는 너무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오늘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희망이나 도움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그토록 아름다운 삶을 사셨을까?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놀라운 사실들을 말씀해 주셨다.

먼저 자신의 일에 대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한복음 5:19)고 말씀하셨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수천 명을 먹이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놀라운 일들을 많이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자신의 심판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한복음 5:3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놀라운 분별력을 알고 계셨으며, 사람들도 예수님이 자기들의 마음을 꿰뚫고 계심을 알았다. 그분의 생각은 언제나 옳았다. 그러나 그분은 심판에 대하여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하셨다.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한복음 8:28).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놀랐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한복음 7:46).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나사렛의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다(누가복음 4:22).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신선했고 심오했으며, 중심을 꿰뚫었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아무것도"라는 말이 이해가 어렵다. 그 말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힘빠지게 하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는 아주 중요한 말이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설명하는 가운데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립보서 2:6~7).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우셨다. 곧 아무것도 아닌 자로 여기셨다.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셨다면, 그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셨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행치 않으셨다.

잠시 생각해 보자. 혹시 자신이 무용지물이라는,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해 본 적이 있는가? 베드로가 고기를 잡기 위해 애쓴 후에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습니다(누가복음 5:5)라고 말씀할 때 가졌던 것과 같은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애써 일하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열심에 열심을 더하였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자신! 아마도 그 사실을 선뜻 인정치 못하도록 막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뭔가를 이루기를 기대하고 계시리라는 생각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능을 인정하기보다는 더 열심히 노력해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좋은 소식이 있다. 이것이 복음의 전부는 아니지만 아주 주요한 부분이긴 하다. 즉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 당신은 위대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셨으며, 그분의 인간적인 자원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 아니 당신보다 조금도 더 능력이 많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큰 격려를 줄 것이다. 우리 자신도 자신의 인간적인 자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5:5)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것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안다"(로마서 7:18)고 했다. 선한 일을 행하는 것에 관한 한, 바울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위대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는, 심령이 가난해지며(마태복음 5:3),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자원만으로는 자신이 창조시 의도된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마땅히 하기로 되어 있는 것들을 행할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이다.

posted by johnworld
2005. 5. 20. 13:31 Daily Bread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문맥에 때라 약간씩 의미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행하시는가와 관계가 있다. 간단히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맞혀야 할 과녁인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나타내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선은 각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선은 또한 각 사회의 통념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선은 절대적인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마가복음 10:18) 따라서 어떤 것이 선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어떠하심 즉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기 때문이며, 어떤 것이 악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죄가 죄임을 알게 만드는 과녁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에 죄를 다룰 수 있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