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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1. 22:57 As it is
정운형

주일 설교를 끝으로 뜨인돌교회를 사임합니다. 사역지를 옮기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분간 목회를 쉬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순간적, 충동적 결정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며 고민한 결과입니다. 사실 정준경 담임목사님과는 작년 말에 교회를 사임하기로 작년 10월에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필요에 따라 잠시 사임을 보류하였고, 올해 7월에 후임자가 결정되고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소 2년 이상 목회 현장을 떠나서 목사로서의 소명에 대해 숙고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지금 떠남을 결심한 것처럼, 제 마음과 환경에서 돌아옴에 대한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돌아오려 합니다. 저를 목사라 불러 주는 성도들과 저를 아끼는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몇 줄 글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 시점에서 저의 소회를 밝히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을 위한 생각의 정리가 될 수도 있겠지요.

작년부터 마태복음 6장 '외식하지 말라', 야고보서 3장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두 메시지가 제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습니다.

골방으로 들어가야 할 때

사실 저는 다른 목사에 비해 '자유분방하다'는 평을 자주 듣습니다. "목사님은 목사 같지가 않아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8월, 마태복음 6장으로 설교하며 돌아 본 저의 신앙은 타인에 대한 과도한 의식, 그리고 외식이었습니다. 목사니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 겁니다.

이러한 강박은 의식, 무의식중에 스스로에게 지운 '(한국교회에서의) 목사의 십자가'입니다. 한국교회의 정서를 감안할 때, 목사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신격화되어 버린 부류입니다. 저를 비롯한 수많은 목사들은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십자가를 지고 휘청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저 자신에 대한 연민이 생겼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된 저의 삶은 평생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온 셈이지요. '너는 목사 아들 아니냐', '나는 목사가 아닌가.' 언제나 제 안에 있던 생각들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깨닫지 못했으면서 깨달은 척,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척, 무엇보다 엉망인 삶을 감추려 안 그런 척 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골방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렸습니다. 목사입네 하며 남의 눈치 보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기 전에 골방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간 저는 이런 고백을 자주 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세우신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목사라는 타이틀은 저를 변화시키고 성장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쩌면 목사였기 때문에 이만큼 사람 꼴 하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목회를 접지 않는 한, 외식하는 신앙을 버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새벽 기도회 설교를 마치면 강단에서 개인 기도를 합니다. 어떤 날은, 아니 거의 모든 날이 그렇습니다. 기도를 마쳤는데도 강단을 내려오지 못합니다. 목사가 기도도 안 한다는 비난이 싫어서 그런 거지요. 너무 빨리 내려가면 혹시 누가 상처받지 않을까 위안도 합니다. 기도를 마쳤음에도 그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저의 모습, 한심하기도 비참하기도 했습니다.

예배, 찬양,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해야 합니다. 지금이 골방으로 들어갈 때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경건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목사가 아니어도 이렇게 신앙생활 열심히 할 거냐?' 삶으로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우는 자'가 되고 싶어

저는 성경을 읽을 때뿐 아니라, 소설책을 읽을 때에도 '어떻게 설교할까', '어떻게 가르칠까'생각합니다. 아마 목사라서 가지게 된 직업병인 것 같습니다. 작년 8월 야고보서 3장 1절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씀을 묵상하던 중 이 '직업병'의 증상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 '나'를 돌아보고 나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데, 저에게는 남을 가르치려만 드는 못된 습관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선생이 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뭐라고 가르칠까, 뭐라고 설명할까 고민하며 '선생 노릇' 하려는 저를 발견하고는 약간의 좌절감마저 들었습니다. 설교하기 위함도 아니고 가르치기 위함도 아닌, 순수하게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저에겐 매우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사임 날짜가 확정된 지난 주간, '그냥' 말씀을 읽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이젠 설교하고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듣고 배우며 살고 싶습니다.

'척'하는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

저는 오랫동안 설교는 명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생 제가 들어온 설교가 그랬습니다. 조직신학적인 선명한 정리, 확고한 신학적 입장, 명확한 규범 등을 기반으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설파하는 그런 설교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저에게는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신앙적 의문들이 많습니다. 구원, 지옥, 성화, 고난, 하나님의 다스리심 등 저는 이런 질문에 대한 시원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매주 혹은 매일 설교를 해야 하는 제겐 참으로 곤란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설교를 할 때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합니다. 적잖이 혼란스러우면서도 숨기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설교를 할수록 '말'이 늘다 보니 뻔뻔하게 '잘' 해내는 겁니다. 저의 나이와 주변 상황을 감안하면 수년 안에 담임목사가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된다면 저는 많은 면에서 스스로를 속이고 타협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던 문제들을 외면하고 타협한다면, 앞으로 저의 타락은 불 보듯 뻔합니다. 만약 다시 목회와 설교를 해야 한다면, 정리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에 대해 해결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의 회복이 필요한 시기

지난 5년간 교회 문제 상담을 해 왔습니다. 열정이 있었고 건강했기에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양의 상담을 기꺼이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교회에서도(타 교인까지) 목회 상담이 꽤 많았습니다. 작년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에 부쳤습니다.

저는 기질적으로 상담을 하면 감정이입을 심하게 합니다. 내담자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머릿속에는 상담했던 이들에 대한 걱정, 해결책을 찾기 위한 고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작년부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상담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두려워졌습니다. 운전 중 다른 사람과 언쟁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귀가하면 아내가 눈치를 볼 정도로 예민해졌습니다. 또한 아픔을 겪고 있는 교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무기력감, 자책감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정신적 안식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땅의 순례길을 가면서 지쳐 있다는 것을 압니다. 피곤하고 참된 쉼이 없어 순례길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라도 앞으로 남은 제 인생의 순례길을 더 잘 걸어가기 위해서는 한 번의 쉼표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년, 목회를 접기로 결정할 당시는 평생 목회 활동을 접으려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들을 주시면 바치겠습니다"라는 서원 기도로 아버지의 환갑 동이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목사의 길'은 신앙적 의미에 더해 늙은 어머니의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목사의 길을 버리려고 했던 데는, 위에서 말한 이유와 함께 요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보이는 행태를 볼 때 목사라 불리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러울 뿐 아니라 싫었습니다.

하지만 올 초부터 시작된 새벽 묵상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이 시작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며 저의 인생을 복기(復棋)하던 중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부모님의 서원을 거부하기 위해 방황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과 같은 과정을 통해 저를 목사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소명을 받아 목사 인생의 전반기를 달려왔습니다. 이제 한 템포 쉬고 저 자신의 뜻으로 목회를 선택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열어 두고 다시 '평신도'로 돌아갑니다. 어떤 선택이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johnworld
2011. 8. 1. 22:38 As it is

목회자들은 무엇에 영향을 받는가
송인규/합신대 조직신학 교수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모든 인간이 그렇듯, 그는 자신의 내적 상태와 외부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영향력들을 들추어 내어 그 정체를 밝히는 일은, 목회자 개인의 영성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의 목회 방침이나 공동체의 성숙과 연관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면 과연 어떤 사항들이 목회자들의 심령과 인격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서로 연관된 네 가지 사항을 손꼽을 수 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외적 증거 확립이다. 목회자의 정체감을 구성하는 가장 필수적 조건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역자(목회자)로 부르셨다는 개인적 확신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명감(소명의식)은 그 성격상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종종 그것을 객관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외적 증거가 요구된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목회자로 부르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입증해 주는 외적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회의 열매’라는 것을 소위 교회의 양적 성장 - 교인 수, 헌금의 액수 등 - 에서만 찾고자 할 때, 목회자의 순수한 마음은 시험과 욕심으로 얼룩지기 시작한다. 목회자에게 있어 외적 확장이 최우선적 목표가 될 때 그는 교묘한 형태의 우상 숭배를 연출할 수 있다. 또 교우들을 더 이상 자신이 목숨 바쳐 섬겨야 할 고귀한 대상으로 여기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낼 값진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목회자들은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 - 그것이 수평 이동의 결과이든 아니든 - 을 이룩하는 수도 있고, 또 심지어 올바른 동기에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목회 현장을 냉정히 고려해 볼 때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종교적 신기루요, 하나의 허황된 야심으로서만 작용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증거를 양적 성장이라는 단편적 현상에서만 찾으려는 오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목회적 열매를 점검하는 일이 필요하기는 하되 그것을 단지 ‘외적 확장’이나 ‘양적 성장’의 면에서만 그리하지 말고, 오히려 ‘사람들의 변화’, ‘하나님에 대한 성숙한 신앙 자세의 견지’, ‘헌신의 모습’ 등 다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는 목회자의 자아상이라 할 수 있다. 자아상은 대부분의 경우 미완성적이요, 비고정성(非固定性)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이나 조건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이미 개인의 내면에 확립된 태도와 성향의 체계로서 작용한다. 목회자의 자아상 형성에 있어서는 주로 두 가지 사항이 대두된다. 하나는 집합적 성격의 요인으로서 그가 목회직을 다른 직종 에 비해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목회 사역의 수행과 관련된 다양한 능력들을 들 수 있다. 기독교가 과거에 있어서보다 더 큰 성장과 영향력을 확보하면서부터 직종으로서의 목회직에 대한 인지도는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후자, 곧 개인적 역량에 대한 자기 평가에 있다. 설교, 리더십, 성품, 대인 관계, 목회 전략 등에 있어서 목회자는 쉬지 않고 자신을 평가한다. 목회자는 자신이 인정받기 원하는 이상적 자아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깨달은 본 모습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둘 사이에 간격이 크면 클수록 그는 불행을 느끼고, 어떻게 해서든 그 틈을 메우고자 한다. 까딱 잘못하면 목회자는 여기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다. 그는 때로 자신을 너무 높이, 또 때로 너무 낮게 평가하곤 한다. 따라서 자신의 은사와 능력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하여 자신의 분수와 그릇을 안 뒤, 욕심부리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시험받지 않으면서, 묵묵히 성실한 자세로 자기에게 맡겨진 바 자기만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목회 대상으로부터의 반응이다. 목회자가 깊은 영향을 받는 또 하나의 영역은 - 그가 인정을 하든지 않든지 - 바로 자신이 목회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교우들로부터의 반응이다. 인간의 기본 성정은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인정과 긍정적 반응을 필요로 한다. 목회자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교우들로부터 “잘 한다”라는 적극적 평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런 것이고, 또 많은 경우 동기 유발에 있어서 건설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목회자가 교우들의 반응과 평판에 너무 비중을 많이 두고 귀가 엷어지면 그는 안정감과 여유를 잃게 된다. 어떻게든 실적(?)을 올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가 하면, 사역의 결과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떠벌리기가 쉽다. 교우들로부터의 부정적 피드백에 심한 상처와 타격을 입기도 하고, 부교역자에 대한 칭찬의 소리 한 마디에 그토록 위협을 느껴 폭군적이 되는 수도 있다. 목회자의 인정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요, 건강한 자기 평가에 기초한 것이다.

넷째는 동료 목회자들과의 상호 교류이다. 오늘날 목회자가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선후배를 망라한 동료 목회자들로부터일 것이다. 교회 성장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하고, 노회와 목회자 연합 집회에 몸을 맡기는 순간부터 이런 영향력은 그 괴력을 발휘한다. 심지어 기독교 관련의 각종 매체를 통한 광고와 선전, 소식 전달 등이 한층 기승을 더하도록 돕는다. 목회자는 다른 목회자들과의 장소적·매체적 접촉을 가지며 부정적인 비교 의식이 자라난다. 목회를 크게 하든지, 유명세를 타든지, 재주가 있어 ‘튀거나 뜨는’ 목회자와 접촉하면 시기, 부러움, 질투, 고의적 무시 등으로 반응하고, 반대로 자기가 다른 목회자들보다 어떤 면으로든 우수한 점이 있다 싶으면 그들 앞에서 쾌재를 부르고 뿌듯함, 보람, 성취의식에 잠긴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목회자 모임 이후에 드러내는 천박한 즐거움, 경박스러움, 성마름, 씁쓸함, 우울한 모습, 처신의 불안정 등은 이런 것과 연관이 된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목회자끼리의 경쟁적 분위기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고 아울러 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배출되는 목회자의 수는 많고 목회자가 제한되어 있다면, 자연히 ‘경쟁’이 등장하게 된다. 모든 이가 다 똑같이 설교로 뜰 수는 없으며, 모든 이가 다 언어 구사 능력이 같을 수는 없다. 모든 이를 다 집회의 주강사로 부를 수는 없으며, 모든 이가 다 총회장이나 대교회의 목회자로서 적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함께 천국을 세워 나가는 동역자들로서 이러한 풍토의 개선에 능동적으로 이바지하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 방향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어떤 면에서든 많이 누리는 목회자라면 그렇지 않은 동료들에 대해 늘 겸손하고 비(非)자만적인 태도로 일관하여야 한다. 적게 누리는 목회자는 자기보다 더 누리는 동료들에 대해 시기, 좌절, 열등 의식, 경쟁 심리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인정해 주고 함께 기뻐해야 한다. 목회자는 함께 만나고 접촉하는 동료들로 인해 위로, 분발, 용기백배, 신앙의 자극, 동역자 의식의 함양, 공감대 형성 등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건설적인 결과를 맛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목회가 더 이상 우리의 죄성, 세속적 사고 방식, 사단의 시험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지금까지 살펴본 이 네 항목의 영향력은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필수적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johnworld
2011. 8. 1. 22:31 As it is
어느 목회자의 세가지 고백
-- 송인규 | 합신대 조직신학 교수(2002. 10)


내가 그 선배 목회자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늘 마음에 기꺼워하는 이유는, 그가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 사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도, 짧은 시간에 굉장한 수적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 때문도 아니다. 또 물론, 웃을 때 이마에 일렬 횡대로 늘어서는 주름살이나 우묵이 패인 양쪽 볼의 단호한 윤곽 때문만도 아니다. 실은 그러한 표정과 인상이 흘끗 드러내는 바 엄청난 영적 씨름의 경력과 그의 심령을 지배해 온 고백들 때문에 내 마음은 늘 그의 주변을 맴돌곤 한다.

아마 그 분만큼 열심히 사역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외형적 업적의 면에서 보면 드러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참으로 부지런히 숱한 책임 사항들을 감당해 냈다. 소그룹 사역이나 셀모임이 대중화되기 훨씬 전부터 지속적인 리더 훈련을 통해서 목회 구조를 탄탄히 했고, 정기 심방 스케줄 이외에도 신앙적 문제점이나 연약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위로와 권면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 언제 어떻게 준비하는지 모르지만 - 주 5회 가량 전달하는 그의 설교는 내용에서건 전달 방식에 있어서건 항시 참신하고 결코 피상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분의 신앙 특징 속에서는 공로 의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소위 부흥과 성공을 맛보면서 쏟아내는 경박스럽고 천박한 “자랑"은 결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사실 목회 사역 가운데 남의 주목을 끌 정도의 수적 증가가 있다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흡사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나는 남달리 이러 저런 일들을 성취했고 특히 이런저런 활동을 탁월히 해냈습니다"(cf. 눅 18:12) 라고 은근히 자랑으로 일관하기 쉬운 법이다. 자랑하는 이들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옆에서 듣는 동료 목회자들에게는 질투심, 역겨움, 경쟁 의식을 부추기는 그런 식의 “성공담" 말이다.

나의 선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책임을 다한 것이요 스스로 내세울 게 없다고 말했다. 그것도, 위장된 겸손이나 더 고단수의 자랑을 위한 시도가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었다. 그것이 나를 끊임없이 그에게로 향하도록 만드는 매력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처럼 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였고, 그가 알던 하나님을 알고 싶었으며, 그의 사명감과 성실성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비록 나와는 사역의 종류와 영역이 사뭇 달랐지만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도 나의 분야에서 열정과 성실로 일관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도, 내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마땅히 할 바를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일군이 되고 싶게 했던 것이다.

내가 그 선배와 좀 더 가까워지면서 알게 된 것은,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거저 받았다는 의식으로 항상 충일하다는 점이었다. 한 번은 그 분이 마태복음 10장 5∼16절을 강해하는 것을 들었는데, 가장 강력히 호소한 교훈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왜 그가 평소에 “거저 주고자 함"을 강조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것이 그냥 입발림이 아니라 그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강한 요인이 되었는지를 발견했다.
그는 거저 받은 것으로 자신의 생명, 시간, 은사, 재물 등을 예로 들었다. 이 항목들은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자기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 중에서 특히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받은 은사 - 목양의 은사(엡 4:11), 가르침의 은사(엡 4:11), 리더쉽의 은사(롬 12:8; 고전 12:28) - 와 관련하여 “거저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자신의 은사 활용을 통해 사역에 관록이 붙고 외적 열매가 맺힐 때, 그 은사들이 흡사 자기 것인양 내세우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만일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본질적 은사를 거저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증거는 “거저 주는" 데 있다고 내 선배는 덧붙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로 “거저 받았습니다"라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정성은 오직 거저 주는 것을 통해서 입증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거저 주는 것인지 골똘히 연구했고, 심지어는 아예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이 그런 실행책의 하나가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런 엽기적(?)인 생각에 놀랐고, 그러나 동시에 무엇이 그의 영혼을 그토록 순수하게 지켜 주는지 알게 되었다.

한 번은 목회 사역 철학에 대한 후배들의 질문을 받자, 그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6∼7)는 바울의 설명을 빌어 답변을 했다. 나도 이 구절을 알고 있었지만, 실은 이 말의 의미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 터라 궁금증이 솟아났다.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 “선배님은 정말 사역자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우선 그는 씩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스터리 같은 웃음은 나를 안도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더욱 궁금하게도 만들었다. 그러면서 “정말 그렇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분명 바울이나 아볼로의 역할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니죠?", “이런 식의 표현은 거짓 겸손의 예로서 오히려 우리를 위선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등등이었다. 그 때 그의 미소는 끝이 났다. 그는 무척 심각한 얼굴로 다음의 사실을 밝혔다.
“바울과 아볼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기 때문이고, 영적 은사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며, 그 영적 은사의 활용을 방해하는 요인들(건강의 상실, 열악한 목회 환경, 교우들의 비협조 등)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바울과 아볼로를 사용하시지 않고, 다른 인물을 불러 세우심으로써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국 바울과 아볼로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리고서 선배는 말을 이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부흥과 관련해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을 들어요. 그 가운데는 아첨과 공치사도 있고, 정말 사실적인 평가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엇인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은사 활용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바이고, 나라는 존재를 사용하신 것도 순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 내가 착각인지 모르지만 - 그의 눈가에 영롱한 물방울이 빛처럼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눈물이라면 왜 그는 그 순간에 눈물을 흘렸을까?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귀한 깨달음이 시험과 유혹과 환난의 현장을 통해서, 또 하나님의 징계와 깨우침과 혹독한 수술을 통해서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후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상적 실존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세 가지 고백은 여전히 내 심령을 뒤흔들며 내 마음에 엄청난 굉음으로 역사한다. 나도 평생 그런 고백 가운데 살고 싶다. 나도 죽는 순간까지 그런 세 가지 고백을 하고 싶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자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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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hnworld
2011. 7. 7. 08:34 As it is
[세상 읽기] 촛불집회와 법의 실패 / 금태섭
등록 : 20110612 19:08
대학생들의 촛불집회를 금지하는 진짜 이유가 ‘교통 소통’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 금태섭 변호사
법률가로서, 또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법이 지켜지고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때때로 누가 보더라도 공정한 법 적용이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을 접하게 되면, 과연 그러한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위법행위라고 비난할 수 있는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지방선거 때의 선거법 위반 논란이다.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집회를 개최하거나 서명운동을 하거나 혹은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4대강 사업 반대 펼침막을 설치한 사람들이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그즈음 형사사건 변론을 위하여 검찰청을 찾은 필자는 그곳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을 상대로 한 안내 방송을 듣고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4대강 사업 홍보 강연을 실시할 예정이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4대강 반대 서명운동을 하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피의자가 그곳에 있었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4대강 사업이 선거 쟁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에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는 것은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엄연히 근무시간 중인데도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4대강 홍보 강연을 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똑같은 사업에 반대하는 집회를 했다고 해서 형사처벌을 하려고 드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누가 그런 불공정한 법 집행에 승복할 수 있겠는가.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촛불집회를 불법으로 규정짓고 불허 방침으로 대응한 경찰의 태도도 비슷한 모순을 느끼게 한다. 원래 반값 등록금은 지금의 여당인 한나라당이 처음 들고나온 정책이며 선거 공약이기도 했다. 황우여 원내대표가 “쇄신의 핵심은 등록금 문제”라며 “무상 등록금으로 할지 반값으로 할지 국민의 결단과 의견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 불과 보름 전이다. 경찰은 똑같은 주장을 하면서 집회를 여는 대학생들을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는 촛불집회는 목적에 있어서나 수단에 있어서나 불법으로 취급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은 연간 1000만원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위에 해당한다. 자녀 두 명이 대학에 다니면 매월 160만원이 넘는 지출이 발생한다. 신고재산이 58억원인 오세훈 서울시장마저 두 딸의 등록금으로 허리가 휘는 줄 알았다고 하는 마당에 서민들 중 이런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학 다니기 위해서 휴학해야 하고, 아르바이트 하느라 수업을 빠지고, 급기야는 등록금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항의 집회를 하는 것을 범죄라고 할 수 있을까.

경찰의 금지 이유는 지극히 형식적이다. 집시법상 주요 도로에서의 집회는 교통 소통을 위하여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대학생들의 촛불집회를 금지하는 진짜 이유가 ‘교통 소통’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에 대한 불신은 바로 이런 곳에서 생겨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직후 수많은 시민들이 도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촛불을 들고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범죄가 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정부는 집회에 참가한 수천명을 집시법 위반으로 입건했다. 그것을 보고 법의 권위가 지켜졌다고 할 수는 없다. 법은 승복할 수 있을 때 힘을 발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과를 납득하지 못한다면 참담하게 실패한 것이다. 반값 등록금 집회에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까 봐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