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 22:31
As it is
어느 목회자의 세가지 고백
-- 송인규 | 합신대 조직신학 교수(2002. 10)
내가 그 선배 목회자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늘 마음에 기꺼워하는 이유는, 그가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 사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도, 짧은 시간에 굉장한 수적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 때문도 아니다. 또 물론, 웃을 때 이마에 일렬 횡대로 늘어서는 주름살이나 우묵이 패인 양쪽 볼의 단호한 윤곽 때문만도 아니다. 실은 그러한 표정과 인상이 흘끗 드러내는 바 엄청난 영적 씨름의 경력과 그의 심령을 지배해 온 고백들 때문에 내 마음은 늘 그의 주변을 맴돌곤 한다.
아마 그 분만큼 열심히 사역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외형적 업적의 면에서 보면 드러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참으로 부지런히 숱한 책임 사항들을 감당해 냈다. 소그룹 사역이나 셀모임이 대중화되기 훨씬 전부터 지속적인 리더 훈련을 통해서 목회 구조를 탄탄히 했고, 정기 심방 스케줄 이외에도 신앙적 문제점이나 연약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위로와 권면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 언제 어떻게 준비하는지 모르지만 - 주 5회 가량 전달하는 그의 설교는 내용에서건 전달 방식에 있어서건 항시 참신하고 결코 피상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분의 신앙 특징 속에서는 공로 의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소위 부흥과 성공을 맛보면서 쏟아내는 경박스럽고 천박한 “자랑"은 결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사실 목회 사역 가운데 남의 주목을 끌 정도의 수적 증가가 있다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흡사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나는 남달리 이러 저런 일들을 성취했고 특히 이런저런 활동을 탁월히 해냈습니다"(cf. 눅 18:12) 라고 은근히 자랑으로 일관하기 쉬운 법이다. 자랑하는 이들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옆에서 듣는 동료 목회자들에게는 질투심, 역겨움, 경쟁 의식을 부추기는 그런 식의 “성공담" 말이다.
나의 선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책임을 다한 것이요 스스로 내세울 게 없다고 말했다. 그것도, 위장된 겸손이나 더 고단수의 자랑을 위한 시도가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었다. 그것이 나를 끊임없이 그에게로 향하도록 만드는 매력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처럼 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였고, 그가 알던 하나님을 알고 싶었으며, 그의 사명감과 성실성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비록 나와는 사역의 종류와 영역이 사뭇 달랐지만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도 나의 분야에서 열정과 성실로 일관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도, 내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마땅히 할 바를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일군이 되고 싶게 했던 것이다.
내가 그 선배와 좀 더 가까워지면서 알게 된 것은,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거저 받았다는 의식으로 항상 충일하다는 점이었다. 한 번은 그 분이 마태복음 10장 5∼16절을 강해하는 것을 들었는데, 가장 강력히 호소한 교훈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왜 그가 평소에 “거저 주고자 함"을 강조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것이 그냥 입발림이 아니라 그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강한 요인이 되었는지를 발견했다.
그는 거저 받은 것으로 자신의 생명, 시간, 은사, 재물 등을 예로 들었다. 이 항목들은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자기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 중에서 특히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받은 은사 - 목양의 은사(엡 4:11), 가르침의 은사(엡 4:11), 리더쉽의 은사(롬 12:8; 고전 12:28) - 와 관련하여 “거저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자신의 은사 활용을 통해 사역에 관록이 붙고 외적 열매가 맺힐 때, 그 은사들이 흡사 자기 것인양 내세우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만일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본질적 은사를 거저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증거는 “거저 주는" 데 있다고 내 선배는 덧붙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로 “거저 받았습니다"라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정성은 오직 거저 주는 것을 통해서 입증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거저 주는 것인지 골똘히 연구했고, 심지어는 아예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이 그런 실행책의 하나가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런 엽기적(?)인 생각에 놀랐고, 그러나 동시에 무엇이 그의 영혼을 그토록 순수하게 지켜 주는지 알게 되었다.
한 번은 목회 사역 철학에 대한 후배들의 질문을 받자, 그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6∼7)는 바울의 설명을 빌어 답변을 했다. 나도 이 구절을 알고 있었지만, 실은 이 말의 의미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 터라 궁금증이 솟아났다.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 “선배님은 정말 사역자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우선 그는 씩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스터리 같은 웃음은 나를 안도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더욱 궁금하게도 만들었다. 그러면서 “정말 그렇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분명 바울이나 아볼로의 역할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니죠?", “이런 식의 표현은 거짓 겸손의 예로서 오히려 우리를 위선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등등이었다. 그 때 그의 미소는 끝이 났다. 그는 무척 심각한 얼굴로 다음의 사실을 밝혔다.
“바울과 아볼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기 때문이고, 영적 은사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며, 그 영적 은사의 활용을 방해하는 요인들(건강의 상실, 열악한 목회 환경, 교우들의 비협조 등)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바울과 아볼로를 사용하시지 않고, 다른 인물을 불러 세우심으로써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국 바울과 아볼로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리고서 선배는 말을 이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부흥과 관련해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을 들어요. 그 가운데는 아첨과 공치사도 있고, 정말 사실적인 평가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엇인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은사 활용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바이고, 나라는 존재를 사용하신 것도 순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 내가 착각인지 모르지만 - 그의 눈가에 영롱한 물방울이 빛처럼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눈물이라면 왜 그는 그 순간에 눈물을 흘렸을까?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귀한 깨달음이 시험과 유혹과 환난의 현장을 통해서, 또 하나님의 징계와 깨우침과 혹독한 수술을 통해서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후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상적 실존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세 가지 고백은 여전히 내 심령을 뒤흔들며 내 마음에 엄청난 굉음으로 역사한다. 나도 평생 그런 고백 가운데 살고 싶다. 나도 죽는 순간까지 그런 세 가지 고백을 하고 싶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자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뿐입니다!"
-- 송인규 | 합신대 조직신학 교수(2002. 10)
내가 그 선배 목회자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늘 마음에 기꺼워하는 이유는, 그가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 사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도, 짧은 시간에 굉장한 수적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 때문도 아니다. 또 물론, 웃을 때 이마에 일렬 횡대로 늘어서는 주름살이나 우묵이 패인 양쪽 볼의 단호한 윤곽 때문만도 아니다. 실은 그러한 표정과 인상이 흘끗 드러내는 바 엄청난 영적 씨름의 경력과 그의 심령을 지배해 온 고백들 때문에 내 마음은 늘 그의 주변을 맴돌곤 한다.
아마 그 분만큼 열심히 사역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외형적 업적의 면에서 보면 드러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참으로 부지런히 숱한 책임 사항들을 감당해 냈다. 소그룹 사역이나 셀모임이 대중화되기 훨씬 전부터 지속적인 리더 훈련을 통해서 목회 구조를 탄탄히 했고, 정기 심방 스케줄 이외에도 신앙적 문제점이나 연약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위로와 권면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 언제 어떻게 준비하는지 모르지만 - 주 5회 가량 전달하는 그의 설교는 내용에서건 전달 방식에 있어서건 항시 참신하고 결코 피상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분의 신앙 특징 속에서는 공로 의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소위 부흥과 성공을 맛보면서 쏟아내는 경박스럽고 천박한 “자랑"은 결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사실 목회 사역 가운데 남의 주목을 끌 정도의 수적 증가가 있다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흡사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나는 남달리 이러 저런 일들을 성취했고 특히 이런저런 활동을 탁월히 해냈습니다"(cf. 눅 18:12) 라고 은근히 자랑으로 일관하기 쉬운 법이다. 자랑하는 이들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옆에서 듣는 동료 목회자들에게는 질투심, 역겨움, 경쟁 의식을 부추기는 그런 식의 “성공담" 말이다.
나의 선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책임을 다한 것이요 스스로 내세울 게 없다고 말했다. 그것도, 위장된 겸손이나 더 고단수의 자랑을 위한 시도가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었다. 그것이 나를 끊임없이 그에게로 향하도록 만드는 매력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처럼 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였고, 그가 알던 하나님을 알고 싶었으며, 그의 사명감과 성실성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비록 나와는 사역의 종류와 영역이 사뭇 달랐지만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도 나의 분야에서 열정과 성실로 일관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도, 내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마땅히 할 바를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일군이 되고 싶게 했던 것이다.
내가 그 선배와 좀 더 가까워지면서 알게 된 것은,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거저 받았다는 의식으로 항상 충일하다는 점이었다. 한 번은 그 분이 마태복음 10장 5∼16절을 강해하는 것을 들었는데, 가장 강력히 호소한 교훈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왜 그가 평소에 “거저 주고자 함"을 강조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것이 그냥 입발림이 아니라 그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강한 요인이 되었는지를 발견했다.
그는 거저 받은 것으로 자신의 생명, 시간, 은사, 재물 등을 예로 들었다. 이 항목들은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자기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 중에서 특히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받은 은사 - 목양의 은사(엡 4:11), 가르침의 은사(엡 4:11), 리더쉽의 은사(롬 12:8; 고전 12:28) - 와 관련하여 “거저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자신의 은사 활용을 통해 사역에 관록이 붙고 외적 열매가 맺힐 때, 그 은사들이 흡사 자기 것인양 내세우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만일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본질적 은사를 거저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증거는 “거저 주는" 데 있다고 내 선배는 덧붙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로 “거저 받았습니다"라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정성은 오직 거저 주는 것을 통해서 입증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거저 주는 것인지 골똘히 연구했고, 심지어는 아예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이 그런 실행책의 하나가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런 엽기적(?)인 생각에 놀랐고, 그러나 동시에 무엇이 그의 영혼을 그토록 순수하게 지켜 주는지 알게 되었다.
한 번은 목회 사역 철학에 대한 후배들의 질문을 받자, 그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6∼7)는 바울의 설명을 빌어 답변을 했다. 나도 이 구절을 알고 있었지만, 실은 이 말의 의미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 터라 궁금증이 솟아났다.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 “선배님은 정말 사역자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우선 그는 씩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스터리 같은 웃음은 나를 안도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더욱 궁금하게도 만들었다. 그러면서 “정말 그렇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분명 바울이나 아볼로의 역할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니죠?", “이런 식의 표현은 거짓 겸손의 예로서 오히려 우리를 위선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등등이었다. 그 때 그의 미소는 끝이 났다. 그는 무척 심각한 얼굴로 다음의 사실을 밝혔다.
“바울과 아볼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기 때문이고, 영적 은사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며, 그 영적 은사의 활용을 방해하는 요인들(건강의 상실, 열악한 목회 환경, 교우들의 비협조 등)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바울과 아볼로를 사용하시지 않고, 다른 인물을 불러 세우심으로써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국 바울과 아볼로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리고서 선배는 말을 이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부흥과 관련해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을 들어요. 그 가운데는 아첨과 공치사도 있고, 정말 사실적인 평가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엇인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은사 활용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바이고, 나라는 존재를 사용하신 것도 순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 내가 착각인지 모르지만 - 그의 눈가에 영롱한 물방울이 빛처럼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눈물이라면 왜 그는 그 순간에 눈물을 흘렸을까?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귀한 깨달음이 시험과 유혹과 환난의 현장을 통해서, 또 하나님의 징계와 깨우침과 혹독한 수술을 통해서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후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상적 실존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세 가지 고백은 여전히 내 심령을 뒤흔들며 내 마음에 엄청난 굉음으로 역사한다. 나도 평생 그런 고백 가운데 살고 싶다. 나도 죽는 순간까지 그런 세 가지 고백을 하고 싶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자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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