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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9. 24. 23:47 Bible Guide

먼저 역사비평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비평은 19세기 말 루터교 목사의 아들 벨하우젠과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비평은, 본문의 표면에, 다시 말해 글자로 표출되어 있는 본문의 세계 속에서, 무엇이, 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면서 성서해석의 장을 열고 있습니다.

역사비평은 본문을 자의적으로(알레고리컬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막는 강력한 제어장치예요. 본문의 글자를 단순히 나열된 채로 읽거나(문자적 해석), 본문의 글자를 기호로 보고 그것이 상징하는 어떤 은유를 읽는 것(풍유적 해석)이 아닌, 왜, 누가, 어떻게, 언제 그런 글을 서술하게 되었는지를 심각하게 분석함으로써, 성서의 뜻을 적어도 '객관적으로'(역사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수단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초대교회 이래 종교개혁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앙 공동체가 답습해온 본문에 대한 왜곡된(인위적인) 해석을 바로잡아 보고자 노력했어요. 본문을 태어나게 만든 상황(역사, 문화, 사회, 종교) 속에 본문을 가져다놓고 읽음으로써 말씀에 대한 인위적 해석을 막아보고자 나섰던 것입니다.

혹자는 성서의 역사적 주석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인 평가라고 비판할런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이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비평할 수 있느냐'라고 따질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서의 역사적 비평 속에 인간의 이성이 차지하는 몫이 알게 모르게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렇지만 여기에는, 성서보다는 교회의 권위를 더 내세우던 숨막히던 시절에, 그래서 성서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정통 성서해석으로 강조하던 중세기의 암흑시대에(지금도 가톨릭은 그렇습니다), '성서해석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나서게 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역사적 비평의 모태에는 '교회의 권위보다는 성서가 더 우월하다'라고, 그래서 '교회가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교회를 해석해야 된다'라고 주창하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전통이 서려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서의 역사비평적 해석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역사적 비평은 본문의 과거와 현재를 서로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과거를 현재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본문이 원래 무엇을 의미했었는지를 바로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겁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과거'(본문의 역사적 맥락)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과거'(본문의 의도)를 바로 살려낼 수 있었다는 거죠. 비록 이런 노력이 '본문이 지닌 과거형의 의미'만을 끄집어내는 일에 매달린 결과를 낳고야 말았지만, 그렇지만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의 역사적 해석은 본문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바로 제시해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성서의 역사적 비평은 본문의 기원과 그 형성과정을 밝히고 난 뒤에야, 또는 그런 근거 위에서만 본문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본문이 지녔던 본래의 의미(과거의 의미)를 추적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그래서 본문의 과거의 역사를 세심하게 묘사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본문이 지난 오늘의 의미(현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에는 그만 소홀하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본문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현대적인 적용이 무엇인지를 캐내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지나치고야 말았습니다. 본문을 해석하다가 본문 이전 단계를 추측하는 일에 몰두하고 만 것입니다. 생성되기까지 거쳐왔을 언어학적, 문헌적, 전승사적 단계를 파악하는 일에만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종형태의 본문에 대한 관심 자체를 잃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본문을 구성하는 문학양식, 전승 등을 역사적으로 캐내기만 했지, 정작 그런 양식, 전승 등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본문을 문삭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에는 소홀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성서의 역사비평적 해석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어요. 근본주의와 경건주의가 내뱉는 역사비평적 방법에 대한 불신의 도전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영적, 성서주의적, 무비판적 성서해석으로 되돌아가라'는 거친 도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역사비평적 해석을 대신학 학문적 대안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대안도 없이 무작정 성서주의나 '비평 이전의 단순 독서'로 회귀할 것을 주창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해석이 없는 성서풀이는 자칫 성서를 왜곡 인용할 우려가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변화는 1968년 미국 성서학회 회장 뮬렌버그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에 대한 '문학적' 질문을 소중히 여기는 특징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사학과 일반 문학이론을 성서해석에 접목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문학비평'이라고 총칭합니다.

문학비평은, 텍스트를 더 이상 컨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바로 해석의 '대상'입니다. 역사비평은 성서를 통해 역사와 상황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보았다면, 문학비평은 성서를 통해 독자를 비추는 거울로 보는 것입니다.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독자의 실존적인 만남을 이루는 거죠. 성서가 성서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독자의 가치관,세계관과 성서의 가치관, 세계관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문학비평은 역사비평처럼 성서를 통일성 없는 쪼가리 문서들로 보지 않습니다. 일단 본문을 언어로 이루어진 하나의 통일성 있는 구조물로 봅니다. 그렇다고 근본주의적 성서관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성서를 역사적으로 파고들지 않고,(텍스트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캐지 않고) '완성된 본문'(텍스트의 마지막 형태)을 놓고 본문 형태와 스타일, 근원적인 사상을 보는 거죠.

역사비평에는 자료비평, 전승사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이 있고, 문학비평에는 사회과학적 비평, 정경비평, 수사학적 비평, 구조주의 비평, 이야기비평, 독자-반응 비평, 후기구조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 등이 있습니다.

역사비평과 문학비평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비평과 문학비평은 병행되어야 하며, 서로 보완되어야 합니다.

역사 비평적 해석과 문학 비평적 해석의 예를 들어 볼까요?
창세기 4장 14-15, 17절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1. 역사비평적 방법 : 창세기 4장 이야기는 에덴 동산의 이야기와는 다른 상황에서 유래한 이야기로, 이 둘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4장이 2-3장과 처음부터 연속된 이야기라면 당시는 아담, 하와, 가인, 아벨밖에는 있을 수 없으나 창세기 4장은 2-3장과 다른 기원을 가지는 이야기라는 전제 하에서는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4장은 원래 많은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였는데,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 인류 최초의 살인에 관한 주제를 선택하여 에덴 동산 이야기에 연결, 편집시킨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여럿 존재한다는 배경이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남은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이 만날 사람도 존재하고 가인이 아내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 문학비평적 방법 : 가인이 두려워한 사람은 가인이 쫓겨날 당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또 낳을 아들들(즉 가인의 동생들), 또 그 아들들의 후손들이 아벨에 대한 복수로 가인을 죽일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 가인의 아내가 된 여인은 아담이 후에 낳은 딸들 중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이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인간들의 수명은 거의 구백살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5장 3-4절을 보면 아담이 백삼십세에 셋을 낳고 팔백년을 더 살며 아들, 딸을 낳았기 때문에 가인이 아담의 딸들 중 하나를 취해 아내를 삼았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는 하겠지만, 이도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그런 것이지 구백년 가까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수십년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구백년씩 살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의문은 접어두고 창세기 4-5장의 배경에서만 본다면 이 해석도 나름대로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참고로, 요단출판사에서 나온 '요한복음 해부'라는 책을 읽었는데, 요한복음을 문학비평 방법 중 하나인 이야기비평(설화비평)으로 쓴 책입니다. 한마디로 어렵습니다. 문학비평도 상당한 이해력과 통찰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서 비평방법(역사비평, 문학비평 모두)에 대한 자료는 다음 책을 참고하세요.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 스티븐 헤이네스, 스티븐 메켄지 지음, 대한기독교서회(1999)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