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옳은 말씀이며, 지각이 있는 말씀이다. 목회자들... 자신들의 그런 종교적 권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나 아는지 모르겠다. 책 좀 보고 공부하는 목회자들이 되어, 자신들의 쓸데없는 권위를 버리는 그런 목회자들이 많이 생기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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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일(한무리교회 목사)
목사의 권위 문제는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에 매우 대조적인 이해 관계를 보일 때 많다. 목회자는 권위에 대한 도전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고, 교인들도 목사의 권위의식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쪽은 강해진 권위를 지키려하거나 아니면 약해진 권위를 되찾으려 하고, 다른 한쪽은 거세진 권위에 대하여 강한 경계심을 보이며 불만을 토로한다.
권위를 무너뜨리는 잘못된 권위 의식
그렇다면 이런 권위에 대한 양극화 현상이 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 요인들을 살펴보자.
첫째, 목회자 스스로 교회에서 자신의 입지가 일반 신도들과 구분된다는 신학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양육하며 가르치며 돌보며, 교인들 목회자에게서 양육을 받으며 배우며 돌봄을 받는 자라고 생각한다. 목사에게는 축복권과 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확신 위에서 자신과 신도는 분명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신학적인 견해에서 목사와 신도간에는 계급적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목회적인 차원에서 볼 때 목사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현실론을 피력하기도 한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를 운영해 나가기가 힘들고 교회 성장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가 목회자 권위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릇된 생각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심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문제 제기나 심각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현상이 한국 교회 안에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개선해 나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본질적 차원의 개혁이 아니라 모방 또는 패션으로 나타날 때 그 문제성은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그 외형적 성향은 뜻밖에도 좋은 의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형적인 성향은 목사의 권위 의식을 드러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써 교인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는다, 말을 공손하게 한다, 인사를 먼저 한다, 잔일 함께 한다 등등... 사실 이러한 목회자의 태도는 권위 의식의 문제점을 벗어나려는 진실한 노력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이러한 행동 양식의 변화로는 권위 의식의 존재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 외형적으로는 겸손의 모습을 지닌 듯하여도 전혀 다른 것에서 심각하게 드러나는 권위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를 예로 든다면 교인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 또는 간섭이다. 사실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교회에서 교제의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오히려 교인들간의 지나친 무관심이 문제가 될 정도이다. 하지만 목회자는 교인의 생활전반에 대한 관심 속에서 신앙적 교제를 한다기보다는, 예배당 중심의 봉사와 참여를 관여함으로 교인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기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임에서 빠지는 교인들에 대한 목회자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것이 모임 주도의 차원에서만 강요되고 있다면, 복음은 모임을 이끌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교회는 모임 자체보다 영적 성숙에 더 중요한 관심의 초점을 두어야한다.
자발성을 키워주면 권위가 빛난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모두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원해서 교회 봉사에 참여하며, 목회자는 자신이 계획한 프로그램에 교인들이 좇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은사가 교회를 이루는데 잘 활용되도록 기틀을 마련하는 일이 제 1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제가 일반 기업에서 이루어지는 상명하달식의 의무적인 강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특성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자원적 차원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한다.
하지만 이런 수준을 벗어나 왜 빠졌는가, 왜 늦게 오는가, 왜 봉사의 자세가 부족한가, 왜 자꾸만 모임에 열심을 내지 않는가, 왜 교회를 옮기려 하는가 등 계속된 억압 일변도의 자세는 관심이 아니라 잠재적 권위의 한 표본인 것이다.
어찌보면 이러한표현은 교회의 조직과 관심의 의미를 외면하는 듯한 느낌을 줄는지 모른다. 하지만 목회자의 이러한 강요 일변도의 자세 속에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를 복합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신앙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신앙 생활을 하는 인간과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과 현실을 함께 생각하지 못할 때 목회자는 예배당 중심의 일방적인 삶을 강요하게 되고, 그 강요는 결국 목사의 또 다른 권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의 강조는 하나님의 자리에서만 그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어찌 보면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의 틀로 짜여진 범주 안에서 하나님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매우 크신 분이다. 인간의 생각에 국한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과서적인 교리 수준에서 하나님을 정의할 때가 많다. 쉽게 생각하면 교회에 빠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맡겨진 기도 순서를 사양하는 것도 성도 된 자의 정상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또한 자신의 설교를 이해 못하는 것은 그만큼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렇다고 판단할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동기에서 강요하는 것은 모든 것이 옳다고 쉽게 생각해 버린다,
하나님의 권위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한 가지 면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방법에 대한 망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수준에까지 내려 오셔서 죄인으로서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결코 가벼운 구속의 방법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 의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없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보내시고 인간의 수준에서 사역하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인간을 이해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구속의 대드라마를 엮어 가셨다.
어느 목회자 그룹 성경공부모임에서 교인을 섬기는 목회자의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던 어느 목회자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싸가지 없는 교인들은 목사를 금방 올라탑니다." 그 순간 그 반응이 당황스럽게 느껴졌지만 금새 다음과 같이 대답한 기억이 있다.
"그런 상황에 대하여 모범을 보이신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싸가지 없는 죄인을 위하여 그 싸가지 없는 인간 수준으로 오셨습니다. 그 낮아짐의 극치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데 우리가 감히 그 이상을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의 그룻된 권위는 교인들에 대한 공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생각에서 권위 의식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삶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단답식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옳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일변도로 말씀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은 한발이 부러진 자에게 두 발이 부러져서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시편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 못지 않게 원수에 대한 분노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이 갖는 갈등과 여러 가지 문제 의식 속에서 하나님과의 섬세한 만남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신학을 이야기하는 만큼 인생을 이야기해야 한다. 또한 현실에 대한 바탕위에서 인간을 만들어 가신다.
인간적 권위 아닌 말씀에 권위를
그렇다면 목회자는 교회사적인 작은 범주 안에서 교인들에게 모임과 봉사에 대한 강요를 하기에 앞서, 그 인간을 이해하려 하고 그 인간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누려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단순히 교회에 참석하지 못한 자에게 그저 왜 교회에 오지 않았느냐고 추궁하기 전에, 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열정의 삶을 살고 있느냐를 점검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교회에 한 번 빠진 것은 곧 믿음이 없다는 등식은, 교회 생활이 매우 작은 틀 속에서 해석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무교회주의나 나태한 교회 생활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획일적인 교회 생활을 신앙의 대명제로 간주하는 현상이 오늘날 우리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에서 강요하는 교인들에 대한 관심이 곧 또 다른 의미에서 권위의식이라는 것이다.
목회자는 교인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성도의 한사람이다. 그런 차원에서 목사는 교인과 같이 행동하는 범인(凡人)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주인되신 교회를 지키기 위한 분명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리더십은 인간적인 리더십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의 권위로 드러나야 한다. 교인 또한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해야 하며, 인간적인 권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방어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한다. 좋은 교인이 좋은 목회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 목회자는 좀 수동적일 필요가 있고 교인은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권위에 입각한 분명한 복음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면 인위적인 권위를 만들려고 노력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 수준에 이른다면 설사 범인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을 가볍게 생각할 교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없을 때에는 좌절과 피해 의식속에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권위를 만들기 시작한다.
복음은 능력이다. 오늘날 복음이 무능력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의 복음이 하나의 교과서로만 생각되고 이해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복음에 대한 정신이 살아있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목회자의 잘못된 권위 의식, 교인들의 불만은 사라지고 좀더 높은 차원의 교회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