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해석은 역사비평 무용론을 주장하는 반면, 역사 비평가들은 문학적 해석을 무역사적(ahistorical)이라고 몰아세운다. 논쟁을 촉발시킨 요인들과 쟁점이 무엇인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통시적 해석인 역사비평은 본문을 분석적으로 해부하면서 과거를 쳐다볼 수 있는 창문(window)으로 인식하는데 반해서, 공시적 해석은 본문을 독자, 혹은 해석자의 현재를 비춰 주는 거울(mirror)이라고 보고 통전적 혹은 전체적으로 읽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며, 본문에 깊은 심층적 의미(depth dimension)가 담겨 있으며, 저자의 의도에서 독립하여 자율성(autonomy)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런 문학 이론은 원저자의 의도를 발견해 내는 데 집중하는 전통적인 역사비평 작업을 무의미한 작업으로 만든다.
둘째, 브레바드 차일즈(B. S. Childs)는 파국에 처한 성서 해석을 구원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경적 접근(canonical approach)을 제안. 성서란 신앙공동체가 받아들인 정경이므로 본문의 배후 역사를 찾는데 낭비하지 말고, 최종본문의 정경적 형태와 맥락(canonical shape and context)안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를 찾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철학 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역사비평 성서 해석의 틀을 탈피하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제임스 바(James Barr)의 설명에 따르면, 다원주의와 같은 맥락 속에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지식은 인간 사회의 구상(social construct)에 불과하다. 본문의 의미는 저자의 마음속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독자가 결정한다. 의미를 결정하는 주체가 독자이므로, 독자의 수효만큼 의미의 가지 수효도 다수라고 생각한다.
넷째, 유대인 신학자들은 1960년대 이후 구약성서 연구에 활발히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역사비평 방법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다섯째, 문자주의에 입각한 기독교 근본주의 신학의 해석학과 보수주의적인 교회의 역사비평 방법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끊임없는 배격이다. 보수적인 신학은 계몽주의의 산물인 역사비평을 인간의 이성으로 계시를 판단하는 불경건한 태도라고 단죄하고 교회와 신학교에서 배척해 왔다.
논쟁의 요점과 실체의 해부
1)통시성과 공시성(diachrony and synchrony) : 이 용어는 언어학자 소쉬르가 그의 책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처음 사용. 공시적 주석과 통시적 주석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 양자의 차이는 반역사성과 역사성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계(system)와 요소(element) 사이에 있다. 만일 이런 차이를 상이한 기존 자료가 혼합된 성서 본문의 주석에 적용한다면, 공시적 접근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나 저작 상황, 그리고 저작 목적을 무시하고 본문 자체를 주석의 핵심으로 삼을 것이다 만일 본문이 이해하기 난해하고 일관성이 없어서 기존의 자료들이 혼합되었다고 생각되는 경우라면, 작자의 기술과 문학적 기량이 아주 뛰어나서 비평학자라도 감히 판별해 내기 어려운 특성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럴 경우, ‘공시적’이란 용어는 역사적 패러다임에서 문학적 패러다임으로 변화하는 추세를 반영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은유(metaphor)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비 자체가 실체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적 구분을 성서 연구에 전용하여 쓰는 일종의 은유이고 또 본래적 의미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2)역사적 해석과 문학적 해석 : 통시적 역사 비평이 공시적 문학적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난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 역사비평은 처음부터 문학적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비평의 대명사격인 자료비평의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은 오경을 읽은 중세 시대의 해석자들이 내용 가운데 불일치, 중복된 기사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다듬어진 방법론이었다. 따라서 역사 비평은 처음부터 본문 배후의 발전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문을 읽다가 접하게 되는 내용상의 비일관성이나 모순, 그리고 불필요한 중복기사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문학적 관찰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3)객관적 해석과 주관적 해석 : 역사비평을 오해하는 주장들은 역사비평에 대한 다음의 통념적 정의로부터 발생. 역사비평은 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을 통해 원래의 저자가 의도했던 단 하나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이 진술을 두고, 공시적 연구자인 건과 피웰은 세 가지 이상의 공격을 가한다.
첫째, 공시적 해석은 역사비평이 객관적 혹은 가치중립적 해석을 추구하는 점을 비난한다. 이 점을 공격하는 논리는 ‘객관적 진리(혹은 메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던적 사고방식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주관적’인 해석에 지극히 부정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포스트모던주의와 근본주의가 합세하여 문학적 해석을 옹호하고 역사비평을 비난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이론에 의하면, 해석의 결과란 원저자의 의도와 가장 근사한 것일 뿐이지 완벽한 이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것이 해석의 한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비평은 객관적이면서도 해석자의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해석방법이다. 주관-객관 이분법은 모던적 발상이므로 역사비평은 적어도 이러한 사고구조를 극복하려는 해석학적 개발이 필요하다.
둘째, 역사비평은 원래 본문의 맥락에서 원저자의 의도를 결정하려고 하므로 최종본문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최종본문을 중요시하는 주석이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역사비평적 주석이므로 그것은 역사비평의 완성이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셋째, 역사비평은 본문에 단 하나의 참된 의미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것을 찾는다고 비난한다. 이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역사비평적 주석은 작업 결과를 유일한 해답(the answer)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견해(an answer)일 뿐이다. 가장 개연성이 높다(the highest probability)고 제안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만이 참되고 유일한 해석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4)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 : 한스 프라이는 역사비평의 이런 이분법적 작업의 결과로서, 성서 본문의 의미란 본문 밖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학자들이 재구성한 역사와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표현(reference) 자체에 담긴 의미는 별도로 존재하게 만든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성서 이야기는 말하는 것으로서의 표현(reference)과 그것이 관심하는 바로서의 의미(meaning)가 구별되는 이분법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는 이런 태도를 비평 이전 시대의 관점, 즉 문자적 의미가 역사적 의미와 동일하게 받아들여졌던 시절(종교개혁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닌지 반문하고, 그의 정경적 관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종의 편견으로 평가한다. 과거의 의미(what it meant)와 현재의 의미(what it means) 사이의 괴리를 좁히는데 필요한 것이 해석학이다. 전통적인 역사비평에 사용되는 해석학을 ‘재구성의 해석학’이라고 부른다면, 두 의미의 현장 사이의 괴리를 제거하고 하나로 통합하는 해석학을 ‘통합의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스 가다머는 이것을 “지평 융합”이라고 부른다.
5)신학적 기여도 : 일반적으로 역사비평이 공격을 받는 이유들은 주로 이 방법이 세속주의, 회의주의, 이신론(deism)의 가치로 무장한 인본주의요, 성서 본문의 통전성을 파괴하는 분해주의요, 이성을 계시보다 영감보다 우위에 두고 성서의 거룩성을 인정치 않는 자유주의요, 신앙공동체(교회)에게 백해무익한 혼란만을 가중시키며, 오직 신학교와 학자들의 지적 유희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몰이해를 시정하기 위해 우선 역사비평이 종교개혁의 산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계몽주의의 산물인 역사비평을 부정하는 근본주의 성서학계는 비평 이전 시대의 중세적 해석으로 복귀하기를 염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고려할 것은 종교개혁의 취지가 성서의 권위를 교회와 전통의 권위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역사 속에 존재하는 개신교가 역사비평을 비난하고 나서는 현상은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보다 발전된 역사비평을 위하여
역사비평 자체의 해석학이 갖는 문제를 점검하고 개선된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
1)역사비평은 결코 완전한 방법론이 아니다.
2)역사비평은 과거에 형성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 본문을 쓴 저자(들)가 의도했던 바를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을 위한 가장 적절하고 개연성이 높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과거에 본문이 피력하는 바를 알아야 현재적 의미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역사비평 원리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 준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에 따르면, “이해의 기술”이라고 정의되는 해석(이해)의 두 가지 원리는 문법적 해석과 기술적 해석으로 구성된다. 문법적 해석은 단어와 문장 그리고 맥락 사이의 상관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기술적 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예감하는/가늠하는”(divinatory) 방법과 “비교하는”(comparative) 방법을 오가는 순환적 교정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석 작업은 순환적이다. 끊임없는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ycle)을 통해 해석자는 저자의 의도에 도달하게 된다.
4)역사비평은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역사가 무엇인가에 관한 이해는 중대한 이슈이다. 역사 기록이란 당시의 기록자의 사관에 따라 의도적 편향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고대 역사기록물이 데카르트적인 객관성을 지닌 기록이란 생각은 용인하기 어렵다. 사건은 존재했으나 그 사건에 관한 기록은 하나의 관점에서 씌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 관점의 역사적 정확성을 신뢰하기란 고대의 것일수록 더욱 어렵다. 구약성서 기록을 단 하나뿐이고 진정한 객관적 이스라엘의 역사(the history of Ancient Israel)로 사용하기는 불가능하며, 그 대신 어떤 관점에서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a history of Ancient Israel)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다.
5)구약성서가 글들의 모음이란 맥락에서 볼 때, 이제는 문학이 무엇인지 그 정의를 내리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일종의 예술로서 의사전달(communication)의 방편으로 볼 수 있다. 문학 작품을 통한 의사전달 과정에는 네 가지 요소가 개입된다. 본문, 저자, 독자, 그리고 세상. 한편 연구자는 문학이 “사회적 통제의 도구”(instrument of social control)라는 제임스 바의 견해에 동의한다. 구약성서는 역사의 지평 속에 존재했던 특정한 사회적 정황 속에서 야웨를 믿는 저자들의 신앙적 세계관을 기술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 문학이 사회적 현실의 산물이란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내에서 역사를 기술한 관습 속에는 사건을 있었던 그대로의 기술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내용, 그리고 그런 보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특정한 세계 이해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함의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저자들은 신앙공동체의 구성원인 독자가 “믿게 하려는 ? 필요 충분한 ? 만큼”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발전을 위해서 문학이 가지는 이런 사회적 기능과 그 편향성을 의식하면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서, 전통적인 역사 비평은 사회과학적 접근과 이데올로기 비평적 방법론의 도움을 통해 한편으로는 고대 세계에 관한 더 많은 정보와 이해를 도모하고, 동시에 그런 시대적 정황에서 생성된 성서 본문들의 신학적 편향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대해 나갈 때, 성서 본문에 대해 과거에 가졌던 의미의 지평을 더욱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성서해석 방법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나가는 말에 이미 저자가 피력한 바, 학문간 교류를 통해 서로의 약점을 보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제안에 공감하면서, 상이한 두 연구방법들은 서로 다른 철학적인 모형들에 기초하고 있어서 각자 다양한 유형의 연구결과를 산출해낼 것이다. 문학비평이 본문의 의미를 기술함에 있어서 저자와 독자 사이에 의사소통케 하는 측면에서, 역사비평은 본문의 의미를 본문의 기원과 발전과정 측면에서 기술하려고 한다고 할 때, 이 연구결과들은 결코 상충되지 않으며, 이 두 모형들은 개별적으로 또 상호보완적인 방식으로 적절히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서 성경을 읽고 읽는 독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작업들이 학자들간의 교류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견해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체적인 결과들을 보이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에 소개된 본문비평과 번역비평 등 역사비평 방법으로 연구한 ‘신명기’(감신대 출판)와 같은 성경을 보는 일견을 줄만한 노력들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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