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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3. 20. 21:10 8세기 예언서

이 연구는 왕조 이전 시대라고 부르는 철기 Ⅰ시대 팔레스틴 지역에 존재했던 이스라엘 초기 사회 모습을 성서 연구와 고고학적 연구를 이용하여 사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팔레스틴의 후기 청동기 시대 사회는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졌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나안의 비옥한 평야지대와 계곡에 위치하였다. 기원전 약 1200년경, 이집트 제국은 가나안 합병 정책을 가동하여 이 지역에 깊이 관여하기 위해 행정부서와 군사 기지를 설치하였다. 이집트의 이러한 행정적 개입은 경제적 착취를 동반하여, 상당량의 곡식이 이집트인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150년경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이집트는 하티 제국과 미케네 제국들과 함께 동시에 쇠퇴하게 되었다. 한 가지 주요 원인은 해양민족(일부가 블레셋 족속)의 침범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정치적, 사회-경제적 변동 기류와 때를 맞춰, 팔레스틴의 중앙 고지대에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는 드문드문 형성되었던 곳인데도 불구하고 수백 곳에 달하는 새로운, 그러나 소규모의 주거군락이 대거 등장하였다. 고지대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철기 Ⅰ시대 후반에 이스라엘 군주 사회가 형성된 심장부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내포하는 의미는 깊다.

또 다른 물리적 증거는 메르넵타 비문이다. 기원전 1207년 이집트의 바로 메르넵타는 통치 5년에 리비아인과 싸워 전승한 기념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문에 ‘이스라엘’이란 말이 언급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비문의 ‘이스라엘’이란 말은 인종 집단을 지시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이 말은 아마 이집트 서기관들이 고지대 팔레스틴의 어떤 집단을 정치적 언어로 표현해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철기 Ⅰ시대 고지대 정착자들의 등장에 대한 역사적 해명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세 가지 대표적인 모델들로 ‘정복모델’, ‘침투모델’, 그리고 ‘사회혁명모델’을 손꼽을 수 있다. 이 연구는 사회혁명모델을 기본 전제로서 지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델이 이 시기에 일어났던 사회-문화적 변화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철기 Ⅰ시대의 고지대 농업 상황을 올바로 평가하고 기술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후기 청동기 시대 가나안의 도시국가의 것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1)주거지 변화와 인구 분포

기원전 1200년경, 많은 수의 토착 주민이 삶의 근거지를 도시 혹은 도시와 연계된 비옥한 해변평야지대와 계곡을 떠나 고지대와 산록의 도심에서 외떨어진 변두리의 촌락지대로 옮겼다. 새 정착지들의 크기에 관해서 실로는 4에이커, 텔 마소스는 12에이커, 단은 50에이커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2 에이커도 채 안 된다. 이 새 정착지 변화에는 갈릴리, 중앙 산지 그리고 남부 네게브 지역 별로 차이가 있지만 아주 특징적인 하나의 유형을 보여 준다. 정착 유형은 이곳의 주민들이 어떤 모습으로 영농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첫째, 새로운 소규모 정착지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산간지대에서 증가한다. 둘째, 이들은 대게 천연적인 장애물이 많은 외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셋째, 이들은 대개 담이 없으며 분산되어 있다. 넷째, 이들은 바위산이나 언덕 꼭대기에 정착용 건물을 세움으로서 인근의 경작지를 방치하고 있다. 다섯째, 정착지 대부분은 물 근원에서 멀다. 여섯째, 대개 후기 청동기 시대 도심지에나 알려져 있는 저장창고, 성전 혹은 궁전 같이 특별한 목적을 지닌 ‘공공’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일곱 째, 가정용 건물은 ‘네 칸 방’ 혹은 ‘세 칸 방’ 혹은 기둥 있는 가옥 같은 공통된 유형을 갖고 있다. 여덟째, 전체 정착과정은 너무 복잡해서 구분해 낼 수 없다. 종합하면, 이 자료들은 철기 ⅠA 시대의 고지대로 정착지가 변천한 것을 “예전의 도시국가 시절에 미개척지인 변두리 지역이 새로운 정착지로 각광을 받은 것으로 보게끔” 만들며, 아울러 새로 정착한 주민들의 긴급한 과제는 국가의 통제와 지배가 없는 안정된 사회와 기초생활 경제를 구축하는 일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제껏 묘사한 정착지 변천과 함께, 인구문제는 이 시대의 농업 조건을 평가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인구밀도는 집약농업과 가장 밀접한 상관계수로 이해된다. 인구밀도가 집약농업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인구 과잉이 초래하는 결과는 알아야 한다. 인구 규모를 산출하는데 가정용 건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고지대 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사실은 우선, 소규모 인구 이동(도시에서 고지대의 촌락)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가나안 전역의 도심지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새로운 정착자들은 땅의 부족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고지대에 성채가 없다는 사실은 또 다시 이 지대의 인구 부족을 확증해 준다.

2)환경과 기술

(1)환경

고지대 환경은 “다채로움”, “파편성”, “수직성” 등의 특징을 지닌다. 홉킨스는 17개의 특성지역을 열거한다. 네게브 고지, 유다 고지, 사마리아 고지, 갈릴리 고지. 이러한 다채로은 고지대 풍경은 어느 두 곳도 농경 정착을 하는데 동일한 여건을 제공해 주지 않음을 뜻한다.

(2)기술

테라스 조성 기술, 소석회로 만든 수조, 그리고 철제 도구의 사용이라는 세 가지 혁신적 기술이 철기 시대의 정착지 이동과 기술 혁신에 결정적인 요인들이었다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이 주장은 최근에 고고학적 결과에 기초한 연구들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1. 테라스(계단형 농지)는 용수 보존과 토양의 부식 방지를 위해 건조된다. 테라스가 겨우 몇몇 장소에서만 조성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이 기술이 이 시대의 지배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테라스는 다양한 지역적 조건들과 정착 역사 때문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2 소석회 반죽을 바른 수조 역시 전체 확장의 환경을 위한 열쇠가 못된다. 실로, 길로, 이즈벳 사르타와 같은 장소와 북부 네게브 지역들은 이런 수조가 없다.

3 철기 사용의 일반화는 탄화처리와 담금질(강철 처리 과정)이 알려진 기원전 10세기 이후에 비로소 가능했다고 한다. 갓월드가 제안한 대로, 새롭게 정착한 12세기와 11세기 주민들의 농사에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블레셋이 고지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철제 기술을 독점했다는 보도 역시 잔치와 예전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위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블레셋의 통제 하에 블레셋의 이익을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제 농기구를 가지기를 분명히 바랐을 것이다.”라는 관찰은 설득력이 있다.

4 위에서 언급한 기술은 협소한 정의에 입각한 논의이다. 메릴은 넓은 의미에서 기술을 “다양한 정황 속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얻고 실패를 피하기 위한 기능, 지식, 방법들의 유동적인 정보의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메릴의 정의에 기초하여 홉킨스는 철기 Ⅰ시대 고지대 사회가 생존을 위해 직면한 세 가지 중요한 도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다양한 환경을 이용하는 것, 2)다변하는 환경과 그것이 농업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처하는 것, 3)마을과 개별적으로 경작하는 농가의 전체 노동력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 이런 지침에 따라 홉킨스는 기초 생존 전략을 진정한 의미의 기술혁신으로 제시한다.

3)기초 생계 유지 전략

철기 Ⅰ시대 고지대 사회의 경제는 작지만 자율적인 촌락 농부들의 혼합적인 자급자족 농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농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목초지를 옮기는 축산업에 종사하였다. 후자는 집약농업 체제 내의 대안적인 전문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형태는 두 가지 장점을 가진다. 정치적으로 “이동 가능한 가축과 소 떼는 부동산보다 세금을 매기기가 용이하지 않고, 기술-환경적으로 곡식 생산과 축산업을 혼합하는 방식은 곡식만을 재배하였다가 장기간의 가뭄을 만났을 경우 식구들의 생계를 더 잘 지탱해 줄 수 있다. 철기 Ⅰ고지대 사회의 생계 유지 전략들은 크게 말해서 1)건식 농업과 축산업, 그리고 여러 번 수확하는 곡식들과 채소들을 혼합하여 생산하는 위기 분산 방식, 2)용수 보존과 토양의 침식 방지를 위한 테라스 조성, 3)사일로와 항아리 같은 저장 체계의 개발, 4)공동으로 노동하는 집단 형성, 유아 출산장려와 집약적인 노동을 통한 노동력의 극대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4)사회구조

철기 Ⅰ고지대 정착자들의 사회구조에 관한 통상적인 이해는 삼분법, 즉 벳 아브, 미쉬파하, 쉐벳, 혹은 맛테이다. 벳 아브 혹은 벳 아봇은 농사를 짓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사회적 단위는 정착하는 동안에 진행되었을 높은 치사율 때문에 가족 규모의 불안정성과 집중적인 추수기 혹은 테라스를 조성할 때 혹은 작물을 재배하는 밭과 주변에서 가축을 치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결핍이 야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세 번째 사회 단위가 자급자족을 위협하는 위기(예를 들어, 기근)에 직면하여 자체적으로 타개할 수 없을 때 보다 큰 사회 단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때 두 번째 분류 단위인 미쉬파하가 기능을 시작하고 이자 없는 상부상조를 감당한다. 일차 사회단위인 쉐벳트 혹은 맛테는 사회적 지역적 조직 단위를 가리키며 군사적인 자기 방위와 정치적으로 자치하는 자율성과 능력을 가진다. 갓월드에 따르면 성경 본문에서 이 분류 단위를 서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렘케는 이 용어가 군주제 이전 사회의 사회-정치적 현실에 아무런 사회-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사회구조의 기초는 벳 아브/벳 아봇이었으며 보다 큰 사회집단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다.

철기 Ⅰ시대 사회는 분절형 사회조직이란 특징을 지녔고, 지파 체제는 평등주의였다는 것이다. 이 공산주의적 생산 방식은 두 세기 동안 외부든 내부든 잉여농산물을 장악하려는 시도들에 이념적으로 저항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초부터 고지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잠재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계층화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몇 가지 고고학적 발굴품들은 이러한 초기 이스라엘 사회의 계층화를 시사해 준다.

고지대 농경사회의 전체적 모습들 돌이켜 볼 때 이 사회는 시초에 식량이 남아돌기보다 부족할 위기에 처했고 그래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집약적 농업 전략을 수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철기 Ⅰ시대 후반부에 도달한 사회-정치적 안정세는 이중적인 효과(개척 사회 내의 계층화와 제한적인 자원을 확충하기 위한 외부세계와의 접촉 시도)를 초래하였다.

5)수장제(chiefdom) 사회로 변천

초기 이스라엘 정착 사회가 지파 중심의 분절형 사회에서 수장제로 변천한 시점은 철기 Ⅰ시대의 후반부(기원전 1100-1000년)에 발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수장제란 지도자의 유형이 분절형 사회와 다르다. “수장제는 느슨한 정치체제를 지니며 지역 주민을 수천 명씩 중앙화하여 조직하는 사회체제이다. 사회적 지위는 어느 정도 세습이 가능하고 경제적 위계 질서가 연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사회에서 수장은 “집약자-재분배자-전사”로 불린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