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정체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와 구분하여 스스로 예언자적 개혁 정신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의 개신교는 구약시대 예언자의 후예요, 그 정신의 계승자로 자처할 수 있을까? 본 연구는 예언자의 정체와 그들의 시대정신, 그리고 그들이 남긴 메시지를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시작되었다.
문서예언자와 초기 예언자
최초로 예언자로 불린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모세는 그 다음 순서로 예언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출애굽기나 레위기, 민수기 그 어디에서도 그를 예언자라고 직접 호칭하지 않는다. 신명기에 이르러서야 모세는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불렀고 또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그렇게 불린다. 사사시대의 드보라는 최초의 여자 예언자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후 여러 익명 또는 이름 있는 예언자들이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에 빈번히 출현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든지 관계없이 그들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독립된 예언문집은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다. 신명기 역사 속에 활동한 예언자들 중에 자기 이름으로 수집된 예언서는 오직 요나와 이사야에 불과하다.
8세기에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로서 그의 예언이 최초로 문서로 수집된 아모스의 경우는 아주 분명하게 스스로를 가리켜 예언자도 아니며 예언자 집단 출신도 아님을 밝힌다. 호세아 역시 예언자로 불리지는 않는다. 남 유다의 모레셋 장로 출신으로 이해되는 미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서예언자 중, 오직 하박국과 스가랴만 그 책의 표지에서 그들을 “예언자”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들에 대한 예언서(문집) 내부의 증거와 신명기 역사 속에서 모세와 버금가는 예언자로 이해되는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문서적 증거는 아주 대조적이다. 우선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들에 관한 내러티브에서 줄곧 자타가 공인하는 “예언자” 혹은 예언자와 동등한 의미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린다. 왜 예언자로 불리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신탁은 문서로 남아 있지 않고, 예언자로 분류하기가 쉽지 않은 8세기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의 신탁은 문서로 남아 있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이스라엘의 예언과 예언 현상 그리고 예언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 의미 있고 중요한 고찰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한, 크게 세 가지 해법을 고려할 수 있다. 첫째로는 벨하우젠의 연구 결과에 따라 율법이 예언보다 후대의 사건이라는 입장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 견해는 8세기 문서 예언자들을 윤리적 유일신 사상의 창시자로 본다. 그러나 문서 예언의 원인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는 제이미슨-드레이크의 견해로서 8세기라는 시대의 역사적 특징을 그 이유로 제시한다. 8세기는 문화의 발전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문서 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절이다. 특히 남 유다의 히스기야 시절이 그렇다. 그런 문화적 영향으로 구전 예언이 문서로 보존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견해는 외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가능성이 있지만 내면적 동기 제시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셋째는 블렌킨솝의 견해이다. “8세기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했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예언자들이 실제로 무슨 말을 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것은 다시 아모스로부터 시작하여 에언자들이 대체로 한 개인보다는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메시지를 선포하였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블렌킨솝은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지만 그도 역시 기초적 관찰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두 견해보다 실제에 매우 근사한 분석으로 간주되므로 그의 견해를 다시 한 번 깊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견해의 문제점을 다음 몇 가지로 지적해 볼 수 있다. 우선 엘리야의 경우도 그가 전한 말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8세기 예언자의 메시지가 9세기의 예언자들처럼 개인에게 주어지기보다는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선포하였다는 관찰도 문제가 있다. 이유는 일단 이스라엘의 예언이 국민 전체에게 선포되었다는 정황에 대해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현재로서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언이 선포된 실제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예언자의 선포를 들을 수 있는 국민이란 도시에 거주하는 자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고 아니면 단지 문학적 과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에언자들의 말은 시초에는 시간을 두고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메시지의 내용 전달이 정확했었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직접 전달한 예언의 말들은 소수 국민, 즉 대부분 도시 거주민에게 전해졌을 것이며, 이들은 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왕실과 중앙관료들이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결국 왕실의 청중-왕, 측근, 파벌 지도자들-을 겨냥하여 선포되었을 것이다.
셋째로, 예언자들의 말과 행위가 두 왕국 몰락 이후 재차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는 설명은 일면 설득력 있는 방향 설정이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한가지 분명하게 동의할 수 있는 점은 역사적 위기의 정황이 예언자들의 말을 문서화하는 원동력을 제공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이유의 설명이 본 연구의 과제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 연구는 구전 예언이 문서 예언으로 보존되는 과정에서 기능했을 정치-경제-사회적 요인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블렌킨솝이 제시한 단순한 해법을 보다 새롭고 충분한 설명으로 교정될 것이다.
9세기 예언과 8세기 문서 예언의 연속성
9세기의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 활동이 8세기의 문서 예언자와 차이가 있었는가? 만약 우리가 9세기와 8세기의 예언 활동에 별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공통점이 많다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문서예언의 출현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앞서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두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 어간에 활동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안정과 군사적 강점 행위 아래 당시의 다수 국민이 겪은 전형적이 사회현상은 가뭄, 기근, 전쟁, 강제부역, 중과세, 토지강탈, 채무구조의 악순환과 노예화 등이었다. 이 시대의 정치-경제적 역학을 사회과학자들은 대지주화 과정(latifundialization)이라고 부른다. 대지주화 과정은 왕이 주도하는 국가가 영토 확장 및 정복 전쟁을 수행한 후 공을 세운 장군과 측근들에게 왕이 국토의 일부 지역을 보상으로 하사하는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역학은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구조의 양극화를 촉진시킨 원인 중의 하나로 이해된다. 이렇게 삶의 기본 조건들을 박탈당한 채 고난 당하는 다수 농민의 고충을 해소해 주고 왕조의 미래를 갱신하는데 뛰어든 사람들이 엘리야와 엘리사였다. 두 예언자는 위에서 열거한 악조건들을 기적적 행동들을 통해 하나씩 풀어 주었다.
이와 같은 대지주화 과정 속에서 예언 활동을 하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입으로부터 과연 아모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가?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상 17장에서부터 열왕기하 13장까지를 살펴보면, 그들은 사회비판에 관한 말보다는 행위를 더 많이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주제-불법적인 종교 숭배와 백성의 재산 강탈(왕상 18:18, 왕상 21:17-20)-는 8세기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의 선언과 활동은 문서예언자, 특히 8세기 예언자들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 신탁의 양식은 인과응보적 저주로서 계약사상에 근거한 저주로 알려져 있는 무익저주(futility curse)이며, 문화적 정의를 예증한다.(암 2:6-7, 암 5:11, 암 6:7, 암 8:9-10) 엘리야와 아모스의 신탁은 사회비판적 내용면에서, 그리고 그것을 담고 있는 양식으로서 문학적 정의(poetic justice)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양자는 결코 상이하지 않으며, 따라서 연속성을 지닌다고 단언할 수 있다. 어떻게 문서 예언과 연속성을 지닐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문서 예언의 정치적 차원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아모스와 호세아의 예언들은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의 멸망 사건을 통하여 그 신적 기원이 입증되었을 것이다. 홀로 팔레스틴에 존속한 유다 왕조가 안팎의 정치적 위기를 당할 때, 이들의 예언과 성취를 객관적 교훈으로 삼았을 것이란 생각은 거의 확정적이다. 그리고 그 교훈으로부터 생기는 예언자의 말씀의 권위에 힘입어 한 걸음 더 나아가 당대에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풀려고 했을 것이다. 즉 후대의 사가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이런 예언자들의 권위를 이용하여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문학적 작업을 수행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양자는 사상, 문학양식, 그리고 체제에 대한 이중적인 성격을 보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서로 동일하다. 서로를 구분하여 ‘초기 예언자’ 혹은 ‘문서 예언자’로 나눌 만한 아무런 문헌적 사상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누어져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과연 그렇게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문서예언을 창출한 결정적 요인
1)8세기의 정치-경제적 농경사회의 역학 : 극심한 집약농업 정책
8세기 예언자들은 모두 특정한 시간대에 활동하였다. 무엇이 그들의 예언 활동을 자극했을까? 기원전 8세기는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다윗과 솔로몬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는 번영의 극치에 이른 시기라고 평가한다. 그 중에서도 “집약농업의 역학”은 이스라엘 사회를 변화시킨 주요 역학적 원인이라고 주목된다. 프릭은 초기 이스라엘이 본래는 반-왕정적 이념으로 출발한 초기 이스라엘이 왕정을 다시 구성하게 된 주요 원인이 바로 이 집약농업의 역학 때문이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기원전 8세기를 이스라엘 역사상 “집약농업 역학이 가장 극심하게 작용했던 시대”라고 판한다. 그렇다면, 이 직업농업역학이 8세기의 이스라엘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였으며 그 증거는 무엇인가? 또 그 역학을 8세기 예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2)집약농업역학의 성서적 증거
이 역학은 장기간의 사회적 변화를 일컫는 것이므로 그것은 마을 중심의 초기 이스라엘 사회가 왕조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회적 변화에 대한 설명을 먼저 요구한다. 초기 이스라엘은 중앙 산지에 정착하면서 자급자족하는 농촌경제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인구증가와 토지 부족, 블레셋의 침투가 원인이 되어 초기 지파 사회는 왕조 사회로 바뀌었다. 왕조 사회는 궁전과 중앙 성소의 건설 및 기념비적 건축물의 건설과 함께 관료들이 상주하는 중앙의 도시를 형성시켰다. 이에 따라 전체 인구의 일부와 용역과 농산물의 중앙 집중화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도시와 농촌의 구분은 물론 상류층과 하류층의 계층 사회도 역시 형성되게 되었다. 더구나 잦은 정벌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전쟁에 차출되자, 농촌 사회는 심한 일손 부족 현상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유휴노동력인 관료 계층의 형성은 이전에 없던 조세제도의 시작을 뜻하였다. 이는 도시 경제의 유지를 위해 마을 경제가 자급자족하던 생산량을 잉여생산량까지 확보해야만 하는 제도적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왕은 또 충성하는 신하들에게 토지를 보상으로 하사하는 제도(prebendal system)를 실시함으로써 관료들은 도시에 거주하면서 원거리의 시골에 있는 자신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이익을 챙기는 부재지주 역할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족한 노동력과 잉여생산의 압력은 농촌의 농민으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집약농업을 실시하게 만들었다.
특히 8세기의 경우, 동서남북으로 넓은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한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와 남왕국의 웃시야는 자매 국가로서 국제무역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이 시대의 두 왕실은 많은 농산품 중에서 현금가치가 가장 높은 포도주와 감람유의 생산에 열을 올렸고 곡식도 보리보다는 단위 생산가가 높은 밀 생산에 주력하였다. 웃시야는 이를 위해 제도적으로 전 국토를 삼분하여 밀,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축산물 생산지역으로 배분하는 전략품목 특수생산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정책을 “땅을 사랑함”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이 평가는 순전히 왕실 서기관의 입장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농민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특정지역을 특정 농산품만을 재배하게 만드는 왕실 주도의 의무 경제에 따라 시행된 이 정책은 토지 사용에 위기 집중을 가중시키므로 토질 저하와 생산 저하, 그리고 마을의 자율적 교환경제를 도시 중심의 시장경제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농민에게는 삼중 부담과 함께 경제적 악순환의 일차적 원인이 되었다. 부는 상류계층에만 집중하게 되고 하층민은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는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 정치-경제적 정황 전체를 가리켜 집약농업의 역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정황 속에서 과연 무엇이 그리고 누가 외롭고 의로운 자이고, 불의한 일이며 죄인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또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는 사회 속에서 야웨 신앙의 자리는 어디이겠는가?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채무불이행을 단죄하여 농민의 재산을 압류하고 권리의 박탈을 선고하는 인간의 법정들(왕실, 성소, 지방 법정) 앞에 맞서서 이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바로 8세기 예언자들이었다.
3)예언자의 개입
이 모든 역학의 배경에는 야웨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우리 모두는 경악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실이었다. 위정자들은 야웨의 이름을 내걸고 의무 경제를 강요하였음에 분명하다. 실례로 이사야 3:12을 읽어보자. ‘아이’란 단어는 중의어로서 ‘학대하는 자’ 외에 ‘수확자, 불의한 자’란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 단어이며, 여인은 아킬라와 심마쿠스 역본처럼 채권자로도 읽을 수 있다. 이 독법에 따르면 유다 왕조의 위정자들이 바로 백성들의 채권자라고 단언한다. 하반절의 ‘네 인도자들’로 번역한 메앗쉐레카는 동사 아샤르의 피엘형 분사로서 “곧장 가다, 전진하다, 행복하게 선언하다, 축복을 외치다”등의 뜻을 갖고 있어서, 이 단어는 문맥상 ‘너희 번영을 선전하는 자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래서 후반절은 “내 백성들아 너희 번영을 선전하는 자들이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로 읽을 수 있다. 이 하반절은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번영을 선전하면서 경제 정책을 실시하는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이 단 한마디의 구절에서 8세기 예언자 이사야는 위정자가 다수 농민들에게 번영과 행복을 구실 삼아 생산성 향상을 독촉하면서도, 그들의 기본 생존권의 희생을(아마도 야에 신앙의 기치를 앞장세워서) 무마하려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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