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0. 10:44
As it is
출처 : http://baram.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008142242342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소모될 수 있을지를 꿈꾸는 의사-'국경없는의사회' 소아과 전문의 고은영씨
환경보호운동의 마스코트가 ‘그린피스’라면 의료지원 분야에서는 이 단체가 대표격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전쟁터든 재난지역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임, ‘국경없는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
유명세만큼 멀게만 느껴지던 이 단체에도 알고 보면 한국인 활동가가 여럿 있다. 4월 중순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현재 ‘국경없는의사회’ 일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소아과 전문의 고은영씨를 만났다.
-의사인데, 국내에서도 의료활동을 하나요.
“서울 면목동 서울녹색병원 소아과 과장으로 있어요. 이 병원은 1999년 당시 국내 유일의 레이온 생산공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안전설비 없이 이황화탄소(CS2)에 노출된 ‘원진 레이온 사건’을 계기로 설립됐어요. 이후 피해자들의 장기 치료를 위해 99년 6월 5일 현재의 원진 종합센터(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민간 병원이면서도 공익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병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교사이신 아버지의 추천 아닌 추천 덕분이었어요. 전문의 따고 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구체적인 생각이 없었던 그 때 아버지께서 ‘국경없는의사회’에 대한 신문기사를 가지고 오셨어요. 당시 국내에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도 지부가 있어서 새터민 프로젝트를 포함해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죠.
그 때를 계기로 ‘국경없는의사회’에 지원하게 됐어요. 다행히 보건대학원 석사과정을 끝내자마자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었지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전 제가 '소모품'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내가 가장 효율적으로 소모될 수 있을까 생각해요. 전문의가 되기까지 10 년 이상 했던 공부, 그 동안 쌓은 경험, 기술들을 가장 잘 써먹고 싶었어요. 그런 고민들이 ‘국경없는의사회’에서의 활동과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고씨의 첫 근무지는 아프리카였다. 2005년 9월 니제르에서 6개월 동안 활동했고, 3년 뒤 아이티(2008년 6월∼2008년 7월)를 거쳐 시에라리온(2008년 8월∼2009년 6월)에 머물렀다. 모두 내전과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들이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스스로 가장 효과적으로 ‘소모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해외 근무지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요.
“같은 프로젝트라도 그 안에 의사, 행정가, 로지스틱(물자 보급 담당) 등 여러 팀이 있어요. 저는 의사로서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의료활동을 해요. 제 전공이 소아과다 보니 주로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게 되지요.
한국은 낮은 출산율 때문에 소아과와 산부인과 인기가 떨어졌지만 고령자에 비해 어린이 비율이 높은 피라미드형 인구분포를 보이는 개발도상국에서는 가장 절실히 필요한 전공 중 하나가 소아과예요. 하지만 필요한 때에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해서 하루에도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에피소드도 많았겠네요.
“현지에 도착해서 아직 그 곳 생활에 익숙해지지도 않았을 때였어요. 첫 당직을 선 날 하루 동안 네 명의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던 적이 있어요. 제가 갔던 나라들은 전부 그런 곳이에요. 약만 먹으면 나을 수 있는 질병 때문에 마을에서 보건소가 있는 곳까지 며칠씩 가다가 도중에 죽는 사람도 많고….
모든 게 부족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저에게는 아니었어요. 힘들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진찰을 못 할 정도였으니까.”
-일이 매우 고될 것 같은데요.
(정색을 하며) “하나도 안 힘들어요!”
-쉴 시간이 전혀 없었겠네요.
“근무가 끝나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 혹은 현지 직원들 만나서 여가를 즐기죠.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은 만나지 못하는 대신 근무지에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한국에 있다고 해서 특별한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여가시간 없다고 아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몰려드는 환자를 끝 모르게 진찰하는 것은 즐겁고 여가시간이 없는 것도 전혀 아쉽지 않다니. 이 정도면 ‘워커홀릭’이다. 이렇듯 국내외를 오가며 일하는 고 씨는 최근 2년 동안 국경없는의사회 일본지부 이사로도 활동했다. 그녀를 통해 ‘국경없는의사회’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도 다소나마 들을 수 있었다.
-보통 비정부기구(NGO)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데 ‘국경없는 의사회’는 어떤가요.
“재정독립은 다른 국제 원조 단체들과 구별되는 ‘국경없는의사회’만의 몇 가지 특징이에요.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NGO도 있지만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자금은 대부분 개인 기부자에게서 나와요.
개별 국가나 국제연합(UN), 유럽인도주의구호국(ECHO)등에서 오는 기부금의 비율도 제한하고 있지요. 이는 정치적 입장과도 관련이 있어요. 한 나라에 전쟁 혹은 자연재해가 발생해 구호가 절실한 경우, 주요 자금줄을 대는 국가나 기업이 해당국가에 적대적이라면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게 돼요. 특정 세력이 막대한 자금으로 인도주의 구호활동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NGO의 재정적 독립은 필수적이에요.
이런 측면에서 ‘국경없는의사회’는 금전관계로 인한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기치 아래 각국의 정치상황에 무책임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딜레마를 겪기도 해요. 가령 독재자가 폭정을 일삼는 나라에 파견될 경우, 침묵을 하느냐 이에 맞서 투쟁을 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발생하지요. 어떤 선택지가 정답이라고는 말하기 힘든 것 같아요.
침묵할 경우 현실과 타협하게 되지만 그곳에서의 당면과제인 환자 치료에만 집중을 할 수 있게 되고, 투쟁할 경우 정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대신 추방을 당하는 등의 위험요소 때문에 ‘구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니까요.
일반적으로는 현지에 파견된 활동기간 내에는 정치적인 발언을 삼가요. 동료들과의 마찰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 치료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부조리의 정도가 심각해지면 추방당할 각오를 하고 비판적인 발언을 해요. 이에 대한 결정권은 개인활동가가 아닌 현지 프로젝트 책임자가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에 있는 5개의 오퍼레이션 지부와 회의를 통해 결정해요.
‘국경없는의사회’는 인도주의 구호 단체로서 중립성과 비편파성을 헌장에 명시하고 있어요. 이는 부조리를 회피하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닌, 필요한 경우 과감하게 철수를 결정하고 불의를 국제 사회에 고발한다는 ‘증언의 정신’을 뜻하는 것이지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무엇인가요.
“라오스로 출국해요. 보건복지부 산하 기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돼서 1년 정도 라오스에 있게 되었어요. NGO에서 일할 때는 주로 구호사업에 투입됐지만 이번에는 정부기구(GO)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구호활동보다는 인프라 구축에 집중할 것 같아요. 이후에도 계속 ‘국경없는의사회’와 함께 할 것 같고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속가능사회'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저는 '의료봉사'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뒤의 두 글자 '봉사'가요. 제가 하는 구호활동을 사회적으로 존경 받아야 마땅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의 직업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지속가능사회’ 아닐까요?
한 사람의 '의도하지 않은' 행위가 다른 사람 혹은 사회 전체적인 부(Welfare)를 증진시키고, 이런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시스템이 갖추어진 사회 말이에요. ‘건강한 개인’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건강한 사회’, 그것이 ‘지속가능사회’가 아닐까요?”
인터뷰를 시작한 지 어느새 3시간이 넘어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표현이 새삼 떠올랐다. 아마도 고씨의 대답이 어디서 읽고 외웠다거나 꾸며낸 것이 아닌 그녀만의 솔직한 언어로 가득 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통방식이 그녀를 ‘국경없는의사회’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은 아닐까.
문득 안도현 시인의 시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너는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우리, 일상에 지쳐 자기 발치만 내려다보며 걷느라 스스로 뜨거워질 기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은 내가 뜨거워지면서 비로소 살만해지고 따뜻해지는 것인데 말이다.
◆ ‘국경없는 의사회’란?
1971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국제 민간 의료/인도 구호단체이다.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긴급의료구호를 주목적으로 하며 매년 세계 65개국 4600여 명 이상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분쟁지, 난민촌, 자연재해 발생지와 전염병이 유행하는 곳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외부로부터 제한/간섭받지 않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인종, 정치, 종교를 불문하고 의료단을 파견하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박성철/인터넷 경향신문 대학생 기자 (웹場 baram.khan.co.kr)
유명세만큼 멀게만 느껴지던 이 단체에도 알고 보면 한국인 활동가가 여럿 있다. 4월 중순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현재 ‘국경없는의사회’ 일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소아과 전문의 고은영씨를 만났다.
-의사인데, 국내에서도 의료활동을 하나요.
“서울 면목동 서울녹색병원 소아과 과장으로 있어요. 이 병원은 1999년 당시 국내 유일의 레이온 생산공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안전설비 없이 이황화탄소(CS2)에 노출된 ‘원진 레이온 사건’을 계기로 설립됐어요. 이후 피해자들의 장기 치료를 위해 99년 6월 5일 현재의 원진 종합센터(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민간 병원이면서도 공익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병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교사이신 아버지의 추천 아닌 추천 덕분이었어요. 전문의 따고 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구체적인 생각이 없었던 그 때 아버지께서 ‘국경없는의사회’에 대한 신문기사를 가지고 오셨어요. 당시 국내에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도 지부가 있어서 새터민 프로젝트를 포함해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죠.
그 때를 계기로 ‘국경없는의사회’에 지원하게 됐어요. 다행히 보건대학원 석사과정을 끝내자마자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었지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전 제가 '소모품'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내가 가장 효율적으로 소모될 수 있을까 생각해요. 전문의가 되기까지 10 년 이상 했던 공부, 그 동안 쌓은 경험, 기술들을 가장 잘 써먹고 싶었어요. 그런 고민들이 ‘국경없는의사회’에서의 활동과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고씨의 첫 근무지는 아프리카였다. 2005년 9월 니제르에서 6개월 동안 활동했고, 3년 뒤 아이티(2008년 6월∼2008년 7월)를 거쳐 시에라리온(2008년 8월∼2009년 6월)에 머물렀다. 모두 내전과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들이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스스로 가장 효과적으로 ‘소모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해외 근무지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요.
“같은 프로젝트라도 그 안에 의사, 행정가, 로지스틱(물자 보급 담당) 등 여러 팀이 있어요. 저는 의사로서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의료활동을 해요. 제 전공이 소아과다 보니 주로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게 되지요.
한국은 낮은 출산율 때문에 소아과와 산부인과 인기가 떨어졌지만 고령자에 비해 어린이 비율이 높은 피라미드형 인구분포를 보이는 개발도상국에서는 가장 절실히 필요한 전공 중 하나가 소아과예요. 하지만 필요한 때에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해서 하루에도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에피소드도 많았겠네요.
“현지에 도착해서 아직 그 곳 생활에 익숙해지지도 않았을 때였어요. 첫 당직을 선 날 하루 동안 네 명의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던 적이 있어요. 제가 갔던 나라들은 전부 그런 곳이에요. 약만 먹으면 나을 수 있는 질병 때문에 마을에서 보건소가 있는 곳까지 며칠씩 가다가 도중에 죽는 사람도 많고….
모든 게 부족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저에게는 아니었어요. 힘들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진찰을 못 할 정도였으니까.”
-일이 매우 고될 것 같은데요.
(정색을 하며) “하나도 안 힘들어요!”
-쉴 시간이 전혀 없었겠네요.
“근무가 끝나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 혹은 현지 직원들 만나서 여가를 즐기죠.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은 만나지 못하는 대신 근무지에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한국에 있다고 해서 특별한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여가시간 없다고 아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몰려드는 환자를 끝 모르게 진찰하는 것은 즐겁고 여가시간이 없는 것도 전혀 아쉽지 않다니. 이 정도면 ‘워커홀릭’이다. 이렇듯 국내외를 오가며 일하는 고 씨는 최근 2년 동안 국경없는의사회 일본지부 이사로도 활동했다. 그녀를 통해 ‘국경없는의사회’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도 다소나마 들을 수 있었다.
-보통 비정부기구(NGO)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데 ‘국경없는 의사회’는 어떤가요.
“재정독립은 다른 국제 원조 단체들과 구별되는 ‘국경없는의사회’만의 몇 가지 특징이에요.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NGO도 있지만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자금은 대부분 개인 기부자에게서 나와요.
개별 국가나 국제연합(UN), 유럽인도주의구호국(ECHO)등에서 오는 기부금의 비율도 제한하고 있지요. 이는 정치적 입장과도 관련이 있어요. 한 나라에 전쟁 혹은 자연재해가 발생해 구호가 절실한 경우, 주요 자금줄을 대는 국가나 기업이 해당국가에 적대적이라면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게 돼요. 특정 세력이 막대한 자금으로 인도주의 구호활동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NGO의 재정적 독립은 필수적이에요.
이런 측면에서 ‘국경없는의사회’는 금전관계로 인한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기치 아래 각국의 정치상황에 무책임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딜레마를 겪기도 해요. 가령 독재자가 폭정을 일삼는 나라에 파견될 경우, 침묵을 하느냐 이에 맞서 투쟁을 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발생하지요. 어떤 선택지가 정답이라고는 말하기 힘든 것 같아요.
침묵할 경우 현실과 타협하게 되지만 그곳에서의 당면과제인 환자 치료에만 집중을 할 수 있게 되고, 투쟁할 경우 정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대신 추방을 당하는 등의 위험요소 때문에 ‘구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니까요.
일반적으로는 현지에 파견된 활동기간 내에는 정치적인 발언을 삼가요. 동료들과의 마찰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 치료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부조리의 정도가 심각해지면 추방당할 각오를 하고 비판적인 발언을 해요. 이에 대한 결정권은 개인활동가가 아닌 현지 프로젝트 책임자가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에 있는 5개의 오퍼레이션 지부와 회의를 통해 결정해요.
‘국경없는의사회’는 인도주의 구호 단체로서 중립성과 비편파성을 헌장에 명시하고 있어요. 이는 부조리를 회피하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닌, 필요한 경우 과감하게 철수를 결정하고 불의를 국제 사회에 고발한다는 ‘증언의 정신’을 뜻하는 것이지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무엇인가요.
“라오스로 출국해요. 보건복지부 산하 기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돼서 1년 정도 라오스에 있게 되었어요. NGO에서 일할 때는 주로 구호사업에 투입됐지만 이번에는 정부기구(GO)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구호활동보다는 인프라 구축에 집중할 것 같아요. 이후에도 계속 ‘국경없는의사회’와 함께 할 것 같고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속가능사회'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저는 '의료봉사'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뒤의 두 글자 '봉사'가요. 제가 하는 구호활동을 사회적으로 존경 받아야 마땅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의 직업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지속가능사회’ 아닐까요?
한 사람의 '의도하지 않은' 행위가 다른 사람 혹은 사회 전체적인 부(Welfare)를 증진시키고, 이런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시스템이 갖추어진 사회 말이에요. ‘건강한 개인’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건강한 사회’, 그것이 ‘지속가능사회’가 아닐까요?”
인터뷰를 시작한 지 어느새 3시간이 넘어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표현이 새삼 떠올랐다. 아마도 고씨의 대답이 어디서 읽고 외웠다거나 꾸며낸 것이 아닌 그녀만의 솔직한 언어로 가득 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통방식이 그녀를 ‘국경없는의사회’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은 아닐까.
문득 안도현 시인의 시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너는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우리, 일상에 지쳐 자기 발치만 내려다보며 걷느라 스스로 뜨거워질 기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은 내가 뜨거워지면서 비로소 살만해지고 따뜻해지는 것인데 말이다.
◆ ‘국경없는 의사회’란?
1971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국제 민간 의료/인도 구호단체이다.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긴급의료구호를 주목적으로 하며 매년 세계 65개국 4600여 명 이상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분쟁지, 난민촌, 자연재해 발생지와 전염병이 유행하는 곳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외부로부터 제한/간섭받지 않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인종, 정치, 종교를 불문하고 의료단을 파견하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박성철/인터넷 경향신문 대학생 기자 (웹場 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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