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많은 종교인들은 '신앙은 이성을 초월한다' 또는 '종교는 철학을 넘어선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신앙이 합리나 비합리(불합리)를 넘어서는 초합리적이며 초논리적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나 신앙이 초합리적이며 초논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 안셀무스(St. Ansellmus)에 따르면, 신학이란 '이해를 구하는 신앙', 다시 말해 '신앙을 해명하는 작업'이다. 만약 신앙이 전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신학이 있을 수 있는가? 신앙이 이성이나 철학을 초월한다는 말의 참된 뜻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헌신의 문제임을 지적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헌신 - 실천 - 의 문제 역시 모든 종교적 담화에서 이성적 논의를 배격하자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무언가를 믿기 전에 그것을 이해하려고 한다. 따라서 종교인이 자신의 신앙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설득하려고 할 때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을 능력이 닿는 데까지 합리적으로 이해시켜야 한다. 사실 우리는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접하게 될 때 그것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을 듣기 원하며, 그것이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 때에는 그것에 관한 납득할 만한 해명을 요구한다. 물론 만족할 만한 합리적인 설명이란 쉽지 않으며 설혹 합리적인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신앙 즉 종교적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논의의 영역을 확보하는 일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모두에게 유익하다. 합리적인 논의란 바로 종교인과 비종교인, 종교인과 종교인 간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을 말한다. 종교인은 합리적 논의를 통해 자신의 신앙이 부지불식간에 빠져들 수 있는 미신이나 광신을 경계할 수 있고, 비종교인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을 수 있는 종교에 대한 막연한 반감, 즉 종교란 대체로 불합리한 것이기에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을 제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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