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2. 21:09
As it is
출처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539689&cp=du
[2010.03.25 17:42]
서울 서초동 대한성서공회 4층에 성서학문헌정보자료실이란 곳이 있다. 성서와 관련한 다양한 책이 구비된 도서관이다. 감리교신학대 교수와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지낸 민영진(71) 목사가 연구실로 사용하는 조그만 방이 이 도서관 내에 있다. 그 방 안에 서재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책장이 있다.
민 목사의 인생은 단순하다. 그의 일생은 구약 신학학자로서 후학을 가르친 교수로서의 기간과 성서번역가로서 산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 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지난 시절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민 목사에게는 지금 외관상 보이는 서재는 없다. 2007년 대한성서공회 총무직을 물러나면서 소장했던 대부분의 책을 대한성서공회와 실천신학대학원, 강원도의 한 학교 등에 기증했다. 대한성서공회 내 성서문헌정보자료실에는 민 목사의 책들이 꽂혀있다. 실천신학대학원 도서관에는 민 목사 이름의 책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구약 신학학자로, 성경번역가로, 크리스천 시인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왔던 민 목사는 은퇴 이후에도 서울대 종교학과와 감신대 등에서 강의를 하며 국내외에서 성경번역컨설팅 작업을 하고, 시를 쓰는 등 이전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함박웃음이 넉넉한 그와 만나 3시간 남짓 이야기 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참 잘 늙으셨다. 나도 저렇게 늙으면 좋겠다.’
자료실 내 그의 사무실 책장을 보면 다양한 이스라엘 관련 서적이 눈에 띈다. 탈무드와 함께 성경의 주제별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 미드라시 등 일반인은 쉽게 접하기 힘든 책이 그득 놓여 있다. 히브리대학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그는 탈무드와 미드라시를 만났다.
“유대인은 2000여년 동안 성경을 읽어왔습니다. 구약을 읽은 역사는 3000년이 넘었지요. 그 기간 동안 각 구절에 대한 무수한 해석이 가해졌습니다. 랍비문학의 대표적인 유산이 바로 탈무드와 미드라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은 역사는 고작 100년 남짓입니다. 유대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짧은 기간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대교의 전통이나 유대인의 경험 및 성경에 대한 인식 방법 등을 알아야 합니다.”
민 박사는 국내에 나온 탈무드는 각종 금언과 격언의 모음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탈무드는 금언집이 아니라 성경 주석”이라면서 “각 구절에 대해 수십 명의 랍비가 대를 이어 논쟁한 주석으로 오랜 생각의 축적”이라고 강조했다. 민 박사에 따르면 기독교 역사가 짧을수록 처음 배운 것만 정통이고 다른 해석은 이단으로 정죄하기 쉽다. 그는 성경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책장에 꽂혀있는 ‘최근 읽고 있는 책’들을 둘러보니 ‘러브 스토리’의 저자 에릭 시걸의 ‘Acts of Faith’, 미국의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의 ‘예루살렘의 거지들’, 20세기 최고의 유대계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평가받는 아브라함 헤셀의 ‘안식’ 등이 보였다. ‘중국어 성경과 번역의 역사’ ‘이스라엘 이야기’ 등 대부분 성경 번역 및 유대교와 관련된 책이었다.
민 목사는 은퇴 이후 자신의 진짜 서재는 컴퓨터 내에 있다고 말했다. 그의 컴퓨터에는 성서번역과 관련한 100여권의 필수 서적이 전자책 형태로 들어 있다. 성경 번역자를 위한 파라텍스트 프로그램을 비롯해 영어와 독일어, 불어 등 각종 번역 성경 40여종도 컴퓨터에 있다. 인터넷만 잘 활용해도 수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민 목사는 설명했다.
그의 책장에 있는 1150여쪽의 ‘김춘수 시선집’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민 목사의 느낌을 적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시인인 그는 월간 ‘창조문예’의 ‘민영진의 시 읽기’라는 고정란을 맡았다. 김춘수 시인의 ‘나의 하나님’을 읽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는 민 목사는 “크리스천도 아닌 김춘수의 시를 읽으면서 한국 기독교 100년의 성숙을 확인할 수 있어서 참 기뻤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 그는 다양한 독서를 하고 있다. 독서와 집필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독서하다 글을 쓰고, 글 쓰다가 책을 읽는다. 강의를 하지 않는 날이면 아침 9시에 서재에 앉아 다음날 새벽 2시 넘어 침실에 들어가곤 한다. 지금도 어디에 있든지 책을 읽으려 노력하고 있다. 정보습득 보다는 사유를 돕는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이다.
물론 그에게 최고의 책은 성경이다. ‘나를 변화 시킨 한 권의 책’을 골라 달라는 질문을 했다.
“성경 한 권도 아직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물론 내게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단연 성경이지요. 그 한 권의 책이 나를 바꾸었다기보다는 평생 그 한 권에 매달려 왔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독서를 한 것은 오직 그 한 권의 책, 성경을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생에 걸친 독서는 성경을 읽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민 목사의 말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이 말도 울림이 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읽어 온 성경 이외의 독서를 가지고 성경과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나와 성경이라는 서로 다른 두개의 텍스트가 만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독서 내용과 질에 따라서 나와 성경과의 대화는 달라지는 것이지요.”
그는 “성경은 읽을 때마다 다르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성경해석과 관련해 도그마란 있을 수 없다는 살아있는 증거”라고 언급했다.
민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지금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나의 독서는 ‘오직 한 권의 책’인 성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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