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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4. 16. 09:13 개똥철학

현대 복음서 연구 동향에 대한 포괄적인 소개와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분석과 비평을 하고 있는 이 책의 목적은 최근의 복음서 연구들에 대하여 두루 살펴보는데 있으며 시기적인 요청 때문이다. 총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본, 독본, 비평, 해석학, 복음, 복음서, 신학, 해석의 순으로 복음서에 대한 신약 신학자들의 비평과 해석을 싣고 있으며, 저자인 키스터 메이커 박사는 미국 칼빈대학, 칼빈신학교를 거쳐 1961년 화란 자유대학을 거쳤으며, 미국 신약학계에서 개혁주의 입장을 지닌 복음주의 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장 사본에서는 도마복음서와 사해사본 그리고 파피루스에 대한 내용을 싣고 있다. 도마복음서는 예수-말씀들 수집이 성행했음을 그리고 독립된 전승이라기보다 정경복음서에 의존하고 있으며 당시 영지주의 종파의 최초의 문서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는다. 사해사본은 전 기독교 세계(pre-Christian era)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파피루스를 통해서는 당시 통용되던 코이네 희랍어에 대한 이해와 신약 성경의 스타일을 이해하는데 기여를 했다.

2장 독본에는 번역본, 본문비평, 문학비평을 싣고 있다. 다양한 성경번역본에 대한 소개 그리고 본문비평을 통해서는 많은 희랍어 사본들 가운데 발견되는 특징들(예, 교리적인 이유로 구절을 삽입)을, 문학비평에서는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와 상호의존성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3장 비평에서는 자료비평, 양식비평, 편집사 비평, 청중 비평 등 각 비평학자들의 비평과 해석을 싣고 있다. 자료비평에서는 마가복음 우선설을, 양식비평에서는 성경을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확대로 보면서 초대교회가 복음을 산출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편집사 비평에서는 편집사를 복음서 단위의 수집사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복음서 기자의 신학적 목적에 의한 삶의 정황을 근거로 한 성경 편집을 주장한다.

4장 해석학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새 해석학을 소개하고 있다. 불트만은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그 구정에 있어서 상징들을 넣었다고 보면서 허구로부터 사실을 분리시키는 비신화화(demythologizing)를 통해 신약의 메시지를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새 해석학에서는 성경의 의미를 인간에게 집중시키면서 복음서에 보도된 역사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음으로 복음서의 가치를 추락시킨다.

5장 복음에서는 교회와 복음, 예수의 말씀들. 교회와 복음에서는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반영하고 있으며(예를 들면 마태복음의 ‘교회’라는 단어는 교회가 생기기 전이었다), 예수의 말씀들에서는 눅, 행, 바울서신들, 야고보서 등을 통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성경이 유통되어진 상황들을 살펴보고 있다.

6장에서는 각 복음서의 저자, 자료, 특징들에 대한 비평을 싣고 있다.

7장에서는 인자(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부활이라는 세가지 주제로 예수의 생애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 인자라는 말은 오직 복음서 안에만 있으며 다른 서신들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떤 학자들은 양식비평 방법으로 이 표현이 초기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초대 교회가 신앙고백으로 발전시킨 초대 기독교 신학의 흔적이라는 주장을 소개했으며, 부활에서는 논쟁의 중심에 있는 빈무덤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 사실, 부활 기사가 똑 같은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점, 초대 기독교 신앙이 부활의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등을 소개하고 있다.

8장에서는 실존주의적 접근, 후 불트만 학파의 접근, 구조주의, 포괄적인 접근, 원리들, 방법들을 소개하면서 성경에 대한 접근과 해석 방식에 있어서 필요한 사항들을 나열하고 있다. 실존주의적 접근은 주어진 본문이 오늘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주고 있는지의 여부(불트만), 후 불트만 학파는본문 자체보다 그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 해석의 원리에 관심을 갖는다. 구조주의는 본문의 저자가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만 언어적 요소와 그들의 관계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포괄적인 접근에서는 리덜보스에 의한 마태복음서의 배열 및 내용과 관련하여 복음서의 구조를 추적하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난 믿음(?)이 참 좋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질문 앞에 내 믿음에 대해 이성적인 답변을 해주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예수가 죽었을 때 살아났던 성도들의 부활 기사를 통해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 이하) 이 문맥은 예수의 죽음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게 되었고 성도들은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때까지 그들은 무덤 안에서 무엇을 하였으며, 왜 그들은 자기들의 무덤 안에서 무엇을 하였으며, 왜 그들은 자기들의 무덤 안에 머물러 있었는가?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 앞서, 단 한번도 이 구절을 보면서 이와 같은 질문을 해 본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부활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하더라도 곳곳에 표현되고 있는 성경에 대한 비평적인 시간이 일리가 있어 보이는 까닭은 그만큼 성경을 볼 때의 시각이 나로 하여금 그런 관찰과 사유를 도외시하게끔 만든 일정한 신앙의 패턴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복음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이 단편적인 몇몇 이야기 정도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현대의 복음서 연구라는 책을 통해 복음서에 대한 여러 학문적 접근방법 그리고 현재 나에게 있는 복음서를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으로의 이해를 갖게 된 것이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비평이란 말 자체가 갖는 거부감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도 ‘무오한’ 성경을 비평한다는 여러 양식들과 해석들을 읽어가는 가운데 처음의 거부감과는 달리, 그 동안 복음서를 읽으면서 특별한 문제의식과 의문과 질문이 없었던 본인에게 오히려 신학도로서 갖추어야 할 탐구정신과 사유가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같은 예수를 이야기하는 복음서들이 서로 다른 것은 예수를 해석하는 눈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복음서 저자의 신학적 주관의 차이,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그들(저자)의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복음서에 대해서 여러 비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이 해석자에게 열려있으며 또한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그것은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가 객관적인 예수가 아닐 수도 있으며 복음서의 사건이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기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알고 있는 내용과 이해가 객관적일 것이라는 확신과 동시에 그것은 진실성을 확보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객관성과 진실성을 동일시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비평과 해석에 대한 식견은 필요하다. 많은 해석의 껍질을 벗겨내야 하는 이 작업을 통해서 한번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는 것. 또 그런 관찰과 사유를 통해서 좀 더 성경을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재해석의 과정은 신학도로서의 당연한 태도와 책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성경을 바라보는 오늘날의 ‘삶의 정황’이 또 하나의 다른 성경에 대한 비평과 해석을 그래서 또 다른 언어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을 부인하려거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한다기 보다는 사유와 질문을 통한 진리로의 탐구이며 그것이 구도자적인 자세일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찾아가 거듭남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며 다시 질문하였을 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의 길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보인 것이며, 예수님은 그와 같은 질문에 책망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언어로 니고데모에게 말씀해 주셨다.

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김호경, 책세상)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성서를 읽으면 인간이 보인다.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성서 속의 인간을 보면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의 모습은 그들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래서 2,000년 전에 씌어진 성서는 여전히 오늘을 가늠하는 잣대일 수 있다.”

죽으면서까지 우리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신 예수는 오늘도 여전히 현재의 삶, 우리의 세상을 해석하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