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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16. 22:19 스크랩
14일 오후 3시45분 서울 영등포동 대형 건물 지하의 긴 의자에 할머니 할아버지 네 명이 앉아 있다. 할아버지는 몸이 두꺼워 보이는 오리털 파카, 할머니는 순모 100%가 결코 안 돼 보이는 혼방 모직 코트를 입었다. 나란히 앉아 말없이 한 곳을 바라보는 네 사람은 그래도 선택받은 이들이다.

잠시 후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도착했다.

“다 팔렸어요?” “네. 오전 10시에 다 끝났어요.” “아주 먼 데서 왔어요. 땀을 팥죽같이 흘렸어요.” “내일 오세요.” 실망감을 넘어선 좌절감이 할머니 얼굴 주름살 사이를 파고들었다.

노인은 판매대 뒤에 높이 서있는 젊은 직원을 계속 올려다보았다. ‘팔아 달라’는 무언의 시위. 젊은 직원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띠고 할머니를 내려다본다. 할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서있었다.

“언제 오신 거예요?” “아침 9시에 왔는데 줄이 길더라고요. 번호표 받았더니 248번이야. 집에 갔다가 오후 4시에 오래서 지금 또 왔어요.” “그렇게 사람이 많아요?” “맨 앞에 줄 선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자기는 새벽 5시에 왔대요.” 이 건물은 오전 9시에 문을 연다. 그러니까 248번 할머니는 1시간을, 이 할머니보다 247번이 앞선 이는 5시간 기다려 들어온 것이다. 이날 서울 최저 기온은 영하 4도, 최고 기온은 1.8도. 이들이 기다린 곳은 롯데마트 영등포점. 이들이 기다린 물건은 5000원에 900g이나 준다는 ‘통 큰 치킨’이다. ‘통 큰 치킨’은 영업점 1곳당 하루 300마리만 팔았다.

나는 이 광경을 무심히 지나 카트를 끌고 씽씽 달린다. 무려 40%나 할인해 500g에 4000원을 조금 넘긴 양념 돼지고기, 호떡 뒤집개와 고무장갑을 사은품으로 주는 큐원 호떡 믹스를 카트에 담았다. 와, 싸다, 싸.

제품 창고에서 나온 한 남자 직원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내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다. “고객님, 행복한 쇼핑되세요.” 그 남자 직원은 장애인인지 다리를 절뚝거렸다. 젓갈 코너에 들러 시식하고, 한 바퀴 돌아 같은 자리에 왔다. 계산대 위치를 물었더니 젓갈 파는 직원은 아예 카트를 끌고 계산대까지 직접 안내했다. 젓갈도 안 샀는데, 고맙기도 해라.

세상이 유독 내게만 불친절하다고 생각되는가? 그럼 대형마트에 가면 된다. 물건 안 사도 좋다. 나에게 웃어주고, ‘고객님’이라 높여주고, 덕담도 해준다. 짜증이 나는가? 그럼 마트에 가면 된다. 구입해서 몇 번 쓴 물건이라도 뭔가 하자가 있다고 스트레스를 풀면 오히려 “미안합니다, 고객님” 하며 환불해 준다. 마트는 내게 참 친절하다.

‘1 1’, 시식용 만두…마트가 주는 게 아니다 이토록 친절한 직원들이 모두 마트 소속은 아니다. “이건 칠레산이 아니라 미국산 포도주스라 더 좋고요. 병도 유리병이라 위생적이에요. 주스 다 마시고 물병으로 쓰시면 돼요.” 특히 이런 멘트로 호객하는 앞치마 입은 아줌마, 아가씨는 마트에 물품을 납품하거나 수수료 내고 입점한 협력업체 직원이다. 협력업체 직원이 많을수록 마트는 좋다. 인건비는 대폭 삭감되고, 매출은 올라간다.

조끼 입은 사람이 물건을 정리하거나 계산대에서 일한다면 용역업체가 고용한 파견 근로자거나 마트가 직접 고용한 직원일 가능성이 높다(물론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다). 당신이 매장에서 만난 직원들은 근속 기간이 길어도 호봉과 직급이 거의 상승하지 않는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당신을 왕처럼 떠받드는 이 친절은 최저임금인 시간당 4110원을 갓 넘긴 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고객이 왕’이라며 호통 치진 말자. 더 품격 있는 서비스는 비행기 비즈니스석이나 5성급 호텔에서 찾으면 된다.

당신은 아마 마트 매장에 들어서면 1층 또는 지하에 있는 식품 매장에 먼저 들를 것이다. 이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게 시식이다. 그러나 이 또한 마트가 거저 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실컷 먹고 사지 않는 삼겹살, 만두, 젓갈 등은 대부분 납품업체 또는 마트에 입점한 매장 주인이 부담하는 것이다.

“마트 점장님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시식 하나만큼은 다른 마트를 이기고 싶다고. 아까워하지 말래요. 근데 제가 일하는 마트에 노숙자가 많이 와서 한 끼 식사를 대신할 만큼 시식을 많이 하거든요. 그래도 점장님은 ‘혹시 아냐, 노숙자들이 소주 한 병이라도 살지 아냐’고 그러시는데. 소주 팔면 마트는 이익이지만 제가 굽는 만두 장사는 손해잖아요.”(지난해 한 대형마트에서 만두를 팔았던 납품업체 직원 A씨) 만두뿐이 아니다. 14일 오후 롯데마트 영등포점의 16개 시식코너 중 12개의 판매원은 협력업체에서 나온 이들이었다. 2개는 마트가 담당하고 있었고, 나머지 2개는 직원이 없어 물어보지 못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대다수 ‘원 플러스 원’도 마트가 거저 주는 게 아니다. A씨는 만두 한 봉지를 사면 네 봉지를 주는 이벤트도 해봤다고 한다. “월말에 만두 매출이 지나치게 떨어질 때, 이런 이벤트를 해요. 손해 보는 게 뻔해도 마트에서 퇴출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 사지도 않으면서 공짜라고 돼지고기, 만두를 지나치게 많이 먹지 말자. 매출이 떨어지면 여사님(마트에선 아줌마 직원들을 보통 이렇게 칭한다)이 잘릴 수도 있다. A씨는 판매, 하역, 창고 정리, 심지어 마트 청소도 한다. 그러나 마트는 A씨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다. 만두 업체가 준다.

이토록 저렴한 친절 “갑과 을이니까요.” B씨(41)는 말 끝마다 마치 자동 리플레이 기능을 장착한 듯 이 말을 덧붙였다. 내게는 친절한 마트가, 그에겐 유독 불친절한가 보다.

B씨는 2002∼2008년 롯데마트, 까르푸, 이마트 등 마트 40여곳에서 초밥, 활어, 치킨, 족발 등을 판매한 식품업체의 수도권 매장관리 담당자였다. 그의 회사는 2008년 폐업하기 직전에도 연 4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물건은 팔리는데 회사는 망한 이 신기한 상황의 이유를 물었다. 그에 따르면 1000원짜리를 팔면 25%는 마트에, 10%는 세금으로 떼인다(마트에 매출이 공개되기 때문에 ‘유리지갑’이나 다름없어 세금을 속일 수도 없다고 한다). 재료비 30%(족발 닭꼬치 등 일부 품목은 30%를 넘는다)를 빼면 남는 것은 매출의 35%뿐인데 이 돈도 인건비와 회사 운영비로 쓰면 이익을 내기 어렵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다시 물었다.

-매장 직원을 줄이지 그랬느냐? “그러고 싶어도 안 된다. 마트는 최대한 직원을 많이 두도록 압박한다.” -재료비를 줄일 순 없었나? “재료 일부를 그 마트에서 구입해야 한다. 마트 측에서 아예 할당을 한다. 총판에서 2만원 하는 식용유를 마트에서 3만원에 구매하는 식이다. 한 점포당 200만원씩 구매 할당이 떨어졌다.” -행사 비용 줄이면 되잖나? “마트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전단지 교체한다면서 참여하라고 한다. 이때 특가 상품이 나가는 거다.” -재고를 줄이는 방법은? “밤에는 손님이 없는데도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골고루 깔아야 한다면서 음식을 만들라고 한다. 재고가 남아도 물건을 더 만들라는 거다.” -제품 종류에 ‘선택과 집중’을 할 순 없었나? “활어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다. 활어 업체가 망해서 나갔는데, 당장 구색은 맞춰야 하고 들어올 업체는 마땅치 않고 우리보고 하란다. 활어로 본 적자는 초밥 이익으로 메웠다.” -가격을 올리면 안 되나? “그것도 마트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 우리 맘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이런 순둥이가 다 있나. 시키는 대로 다 하나? 대답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갑과 을이니까, 1년마다 재계약하는데 찍혀서 퇴출되면 판로가 막히니까, ‘마트 입점하면 대박친다’고 환상을 품은 중소상인은 늘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윤이 아닌 ‘스펙’을 쌓기 위해 마트에 입점하려는 업자도 있다. “마트에서 큰 돈 못 버는 건 이제 저도 알아요. 그래도 마트에 입점하려는 건 홍보 때문이에요. 온라인 식품 시장에 진출하고 싶은데 고객들이 우리 김치를 모르잖아요. 이마트, 홈플러스에 납품한 김치라 하면 손님도 믿고 사는 거고.” 이렇게 말하는 김모(34)씨는 현재 대형마트 MD들을 만나며 마트 진출을 노리고 있다.

당신이 놀라워하는 저렴한 가격은 납품업체들 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얻어진 결과다. 마트는 실시간 매출을 점검하고, 고객에게 선택받지 못한 제품은 퇴출당한다. 그러나 납품업체와 마트가 공정한 경쟁을 하는 건 아니다.

B씨는 마지막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 빌딩에 언론사가 입주했는데, 빌딩 주인이 언론사에 기자를 많이 뽑으래요. 또 기자도 자기 맘대로 막 부려먹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당신이 고객센터에서 받는 5000원 상품권, 캐셔가 주는 것이다 원 플러스 원, 추가 증정품, 사은품을 카트에 가득 채웠다면 이제 계산할 시간이다. 캐셔 옆에 아마 조그맣고 낮은 의자가 있을 것이다. 캐셔는 하루 8시간 서서 일한다. 의자는 전시품일 뿐이다. 선진국에선 의자와 계산대 높이가 맞아 앉아서 일할 수 있다지만 국내 대다수 마트는 그렇지 않다.

“근무 끝나면 경리부에서 돈 통을 가져가요. 돈이 모자라면 제가 내야 돼요. 한 번은 손님이 도난 카드로 80만원 상당의 노트북을 결제했다면서 저보고 보상하라는 거예요. 제 월급이 100만원이 안 되는데. 사정사정해서 40만원만 냈어요.” 한 대형마트에서 5년간 캐셔로 일하다 2008년 그만둔 박모(45·여)씨 말이다. 이 마트는 캐셔가 실수를 해서 손님이 고객센터에 찾아가면 5000원짜리 상품권을 준다. 그러나 이 상품권도 캐셔가 대신 내는 경우가 많다. “실수한 게 인사고과에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고객한테 주는 상품권을 내가 대신 계산하면 눈 감아줘요. 1년에 두 번 상여금 주는데 최저 상여금을 3회 받으면 자동 퇴사니까 어쩔 수 없죠.” 이곳 캐셔들은 하루에 계산대 3곳에서 일한다. “2시간30분 일하고 30분 쉬는데 맘이 편하지 않아. 돈 통을 챙겨야 하니까. 그 무거운 걸 들고 휴게실에 올라갔다가 또 돈 통 챙겨서 다른 계산대 가고. 왜 한 계산대에서 일을 못하게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일부 마트는 바코드를 빨리 찍는 경진대회를 열거나, 고객의 계산대 대기 시간도 체크한다. 그러니 캐셔는 늘 마음이 급하다.

대형마트에 직원이 쉴 만한 공간은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다. 마트에서 만두를 판매했던 A씨는 “냉동 창고에 방한복도 없다”고 했다.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냉동 창고에서 일하다 박스가 떨어져 다리에 깁스를 했다. “만두 납품업체 직원한테 전화했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여사님은 왜 하필 매출 올려야 할 토요일에 다쳐요?’ 그러곤 잘렸어.” 당신이 값 싸고 질 좋다며 마트에 가는 건 자유다. 그러나 골목길 곳곳의 세탁소, 빵집, 안경점, 미용실, 식료품 가게가 문을 닫는다면 언젠가 1000원짜리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해 차를 몰고 마트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마트에서 누리는 ‘공짜’ 혜택은 납품업체 또는 중소기업의 비용이다. 마트는 고객인 당신에게만 친절하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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