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실존적 태도, 케에르케고르의 종교적인 태도는 지상의 모든 행복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서로 깊이 사랑을 나누던 여인 레긴 올센과의 약혼을 파기하였으며, 결별의 이유가 자신의 철학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그것을 신비롭게 간직하고자 했다.
진정한 신앙이란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항상 회의와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어떤 증거도 그리고 신앙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확증도 없다. 진정으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부단히 의심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삶은 어떠한 확실성도 평온함도 지닐 수 없다.
심지어 성서의 진실성도 의심해야 한다. 진정으로 신이 성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믿음을 가질 때만 그것을 믿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그것을 보장하지 못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회의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믿지 않고, 진정으로 사유하지 않고, 참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바로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갈등과 초조, 불안... 이런 것들로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애초에는 없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을 다 받아들일 수 없다하더라도 안락을 추구하며, 믿음이 의심이 없음을 가르키는 오늘의 신학의 사조에 따끔한 일침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메시지는 성공과 영광의 메시지가 대부분이다. 고난과 섬김의 교회는 점점 줄어들고, 세상에서 동일하게 성공과 칭찬과 존귀를 얻기 위한 메시지로 가득하다. 때문에 오늘 내게 들리는 많은 메시지들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앙을 경건과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얼만큼의 성경을 읽었는가, 얼마동안 기도했는가,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마치 수학의 정석해법을 알려주듯 오늘 내게 들리는 메시지의 대부분의 이런 류가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답이 떨어지는 인생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성공한 인생이 얼마나 될까? 오늘 교회는 또 하나의 엘리트주의를 부추기고 있고, 그리해서 돈이 없으며, 사회적 위치가 없으면 교회에 나가기가 무섭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이란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우리를 안락하게 놓아주질 않는데, 우리는 아니 나는 오늘 신앙의 힘으로 내 환경이, 내 주변의 사람들이, 심지어는 나 자신이 어떻게든 변하여 불편한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려고만 든다. 그것이 옳은것일까? 때론 아무런 변화가 없이 내게 주시는 이런 고통스런 환경가운데서 있는 것 자체를 견딤으로써 결국 알지못하는 사이 나를 그분의 형상으로 빗어가시는 그 인도함을 편안하게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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