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New life !
johnworld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 total
  • today
  • yesterday
2005. 9. 26. 00:32 스크랩

빈야드운동

빈야드교리 겔1:22-28 19971221 동구 (1996년 제81회 총회 보고서)

가.빈야드 운동이란?
[제3의 물결, 빈야드 운동, 토론토 축복]이라고 불리운다. 빈야드라고 불리운 이유는 미국 켈리포니아의 애하나임에 있는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ain Fellowship)를 이끄는 존 윔버(John Wimber)를 비롯해서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형성하단체가 「빈야드교회연합(Association of Vineyard Churches)」으로서 이제는 교단처럼 되었기 때문이고, 「토론토 축복」이라 함은 죤 아노트(John Arnott)가 개척한 “토론토 공항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언론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토론토 축복'은 1994년 1월 20일 부터 토론토에 있는 빈야드교회의 집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클라크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었는데 집회의 첫날부터 성령의 능력에 압도되어 사람들이 교회 바닥에 드러눕거나, 형언할 수 없고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오고, 여러 가지 이적들을 체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후부터 미국, 영국 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토론토를 방문하고 동일한 체험을 하고 있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권능주의와 성령체험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감정주의의 두 관점이 강조되는데, 능력전도를 주장하는 죤 웸버의 경우는 권능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고,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죤 아노트의 경우는 감정주의적인 면이 강하다고 하겠다.
죤 웸버는 권능(혹은 능력)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 능력이란 초자연적인 능력이요, 초자연적인 선령의 은사로서 병자를 치유한다든지, 귀신을 내어 쫓는다든지, 예언을 한다든지, 혹은 지식의 말씀이라고 하는 은사를 사용해서 전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토론토의 죤 아노트는 신앙 체험에 있어서 감정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사랑을 다분히 감정적으로 해석한다. 그가 로멘스(romanc7e) 감정(emotion) 느낌(feeling)이라는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과 “하나님은 너와 더불어 깊고 감정적이며 의미 있는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시며, 그는 또한 네가 그런 관계를 다른 사람들과 갖게 되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는 감정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감정적으로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다. 감정은 우리의 창조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감정적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우리를 감정적으로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를 온 마음과 생명과 뜻을 다해 감정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라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현재는 죤 웸버가 이끄는 빈야드교회를 중심한 빈야드운동과 죤 아노트가 이끄는 토론토 공항교회를 중심한 토론토 축복은 분리되었다.

나.빈야드운동의 문제점들

1)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이해가 치우쳐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다양하다. 성령의 은사는 기적적인 것도 있으나, 기적적인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다. 또한 그런 은사들은 각 사람이 모두 다 받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사명과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에서는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능력, 그리고 신비 현상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특정한 은사들이나, 격렬한 감정의 분출 현상이나 이적들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성령의 역사의 다른 중요한 측면들(즉, 말씀, 사랑의 삶,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 사회에 대한 책임적 행위에 관련된 성령의 역사)이 간과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 웬일인지 최근에 웸버는 이 점에 있어서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 그가 미친 영향은 결국 초자연적인 능력을 매우 강조하여 열광주의에 빠지게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거룩한 욱음, 떨림, 쓰러짐, 짐승소리 등의 현상은 비성경적인 현상들이다.
빈야드운동이 사람들의 혐오감을 유발하는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들 가운데서 많이 일어나는 떨림, 쓰러짐, 거룩한 웃음 등의 현상 때문이다. 또한 이런 현상들이 실질적으로 이 운동의 특성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들의 집회의 분위기는 그런 현상들을 암시적으로 격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짐승소리는 토론토 교회의 현상으로서 죤 아노트가 그런 현상들과 특히 짐승소리를 정당화하는 성경적인 증거로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묘사한 계5:5이라든지 하나님이 사자같이 부르짖으신다는 아모스3:8등을 인용하여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는 억지스러운 해석으로 위의 본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은유로 묘사한 것이지 실제적인 짐승 소리나 괴성을 정당화하는 말씀은 아니다.
또한 은혜를 체험하고 쓰러지는 현상은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이들은 쓰러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겔1:28과 단8:17을 근거로 에스겔과 다니엘의 쓰러짐을 말한다. 그러나 에스겔이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 스스로 앞으로 부복한 것이지, 빈야드의 경우와 같이 은혜의 체험으로 뒤로 넘어진 것이 아닌 것을 볼 때 전혀 성경적으로 합리화 할 수 없는 현상에 속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이 넘어진 것(요18:6),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넘어진 것(마28:4) 등을 열거하지만 성경의 그러한 예들은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넘어진 것이 아니므로 성경적 근거가 결코 되지 못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쓰러진 것이라든지(행9:4), 요한이 밧모섬에서 쓰러진 일(계1:17) 등은 주님의 직접 출현에 직면한 것이었다. 거룩한 웃음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창17:17, 21:6)과 같은 것을 예로 들지만,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은 어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광적으로 웃는 웃음이 아니다.
또한 떠는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66:5이나 렘5:22, 막5:33, 눅8:4, 행16:29, 고전2:3, 고후7:15, 빌2:12, 히12:21 등을 인용하지만, 거기에 나타난 것들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은 어떤 두려운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서, 두려워서 떠는 의식적인 것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빈야드 운동에서처럼 주체할 수 없는 주관적이며 잘못된 감정이 아니다.

3)위와 같은 현상들은 격렬한 종교적 감정의 표현으로 그런 현상들 자체가 강조되고 격려되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동된 사람들이 격렬한 감정 속에서 그러한 현상이 수반되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들이 격려되고 장려되어 은혜 받은 표적으로 정형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위험스럽다.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소용되는 성령의 선물이며 능력이다. 은사들은 구체적인 유익, 특히 타자를 위한 유익을 가져온다(고전14장 엡4:11).
빈야드 지도자들은 간혹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느냐 아니냐는 관건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문제는 성령의 은혜로 삶이 갱신되고 새롭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새로운 사역의 능력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각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무언가 그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럴 경우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지 말고 온전히 수동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심지어 방언도 하지 말도록 권한다. 그런 경향은 암암리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현상 자체를 중요시하고 사모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체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별이 생기게 되고, 특정 체험이 표준화되며, 오히려 성령의 포괄적인 역사를 제한하게 된다. 이점에 관하여 토론토 측이 더욱 문제가 된다.
특히 절제하지 못하여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극단적인 감정의 분출 현상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경우라도, 그런 것은 드러내고 공개하고 격려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현상들은 사람들에게 의구심과 혐오감을 일으키기 쉽다.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방언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공개석상에서 방언하는 것에 대하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배려를 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 것에 주의를 해야 한다

. 그런 현상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유익을 경험했을지라도,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특히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고 오히려 혐오감을 주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런데 빈야드 운동에서는 특히 토론토 측에서는 그런 현상들을 드러내고, 심지어 집회시 강단에서 간증할 때에도 나타나도록 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4)예배를 무질서하게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찬양과 예배의 갱신은 그들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요점이기도 한다. 그들은 형식에 얽매여 역동성을 상실한 예배를 자유롭고 무형식적인예배를 통해 갱신하고자 한다. 어떤 면에서 항상 똑 같고 형식적인 예배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식 속에서도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빈야드 교회가 아무리 무형식적인 예배를 드린다 해도 이미 나름대로의 어떤 형식이 자리자게 된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긴 찬송 시간, 설교, 각 사람을 위한 기도시간 등은 이미 하나의 형식이다.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교류하며 드리는 것이기에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예배는 엄숙하고 질서 있게 드리고,기도는 따로 기도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수용하는 이들의 신학적 목회적 성숙이 더 문제를 확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목회자들이 빈야드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므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여러 가지 은사들과 역사를 받아들이되,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건전하고 덕스러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성령 충만에 의한 기쁨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들 앞에서 구별된 삶을 살게 하는 변화의 동인이지 히스테리칼 한 감정변화를 일으켜 예배시간에 짐승같은 괴성을 지르거나 낄낄거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며 토론토 은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청교도 신학과 18세기의 대 각성 운동은 신자들의 감정이 아니라 삶의 자세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삶의 변화와 연관되지 아니한 성령체험은 교인들의 신앙을 반지성주의적이며 기복적인 것으로 만들 소지가 있다
성령의 역사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성령의 역사에 공통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말씀으로 되돌아 가게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