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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9. 18:16 As it is

출처 : 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nnum=514923&sid=E&tid=4

‘불평등 기술’ 가르치는 자본주의 통타

2009-12-18 오후 12:18:19 게재

사람 중심으로 부(富) 개념 새롭게 정립 … 양극화 사회 되볼아보게 해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1만2천원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읽기를 포기했다. 20년쯤 전의 일이다. 분배론을 전공한 어느 선배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그는 얄팍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Unto This Last''''-우선 그 책 제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옮긴이는 이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로 번역했다. 좋은 번역 같다. 이 고풍스런 제목은 이 책이 제사(題詞)로 삼은 성경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포도밭 주인이 일할 사람들을 고용하면서 오후 늦게 부른 일꾼에게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과 똑 같은 임금을 지불한 이야기다. 주인은 불평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 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이런 계산법은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도 천국의 우의(寓意)라는 문맥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국부(國富)의 명분 아래 개인의 무한한 탐욕을 정당화한 19세기 영국 지식층의 반감은 당연했다. 잡지에 연재된 러스킨의 글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네 편의 논문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을 때 그 초판은 10년 동안 겨우 880 권이 팔렸다.
하지만 러스킨은 영혼이 있는 인간을 못 박았던 자본주의 경제학의 밑그림에 지울 수 없는 의문부호를 던졌다. ‘마지막 사람’의 관념은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 디킨즈가 크리스마스 정신과 대조시켰던 수전노, 스크루지를 닮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의 통념에 도전한 강렬한 상징이었다.
그러면 그건 상징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임금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은 러스킨의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다. 그가 수요와 공급이 임금을 결정하는 걸 당연시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한 쟁점이다. 다만 그것은 부(富)의 정의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전체에 관한 그의 폭넓은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을 보았다.


여기에서 잠시 경제학은 가정(假定)의 학문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명한 농담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무인도에 표류한 배고픈 사람들이 음식이 든 깡통을 찾았는데 따개가 없었다. 그 가운데 경제학자가 말했다. “자, 깡통따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경제학의 본질을 짚어낸 통렬한 풍자다.
경제학의 화려한 건물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편리한 가정 위에 서있다. 러스킨은 묻는다. 만일 체조학에서 뼈대 없는 사람을 가정해서 사람을 둘둘 뭉쳐 환약처럼 만들거나 케이크처럼 납작하게 누르거나 밧줄처럼 길게 잡아 늘이면 몸에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걸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에겐 인간의 영혼을 부정하는 가정 위에 전개된 경제학의 이론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생산자를 대표하는 상인은 이익의 인간일 따름이고 명예나 도덕의 인간은 아니라는 전제에 대해 러스킨은 강력히 반발한다. 그는 설교단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도 순교가 있을 수 있고, 전쟁만이 아니라 장사에도 영웅적인 행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군인이나 의사, 목사나 법률가에게는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상인에 대해서는 인간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베니스 상인’ 같은 역할을 맡기고 만족한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정말로 이상한 단 한 가지 점은 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들려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톨스토이는 “러스킨은 가슴으로 생각하는 희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는 시대의 밖에 서서 마취된 시대의 쾌락과 고통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가슴으로 생각하는 희귀한 책이 태어났다.
이 책에는 한 마디로 선지자의 통찰이 있다.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물질이 아닌 인간의 학문이라는 깊은 울림이 있다. 이 책의 핵심은 러스킨 자신이 밝히듯 부에 대한 정의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복에 관한 전인적인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러스킨이 주목한 것은 타인에 대한 부의 지배력이었다. 그런데 부가 지배력으로 작용하려면 누군가 자기를 위해 일해 줄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경제학이 가르치는 부자 되는 기술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행복학이 아닌 불행학의 씨앗이 내재한다.
부의 본질이 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에 있다면 소유한 부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들이 고귀한 사람일수록, 부가 커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야말로 ‘부의 광맥’이다. “모든 부의 최종적인 성과와 완성은 원기왕성하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한 인간을 되도록 많이 생산하는 데 있을 것이다.”
러스킨은 자본주의 경제학을 속류 경제학으로, 사회주의 경제학을 파괴의 경제학으로 비판했다. 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경제학의 천하를 삼분하여 그 하나를 차지한 촉나라 같은 느낌을 띠는 것이 러스킨의 인도주의적 경제학일 것이다.” 이 얇은 책의 역사적 의미는 그만큼 무겁다.
많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던 성경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며 이 글을 끝내고 싶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박순철 칼럼니스트
posted by joh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