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양육팀이 생기고 첫번째 세미나 시간을 가진 후... 강사(?)란 타이틀이 아직은 낯설면서 어색한 느낌은 차치하고서라도, 첫 시간을 마치고 나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못한, 그러면서도 다른 곳에서 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만한 황금같은 시간에 찾아온 형제, 자매들에게 효과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떨칠 수가 없었다. 성경공부를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부담'이었다.
가르친다는 것은 뭐고, 배운다는 것은 뭘까? '나는 가르칠만한 자격이 있는가?'란 자조적인 스스로를 향한 물음과 함께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르친다는 것... 흔히 많은 신앙인들은 '신앙은 이성을 초월한다' 또는 '종교는 철학을 넘어선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대개는 신앙이 합리나 비합리(불합리)를 넘어서는 초합리적이며 초논리적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나 신앙이 초합리적이며 초논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 안셀무스(St. Ansellmus)에 따르면, 신학이란 '이해를 구하는 신앙', 다시 말해 '신앙을 해명하는 작업'이다. 만약 신앙이 전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신학이 있을 수 있는가? 신앙이 이성이나 철학을 초월한다는 말의 참된 뜻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헌신의 문제임을 지적하는데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헌신 - 즉 실천 - 의 문제 역시 모든 종교적 담화에서 이성적 논의를 배격하자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무언가를 믿기 전에 그것을 이해하려고 한다. 따라서 종교인이 자신의 신앙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설득하려고 할 때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능력이 닿는 데까지 합리적으로 이해시켜야 한다.
사실 우리는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접하게 될 때 그것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을 듣기를 원하며, 그것이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 때에는 그것에 관한 납득할 만한 해명을 요구한다. 물론 만족할 만한 합리적인 설명이란 쉽지 않으며 설혹 합리적인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신앙, 즉 종교적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논의의 영역을 확보하는 일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모두에게 유익하다. 합리적인 논의란 바로 종교인과 비종교인, 종교인과 종교인 간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을 말한다. 종교인은 합리적 논의를 통해 자신의 신앙이 부지불식간에 빠져들 수 있는 미신이나 광신을 경계할 수 있고, 비종교인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을 수 있는 종교에 대한 막연한 반감, 즉 종교란 대체로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을 제거할 수 있다.
엉뚱한 대로 가는 것 같다. 위의 내용들은 이만 갈음하고... 어찌되었든...
가르친다는 것... 그것도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 우리의 이성과 지식을 통해서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한 주관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하는 작업이라고 말하고 싶다. 만일 그와 같은 작업이 우리 신앙의 토대, 기초를 이룬다면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또는 쉬운 일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이것이 너무나도 비중이 있으면서 중요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교회에서의 일련의 활동이 이와 같은 가르침과 배움의 활동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교,성경공부 시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로의 단순한 교제를 통해서도 우리는 누구를 보면서 무엇을 배웠다고 하지 않던가... 부지불식간에 끊임없는 가르침과 배움의 활동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독 테이블 상에서 이루어지는 격식을 갖춘 가르침과 배움의 시간이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감정이다. 물론, 그 가운데 좋은 마음과 성실한 자세로 '하나'를 알아가는 기쁨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와 같은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을런지 모르겠다. 또한 그런 표현을 할라치면 금새 되돌아오는 말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심령이나 태도의 문제내지는 기도해보라'로 핀잔(?)을 듣기가 일쑤이고, 때문에 그런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컨디션이라는 것이 늘 'good'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한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현재의 상태를 그 사람의 '믿음'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 사람의 컨디션이 '현재'는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영'이 유동적인 것 처럼...
효과를 보는 것은 무엇이든 '진리'가 되는, 조작적 양식의 앎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현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르침과 배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금 현재 유행하는 것들을 채용, 그것을 습득하고 그런 습득된 기술을 통해 하나의 상품, package 를 전달하는 것과 같은 느낌 말이다.
바로 그와 같은 하나의 상품을 팔거나 전달하는 듯한 그래서 결국에는 똑같거나 비슷한 또 다른 사람들을 양산하는 듯한 가르침과 배움... 바로 그와 같은 공장의 붕어 빵 틀에서 똑같은 붕어 빵을 제조하는 듯한 과정에서 창조적이고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나올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그만큼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모른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가르칠만한 자격은 있는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말하고 있는지...'를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딱히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것 또한 아주 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그래서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