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개봉된 영화를 두 번 본 영화가 '왕의 남자'가 되었다. 영화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라든지(애초에 이런 것은 없다), 아니면 큰 감동과 재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양육팀'의 모처럼만의 가벼운(?) 모임이 영화로 선택되었고, 자연스럽게 흥행되고 있는 영화를 보다보니…
일단 영화가 끝이 나고 극장을 나오면서의 느낌, 여운… 그런 것이 있는 영화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슬펐다. 비극적 결말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그리고 무거웠다.
실제 영화의 제목이 '왕의 남자'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왕과 광대'로 하고 싶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영화 상에서 '왕'은 '광대'같았고, '광대'는 '왕'처럼 진지하면서 동시에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읽혀진다.(물론 이 영화의 스토리는 픽션이다. '공길'이란 인물은 실제로 있었던 광대였다고 하니...)
왕은 가벼울 수 없는 존재이다. 위치가 그렇고 권한이 그렇고 하는 일이 그렇다. 그는 곧 ‘나라’와 동일시되던 시대의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광대란 얼마든지 가벼움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세상을 읽는, 바라보는 그들에게서 나오는 해학과 웃음은, 우리들로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들의 신명나는 '놀이판'에서 느낄 수도 있거니와 얘기할 수 없었던, 또는 꺼리던 것을 재치와 유머를 섞어 재해석 해주는 작업들이 통쾌하고 재미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기까지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놀이판'에서 만큼은 '광대'는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얘기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자유함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놀이판에서만'이라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을 취할 수가 없다. 놀이판에서의 삶을 실제의 삶으로 가져오는 이가 있다면, 아마 그는 얼마 있지 않아 가까운 병원을 찾아가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놀이판에서의 자유스러움이 그로 인해 우리가 느끼는 대리만족이 현실로 그대로 표출된다면... 실제로 영화에서 연산군은 ‘놀이판’과 ‘현실’을 즉 ‘극’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에서의 얘기지만) 영화의 스토리상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스러움, 그리고 법도와 절차와 선왕을 선례를 아직도 따르는 충신들에 의해, 본인의 소신을 펼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상처는 상처대로 간직하면서 사는 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도 어찌 보면 피해자이다.
광대들은 놀이판에서 현실문제를 비꼬아서 지적했고,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제거되는 정말 '광대'와 같은 삶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도 광기에 서린 왕에 의해서... 누가 그런 '놀이판'을 하겠는가?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 놀이를 계속한다.
광대들에 의한 놀이판에서만 진실을 얘기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영화 중에서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진실을 감추거나 호도하면서 그냥 시간이 흘러 잊혀지거나 덮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로 위장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가깝게는 황우석의 논문 조작사건에서부터 멀게는 선악과 나무를 따먹게 하려는 뱀의 간드러지는 속삭임에게 이르기까지... 결국 누군가에 의해서 그 거짓이 드러나고 진실 같은 말에 속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만큼 용기가 없다. 진실을 대면할 용기 말이다. 연산군의 폭정, 여인의 치마 폭에 싸여 백성들을 돌보지 않음을, 부정 축재하는 신하들,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이 모든 비밀들이 광대들에 의한 놀이판에서 재연되고 있다.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얘기. 왜 진실이란 것이 그와 같은 놀이와 광대들의 몸짓에 의해서만 전해져야 하는지... 우리를 웃게 만들지만 웃음이 지난 뒤 두려움과 아울러 슬픈 현실을 목도하는 것이다.
많은 공신들이 있었겠고, 주변에 많은 이들이 있었겠지만 정작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천한 광대들의 말과 행동 속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만큼 위(?)로 갈수록 가려야 할 것이 많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는 얘기일까? 물론 그들의 놀이판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은 왕의 가까이 있는 처서(?)라는 내관에 의해 지시된다.
아프지만 진실을 얘기해 주는 사람이 나에게 있다면... 그런 놀이판이 아니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는 있기 때문에 그런 놀이판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만일 그 진실이라는 것이 인격에 관한 것이라면 모욕을 느낄테고,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주눅이 들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때론 그런 사람들이 내겐 절실히 필요하다.
놀이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왕. 진실을 호도하거나 숨기고 있는 주변인물들. 오히려 감출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스러움이 있는 광대들. 그러나 우리는 감출 것이 있기 때문에 자유스러움이 그만큼 없다.
크로스 섹슈얼(Crosssexual) 이란 용어가 유행이다. 영화 중에 나오는 ‘공길’이란 배우도 그렇거니와 요즘 나오는 ‘꽃미남’ 때문이다. 새로운 고급 소비 트랜드로 상업적으로 이용되어 지고 있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왜 이런 ‘레트로 섹슈얼’이니 ‘매트로 섹슈얼’이니 하는 것들이 유행하는지도 살펴 볼 일이다. (어렵네… -.-)
'공길'이란 광대는 어디를 가던지 주목을 받는다. 그의 여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분위기에 이끌린다. 남성 같지만 남성 같지 않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미모에 반했다. 너무 이뻤다. 중성적 이미지를 풍기는 그에게 무슨 매력이 있는 것인지?
그에게는 보통 남자들이 없는 특별한 것이 있다. 여성스러운 외모, 그리고 그런 몸으로 표현하는 여성의 모습이 진짜 여성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그는 늘 수동적인 입장이다. 물론 사회적인 신분이 그로 하여금 그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을 수 없으면서 스스로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 결정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 온 그에게, 남들이 요구하는 것을 따라 주는 것이 터득된 삶의 방식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늘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고 남들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보인다. 부당하다고 잘못되었다고 얘기하질 않는다. 요구에 순응할 뿐이며, 오히려 가까이에 있는 동료 광대가 그런 그를 질타한다. 오늘 내 스스로 인생의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삶의 정황과 조건이… 우리에게 언제 닥칠는지 모르겠다. 불가항력적인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그와 같은 인물들이 선택한 것에 대해 우리는 종종 너무 부정적이다. 그러나 도매금으로 그들을 한꺼번에 매도하는 것은 너무 사리가 깊지 않은 말일 것이다.(좀 다른 얘기지만 크리스챤들이 이런 잘못을 참 많이 저지른다.)
요셉이 그랬다. 구덩이에 던져 넣는 형들에게, 그리고 상인들에게 팔려가면서, 그리고 남의 집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면서... 정말 이상한 것은 그런 상황 때마다 그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려달라고,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고 정황이 바뀌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몸부림도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단 한번, 보디발의 아내가 그의 몸을 요구할 때, 그는 그 상황에서 빠져 나왔다. 그것이 어쩌면 그가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한 삶의 정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설사 요셉이 순응했다 해도 나는 그를 욕하고 싶지 않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문화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직업이 다른 상황에 있는 두 사람을 비교하는 일은 억지일 것이다.
공길의 삶의 방식을,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지 못함으로 남들이 요구하는 것들에 맞추어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괴로울지... 나는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생이라는 광대와 함께 다시 태어나도 ‘광대’로 살 것이라는 외침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자유로움과 순수함이 있는 그들… 그런 자유로움과 순수함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외침이다. 나는 지금껏 다시 태어나도 이것을 하겠다는 것을 말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른 인생을 살아보면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도…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순수함과 자유로움이 좋다. 인생을 더 살고 볼 일이다. 그런 순수함과 자유로움이 생길 때까지… 혹시 세월과 나이의 때로 그런 날이 올는지는 확신을 하지 못하지만...
두 눈 멀쩡하던 시절 ‘장님’역할을 하다가 실제로 눈을 잃고 ‘장님’이 된 ‘장생(감우성)’이 이젠 ‘장님’의 연기를 할만한데 죽게 된다는 말은 참 인상적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흉내내는 인생을 살던 그가 이젠 그들과 같은 인생이 되어 산다는 것… 더 이상 ‘연기’가 아닌 ‘실제’다. 보이는 눈으로 보이는 것을 흉내나 내던 인생이, 보지 못하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연기하는 것… 다른 차원의 광대가 되는 것이다. 보지 못함으로 느껴지는 것들은 훨씬 많아진 것이다. 뜬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위로, 저 높은 곳으로, 하늘을 향하여… 우리의 인생이 펼쳐지기를 원한다. 누구도 밑으로, 저 낮은 곳으로, 땅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이 위로나 저 높은 곳이나 하늘을 향하지 않고, 밑으로 더 낮은 곳으로 이 땅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볼 때,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영성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위로부터의 능력과 임재로부터 그런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흉내와 실제는 다를 뿐만 아니라 쉽게 살아지지도 않는다. 그런 영적인 말로 쉽게 살아지지 않는다. 눈이 있던 사람이 눈이 없는 사람이 될 때에야 비로소 ‘장님’의 실감나는 연기 인생을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